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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정지영 감독님 회고전을 하더군요. 오래전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원작 소설도 읽었고, 또 감독님 지브이도 들을 겸 아트나인에서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오래전 작품이라 그런지 연기의 톤이나 완성도가 요즘 영화에 비해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만 그 또한 고전 영화를 보는 재미로 느꼈습니다. 중학생 아역들은 연기가 좀 별로였는데 홍경인과 이정현이 나올 때부터 확실히 연기가 좋아지더군요. 독고영재씨나 최민수씨의 20세기 연기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톤이 있긴 하지만 몰입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제가 기억하는 소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해외 영화 직배 상영을 반대하는 한국 영화인들의 시위 현장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이 지점부터 "헐리우드"의 의미는 훨씬 더 정치적으로 다가오죠. 원작 소설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하나의 공간이자 문화적 성취였다면, 이 영화에서는 문화적 침략의 본거지라는 또 하나의 의미가 생깁니다. 한국영화 시장에 훨씬 더 압도적인 자본과 퀄리티로 쳐들어오는 미국영화, 그리고 그런 미국 영화를 끝없이 생산해내는 헐리우드를 동경하는 임병석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 "헐리우드 키드"는 미국의 문화적 지배에 완전히 복종하게 된 타국의 개인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되죠. 작금의 PC논란과 연결지어보면 "미국"이라는 국가의 대표적 이미지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지배적이며 또 강고한 것인지 21세기에 새로운 정치적 방향으로 또 곱씹게 됩니다. 


지브이에서도 정지영 감독님이 말씀하시더군요. 혹자는 이 작품을 정지영의 한국 근대사 삼부작이라고도 평가하며 앞선 두 작품, [남부군]과 [하얀 전쟁]이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그렸다면 이 작품은 한국의 문화를 그리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을 인용했습니다. 티비도 안나오는 시대에, 미국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왜 임병석 같은 영화광들을 만들어냈는지 그 시대적 흔적에 대해 영화는 질문합니다. 영화 초반에 윤명길이 따라간 임병석의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허름한 달동네입니다. 부모님도 없고 누나와 단 둘이 사는 임병섭이 그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헐리우드 영화의 포스터나 잡지같은 것들을 모았을지 생각하면, 그의 이 영화광적 기질을 현실과 떼어놓기 힘들죠. 누군가에게 헐리우드 영화는 초라한 현실을 잊을만큼 눈과 귀로 전달되는 가장 아름다운 유토피아일 것이고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가장 위대하고 감명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영화는 계속해서 임병석의 뒷골목 인생을 보여줍니다. 윤명길은 군대에서 전역하고 임병석의 집을 다시 찾아가지만 그곳은 완전히 허물어진채입니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임병석은 초라한 행색으로 술집 작부와 함께 살고 있죠. 영화 속에서 그가 하는 일을 정확히 보여주진 않지만 그는 여자한테 얹혀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술에 취한 임병석은 예전처럼 헐리우드 배우와 감독들 이름을 열거하며 마구 떠듭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윤명길에게 다소 차갑게 말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자존심 상하니 더 이상 자신을 찾지 말라고요. 한 때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뭉쳤던 이들에게 현실은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커다란 벽이 됩니다.


임병석은 윤명길의 도움을 받고 영화 현장 스텝으로도 일을 하지만 조악한 충무로계의 현실에 혼자 학을 떼면서 일을 그만둬버립니다. 이 부분에서도 영화와 현실의 간극은 다시 한번 강조되는 듯 보입니다. 헐리우드의 완성된 영화들은 아름답지만, 이곳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현장은 이론적으로나 다른 조건에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죠. 영화를 향한 임병석의 열정이 관객과 극장의 관계를 뛰어넘어 창조자와 작품의 관계로 넘어가려 할 때, 임병석은 늘 좌절합니다. 어쩌면 임병석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자신을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과 영화를 만들고 싶은 열정은 다른 것이니까요. 


