우주괴인 왕마귀 잡담

2024.03.30 22:45

돌도끼 조회 수:222

글 뒷부분에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대괴수 용가리]와 더불어서 한국 괴수영화의 조상님 대우를 받는 작품입니다. [왕마귀]가 [용가리]보다 두달 먼저 개봉했고 현존하는 중에선 가장 오래된 국산 괴수영화랍니다.

근데 [용가리]쪽이 제작규모나 화제성이 더 큰 프로젝트였던 것 같으니까, 어쩌면 [왕마귀]는 [용가리]의 제작 소식을 듣고는 '그럼 우리가 먼저'하고 나온 목버스터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당시의 정확한 상황을 저로서는 알길이 없지만...

그래도 일본에 기술하청을 줘서 만들었던 [용가리]와 달리 [왕마귀]는 순정국산품이란 점에서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니까 대략 기본적인 퀄리티 정도만 확보해도 의미 깊은 영화로 칭송을 받을 수 있겠죠. [용가리]도 퀄리티가 썩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괴수영화 팬이라면 즐길만한 내용이고 그래서 상당한 버프를 받잖아요.


[왕마귀]가 자랑할 수 있는 거리가 한가지 있습니다.
'우주 SF 영화'로 한정한다면 [왕마귀]는 확실한 대한민국 최초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때가 막 아폴로 계획이 한창 진행중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아직 달착륙까지는 못갔지만 그래도 당시 우리나라로선 상상도 못하던 일들이 외신으로 계속 전해지고 있었을테니 사람들의 우주에 대한 관심도 부풀어있었겠죠.

그래서인지 영화 초반은 나름 SF물이라는 느낌이 납니다. 디자인 센스가 처참하고 외계인들이 꾸미는 계략을 잘 들어보면 실소가 터져나오는 어이없는 계획이긴 하지만요.
그러다 외계인의 계략-왕마귀를 지구에 떨어뜨리는 것-이 실행된 순간, SF물로서는 끝입니다. 외계인들은 그 뒤로 뒤로 물러나서 끝날 때까지 화면에 거의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 뒤로는 왕마귀가 한국(주로 서울)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동안 사람들이 당황해서 도망하는 모습만 죽 나오다 끝납니다. 스토리라 할 것도 없어요. 앞뒤가 이어지지 않는 장면들이 '나열'됩니다.

설정상 남녀 주인공이 있긴 하지만, 남주는 처음에 얼굴 잠깐 비친후 영화 내내 거의 화면에서 실종상태로 있다가 다 끝날 때 가서야 뭐 좀 하나보다 싶고, 여주는... 그냥 영화 만든 사람들이 [킹콩]의 흉내를 내보고 싶어서 투입된 캐릭터ㅂ니다. 괴수한테 납치되서 손바닥에 올라가는 여자역할.
근데 왕마귀가 이 여자를 붙잡아 데꾸 다니는 이유가 안나와요. 다니기 불편할텐데 영화 내내 고집스럽게 여자를 손에 올려놓고 어슬렁거립니다. 무슨 짓을 해도 신기하게도 손에서 안떨어져요. 다른 뭔가를 부수고 있거나 공격을 받을때도 늘 손에 붙어있습니다.



괴수영화라면 모름지기, 괴수가 벌이는 건물 철거작업이 있어야겠죠.
국산기술로 재현했다고 하는 여러가지 당대 건물들의 미니어처들이 나오는데, 괴수영화에 나오는 미니어처는 당연히 때려부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만... 기술적 완성도는 논외로 하더라도 어쨌거나 만드는데 돈과 시간과 노력이 들었겠죠. 그래서 부수기 아까웠나 봐요.

나름 그럴듯하게 재현한 독립문 미니어처가 나오는데 저걸 이제 신나게 밟아서 아작을 내려나? 했더니 왕마귀가 다리를 크게 뻗어 문 위로 그냥 지나가 버리고(엉?)...
그 뒤로도 별로 부수는 건 없이 그냥 건물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일이 많습니다. 간혹가다 뭔가를 철거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는데, 어째 단가가 적게 든 것만 골라서 해체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ㅎㅎ(어쩌면 부수지 않은 미니어처는 협찬받아서 갖다놓은 게 아닌가 싶기도...)

괴수영화라면 모름지기, 지구방위군과 괴수와의 한바탕 대결이 있어야겠죠.
이 영화속 지구방위군은 당연히 대한민국, 하고도 공군입니다. 땅에서만 노는 영화니 해군이야 그렇다쳐도 육군의 존재가 완전히 무시됩니다.

공군 전투기가 떠있는 장면은 꽤 적지 않게 나옵니다만 99.9%가 국방부홍보영상스톡 푸티지고, 그러다보니 괴수와 공군간의 상호작용이 없습니다.

