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러스트나 그림을 대신 그려주는 소프트웨어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어요. 일정 수준 이하의(라기에는 너무 높은) 커미션이나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사람이 그럭저럭 써볼만한 일러스트를 대체하는 데는 충분한 수준이죠. 이대로 간다면 '그림'을 그려서 제공하는 용역은 빠른 속도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예요.


 어쨌든 지금은 그림이지만 앞으로 더욱 많은 것들이 대체될 것 같아요. 이미 키오스크가 아르바이트생의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요. 이러다가는 감독이나 기획자만 남고, 감독이나 기획자의 손발이 되어주는 사람들은 모두 사라질지도요.



 2.그렇다면 감독이나 기획자, 또는 작가는 안전할까요? 아닐지도 모르죠. 기획자나 제작자보다 더 기획을 잘하고, 더 제작에 대한 전문성이 뛰어난 AI가 나올 수도 있거든요. '레트로도 질렸으니까 이번 여름에 만들 호러 무비는 더욱 과거로 가자! 배경은 아무도 안 다뤄본 서부 시대로 하고 서부 배경으로만 가능한 호러 무비 한편 써볼까.'라고 AI가 스스로 판단한 뒤 스스로 각본을 쓰고 스스로에게 컨펌받고 스스로 자아분열해서 회의를 한 뒤에 각본을 고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제작비를 결재해 줄지 말지 결정하는 AI가 이게 먹힐지 안 먹힐지 신중한 판단을 한 뒤에 제작을 결정해 줄 수도 있는거고요.


 기획, 제작, 시장조사를 모두 AI가 하게 되면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웃이겠죠. 그들은 AI가 자신보다 일을 더 잘하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는 것말곤 할 게 없을거예요. 거기서 AI가 튀겨준 맛있는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겠죠.



 3.작가는 어떨까요? 원래 스토리라는 건 거의 유형화가 가능해요. AI에게 이 스토리의 장르는 뭔지, 주인공은 완성형인지 성장형인지, 선과 악의 대결인지, 영웅 서사인지, 주인공과 대립하는 대립자의 비중조절은 어느 정도로 할지 세세하게 정해준 뒤에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 조건에 맞는 이야기 한편이 뚝딱 써져 있을 수도 있겠죠. 문제는 그 스토리의 수준이 인간이 만들어낸 수준과 엇비슷하기만 해도 당연히 AI가 이기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그래도 좀더 나중의 문제 같고...일단 2022년 시기의 내 기준에서 얘기해 보죠. 만화 제작을 주제로요.



 4.휴.



 5.일러스트 프로그램은 내겐 별로 쓸모가 없어요. 나는 만화 제작을 주로 하는 편이고, 만화는 아주 잘 그린 그림 한장이 아니라 엇비슷한 퀄리티에 매 컷마다 균일한 그림을 일정하게 보여줘야 하니까요. 어쩌면 그것이 아주 쩌는 그림 한장을 그려내는 것보다 AI입장에서 힘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미 오토드로잉 기술이 개발되고 있고, 곧 완성 단계에 이를 거라고 하니까 내게는 아주 좋은 소식이예요. 내가 추구하는 작화의 수준은 그냥 각 인물들과, 지금 펼쳐지는 상황이 잘 전달만 되면 되거든요. 매 컷마다 우와 소리가 나오게 만들거나 '그림 자체를 감상하기 위해'만화를 보려는 독자가 목표가 아니예요. 



 6.이건 예상이지만 오토드로잉 기술은 아마 액션 만화에 적용하기는 당장은 힘들거예요. 액션 만화는 다양한 구도나 박력, 앵글을 표현해줘야 하니까요. 한데 나의 만화들은 대체로 대화로 진행되거든요. 그야 가끔은 우주전쟁이 나오기도 하지만요. 


 그래도 결국 나의 만화에서 전투나 전쟁은 요식 행위예요. 그냥 스토리가 진행되도록 만드는 장치 같은 개념이지, 전투나 전쟁 장면은 중요하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오토드로잉 기술이 완전히 개발되면 내가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중이예요.