이후 임병석은 자기 집에 화재가 나서 방화범 용의자로 수사를 받습니다. 집에 불이 났는데 아이는 놔둔 채로 영화포스터만 챙겨서 나왔다는 그에게 경찰들은 의혹의 시선을 보내지만 그는 혐의없음으로 결국 용의자신분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아이를 죽게 내버려뒀다는 죄책감과 충격 때문인지 그는 실어증에 걸린것처럼 말을 못합니다. 정신병원에서 그는 계속해서 말을 안하고 윤명길이 찾아갔을 때도 그저 멍하니 허공만 봅니다. 그는 계속해서 현실에서 도피를 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후에 그가 습관처럼 흥얼거리는 영화음악을 듣고 윤명길은 그에게 말 좀 하라면서 다그치지만 임병석은 끝끝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후 임병석이 쓴 시나리오가 윤명길에게 도착하고, 윤명길은 이 시나리오에 매혹되어서 감독직을 맡게 됩니다. 영화를 다 만들고 그는 충격적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모든 대사와 장면들이 고전 영화들에서 그저 따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임병석은 갑자기 시상식장에 나타나 시나리오 상을 수상하고 돌아가려다가 윤명길과 마주칩니다. 그를 쫓아온 윤명길은 영화 편집실에서 그를 질타하죠. 왜 이렇게 짜깁기로 만든 영화시나리오를 자신에게 줬냐고요. 임병석은 윤명길을 붙잡고 말합니다. 자기도 자기가 생각해서 쓴 줄 알았는데, "헐리우드 키드"한테 자기도 속았다고요. 


이 부분에서 여러가지 상념에 젖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뭔가를 만들어내고자 했는데 그것이 단순히 '우라까이'밖에 안나온다면 그건 대체 어떤 심정일지, 평생을 움켜쥐고 살았던 그 애정과 열정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창조를 방해한다면 어떨지. 아마 임병석은 헐리우드 영화라는 환상에 지독하게 사로잡혔던 사람일 것입니다. 아름다움에 도취된 사람은 그 아름다움 외의 다른 아름다움과 변화시킨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요. 한편으로는 이 영화의 정치적인 의미도 곱씹게 됩니다. 미국 문화에 이렇게나 사로잡힌 한국인들은 과연 우리의 영화, 우리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냐는 질문이 떠오르죠. 임병석이라는 "헐리우드 키드"는 미국 문화 식민지에 완전히 적응한 식민지 주민처럼도 보입니다. 아마 그 때 당시라면 '한국영화는 구려서 안본다'는 관객들의 정서가 지배적이었을테니 한국 영화인으로서 헐리우드에 대한 애정을 더더욱 경계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저는 이 영화가 [시네마 천국]의 완전한 안티테제처럼 보입니다. 영화를 너무 사랑하는 아이들, 어떻게든 영화를 보려고 극장에 찾아가는 아이... 그러나 그 뒤의 방향은 완전히 반대죠. [시네마 천국]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현실을 포기하고 영화를 향한 꿈을 좇습니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는 영화를 향한 꿈을 좇지 못한 채 주변에 적당한 짝을 찾아서 근근히 현실을 버텨내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은 결국 거장이 되었지만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의 주인공은 짜깁기 각본만 쓸 줄 아는 삼류 작가로 남습니다. [시네마 천국]에서 잘려나간 고전영화의 편집 필름들이 주인공의 영화에 대한 사랑과 추억을 모두 상기시킨다면,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는 편집된 고전영화의 장면들이 표절작의 조각들로 활용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영화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을지 그 질문에 대해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조금 더 암울한 대답을 던져놓고 있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악몽처럼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감독님께서 지브이에서 말씀해주시길, 자기도 헐리우드 키드에게 속았다는 그 대사는 원작에 없었는데 후에 원작 소설의 번역판을 내놓을 때 그 대사를 작가님이 감독님에게 허락을 구하고 덧붙였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 대사가 굉장히 의미심장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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