대신에 말로 때우기 신공을 펼치고 있습니다. 말로는 없는게 없어요. (60년대 대한민국 공군이) 무슨 살인광선이라는 정체불명의 무기에 핵무기까지 가지고 있다고 나와요. 그렇지만 하나도 안쓴다는 거.
주인공이 "공격했는데 효과가 전혀없었습니다"라고 무전 보고하는 장면만 나오고 공격하는 장면은 안보여줍니다. 구경하던 시민들이 "방금 터진게 네이팜이지?" 라고 말하는 걸로 불꽃 하나 안보여주고 폭격 장면을 때웁니다.
이러니 주인공이 실종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죠. 원래는 괴수와 열심히 싸우는 멋쟁이 군인아저씨로 캐스팅했을텐데 괴수랑 싸우는 장면을 안보여주니까요.


[왕마귀]하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기억하고 가장 많이 회자되는 부분이, 이 영화에서 실제로 지구방위군 역할을 하는 건 한명의 거지 소년이라는 거죠. 이 소년이 대괴수결전병기인 과도(빈집에 무단침입해 과일 깎아먹다 들고 나온 거)를 들고는 왕마귀에게 달라붙고, 영화속에서 지구인이 왕마귀에게 먹인 유효타격의 99.9%는 다 이 과도로 달성한 겁니다.
영화속 가장 볼만한 특수촬영 장면도 얘가 왕마귀한테 매달려 있는 부분이고요.

근데 얘가 스토리상으로는 정말 무뜬금하게 갑툭튀한 애예요.(뭐 대부분의 장면이 무뜬금한 영화긴 하지만) 인물 설명이 전혀 없어요.

군대도 어떻게 못하는 걸 어린애의 활약으로 무찌른다? 그럼 이거 처음부터 애들을 노리고 만든 영화...?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입니다. 남녀 주인공이 처음 소개되는 장면에서 둘이 섹스를 하고 있었어요. 거기다 혼외정사ㅂ니다. 중간에는 아내를 걸고 스와핑 내기를 하는 남자들이 나오고요. 가뜩이나 지금보다 더 엄숙했을 60년대 사람들이 애들 보여주려고 만든 영화에 그런 내용을 넣었을 리는 없을 것 같아요.




영화의 결말.
어린애 하나가 반쯤 장난으로 왕마귀를 모니터링하는 통신 안테나를 부셨을 뿐인데, 왕마귀와의 연락이 끊기자 그걸 지구인들이 놀라운 과학기술력으로 괴수를 물리친 걸로 오해한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의 행운을 빌어주며 스스로 왕마귀를 자폭시키고 물러납니다. 정말 신박한 전개죠?

얘들은 왕마귀의 활동을 지켜볼 디스플레이 모니터 하나도 없으면서 그냥 떨궈놓고 무작정 기다리기만 한거예요. 왕마귀가 일정시간 지나도 무사하면 지구인들의 대처 능력이 별볼일 없는 거니까 침략 확정. 왕마귀와의 연락이 끊기면 지구인들의 과학력이 뛰어나서 물리친 거니까 포기하고 행운 빌어주기. 그와중에 뒤처리까지 알아서 해줍니다. 세상에 이런 친절하고 신사적인 외계인이 또 어디있답니까. 지구 침공을 꿈꾼 외계인이라고 항상 사악하고 더티해야한다는 건 편견이죠. 이거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정치적 올바름 아니겠습니까.


....이 희대의 전개는 어쩌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때문에 생겨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든 사람들이야 아마도 전투기 모형 띄워서 폭죽 팡팡 터뜨리고 일본애들처럼 액티브한 전투장면 만들고 싶었겠죠? 그치만 해보려니까... 기술도 노하우도 1도 가진 게 없으니...
[용가리] 팀은 아예 일본애들을 불러다 용역을 시키는 걸로 실현시켰지만 이쪽은 현실의 벽에 부딛혀서 어쩔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군대 대신 괴물을 물리쳐줄 슈퍼히어로 소년이 나오게된 건 아닐지... 지구방위군이 괴물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이는 장면을 만들 수가 없어서 외계인들이 스스로 자폭시키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건 아닐지... 하고요.

영화의 상당부분을 차치하는 것이 깁희갑, 송해, 박시명 등 당대의 유명한 희극인들을 동원해서 만든 뜬금포 개그장면들입니다. 스토리 전개상 전혀 필요없는 장면들이지만 스크린 장악 시간은 왕마귀와 거의 비슷하지 않나싶어요. 이것도, 스펙터클한 장면을 만들어 넣지 못하는 대신 상영시간은 채워야겠고 해서 집어넣었지 않았나 싶고...

그러니까 어쩌면 [왕마귀]는 열악한 현실속에서 어떻게든 우리손으로 괴수영화를 만들어보고자 한 그 방법론이 더 흥미로운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영화속 괴수의 키가 엿가락처럼 왔다갔다 합니다. 그냥 보기만 그런게 아니라 외계인들이 이야기하는 왕마귀의 사이즈가 오락가락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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