 7.그야 여기서 문제는 오토드로잉 기술만이 아닌, 누구의 그림을 주요 소스로 했느냐에 따라 추가 로열티가 발생할 수도 있겠죠. 일러스트가 아니라 만화라면 '모든 작가의 그림을 흡수한'AI보다는 '특정 작가 한명의 그림을 흡수한'AI가 더 좋을 테니까요.  


 그리고 슬램덩크나 블리치 같은 만화들은 수십 권씩 나와있으니 AI가 학습하고 완벽하게 따라하기에 딱 좋고요. 이런 경우에는 '이노우에 타케히코 AI'나 '쿠보 타이토 AI'같은 식으로 '같은 프로그램이지만 다른 만화가의 그림을 학습한'버전이 따로 나올 수도 있겠죠.


 물론 자신의 그림으로 연재를 하고 싶은데 그림 그리기가 귀찮은 작가라면 AI에게 자신의 그림을 학습시켜버리면 될 거고요. 또한 원한다면 기본 제공되는 몰개성한 드로잉을 이용할 수도 있을 테고.


 

 8.누군가는 이럴 수도 있겠죠. '그림을 안 그리면 그게 무슨 만화가냐'라고요. 하지만 결국 만화가란 건 '만화'라는 형식의 최종 결과물을 제작해내는 사람이예요. 


 그리고 만화라는 건 소설과는 달리 매우 지리한 서류 작업일 때가 있어요. 만화라는 건 작가의 창작욕과는 별개로, 괜히 많이 군중이 등장하는 신이나 별로 중요한 장면도 아닌데 수십 수백 개의 의자가 각맞춰서 그려져야 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소설이라면 '회의실에는 수백 개의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라고 한줄로 끝낼 수 있는 장면이 만화에서는 정말로 이틀 내내 빼곡히 의자를 퀄리티 높게 그려야만 할 때가 있으니까요. 



 9.베르세르크를 예로 들어보죠. 소설이었다면 '수십만의 군대가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웅장한 광경이었다.'라고 끝낼 수 있는 장면을 베르세르크 급 만화로 그리려면 큰 컷으로 저 멀리 점으로 보이는 작은 병사까지도 세세하게 묘사해야만 해요. 모든 병사의 말과 갑옷과 방패, 창을 일일이 그려줘야 하는 거죠. 그리고 베르세르크 급 만화에서는 그런 힘든 묘사 장면이라고 해도 대충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그런, 만화이기에 너무 표현하기 힘든 장면들. 의미도 없고 짜증나는 서류작업들을 AI에게 맡기면 만화가들은 쓸데없는 노동에서 해방되는 거거든요. AI라면 작가의 스타일을 캐치해서 수만 명이 모인 관중석의 관객 하나하나를 초고속으로 그려버릴 거고, 평원을 지나는 군대 수십만 명을 한명한명 아주 세세하게 묘사하는 작업도 힘들이지 않고 재빠르게 해낼 거니까요.



 10.그리고 작가는 결국 사람이예요. 사람인 이상 그림실력에는 전성기가 있는 법이고요. 수많은 만화가들이 연재를 하다 보면 '리즈 시절의 그림'을 그리워하는 독자의 항의에 시달리게 되죠. 하지만 그림이라는 게 어쩔 수 없어요. 전성기만큼 체력이 안 되어서 그림이 간략화 되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림을 그리다 보니 예전의 날카로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화를 대신 그려주는 AI가 나오면 거장의 '최전성기의 그림'만을 학습한 AI를 써먹을 수 있을 거거든요. 심지어는 그 이노우에 다케히코마저도 시기별로 독자의 호불호가 있을 정도니까요. 


 게다가 만화계에서는 거장의 '최전성기의 그림'이라는 게 사실은 '최전성기의 실력으로 1주일만에 만들어내는 원고'라는 소리거든요. 1주일이라는 리미트가 걸려 있는 거죠. 그런데 AI에게 그림을 학습하게 만들면? 최전성기의 거장에게 무제한의 시간을 주어야만 달성할 수 있는 퀄리티의 원고를 매주마다 뽑아낼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 시기가 온다면 '2003년 버전의 오바타 타케시' '2010년 버전의 오바타 타케시'같은 식으로 세분화된 AI가 존재하게 될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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