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게에 글을 쓴다는 것

2019.05.31 16:25

어디로갈까 조회 수:1001

1. 몇년 전에 본 다큐멘터리 필름입니다. 러시아의 한 형무소. 죄수들이 갇힌 곳은 형무소 담장과 백 미터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거대한 고층감옥이에요. 죄수들에게 정상적인 면회는 일체 허용되지 않는 곳이고, 면회하러 온 가족과 지인들은 먼 발치에서 창살 사이로 수인의 얼굴을 보기만 하다가 발길을 돌려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들도 서로 고함을 질러대며 대화를 시도한 적이 분명 있었겠죠. 하지만 그게 무모한 짓이란 걸 깨닫고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입을 열어 한 마디의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모여든 면회자들이 이쪽 대열에서 각자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하면, 감옥 안의 수인들에겐 그 소리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아우성으로 뭉쳐져 들릴 뿐이란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수화를 사용해 대화를 나눕니다. 장애인이 아닌 그들이 언제 수화를 익혔겠어요? 그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생성된 그들만의 손짓 언어로 소통하고 있었던 겁니다.  A의 수화와 그 옆의 B의 수화의 규칙이 다르지만, 그렇게 서로 다른 몸짓도 먼 저편에서 바라보는 사람, 애타게 서로 마주 바라보는 상대에게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은 언어일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그런 것이죠, 언어란. 

개개인의 언어는 팔꿈치가 닿도록 가까운 옆 사람의 언어와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나'를 알아듣는 누군가는 분명히 있으니, 그건 어떤 필요/정서/인연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은유적인 방식을 취하는 것이 진부한 구식의 선택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지만, 제게는 저 한 편의 필름이 기억으로부터 불현듯 떠오르곤 해요. 러시아 형무소의 그들이 보여준 지극히 사적이고 육체적인 방식의 언어. 그토록 어렵고 개체적인 소통의 상황 자체가 보편으로 바라보이는 건, 분명 센티멘탈리즘이기도 할 거예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아직도 제 마음을 흔들고 울리고 있으니.

2. 글쓰기는 미로 헤매기와 비슷한 데가 있어요. 미로가 끝나면 미로의 밖이 나오는데, 그 밖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여전히 종이 위의 미로 밖이 있고, 종이의 밖이 있달까요.
글을 쓰다 보면 문득 언어의 밖에 닿게 돼요. 언어의 바깥에는 두 종류의 바깥이 있어요. 동질의 언어를 반복하기 위한 변증법적 요소 - 필요, 필수로서의 바깥이 있고, 아무런 미로도 그려지지 않은 진정한 미로로서의 바깥이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어떤 자세로 기록할 때 직감적으로 알게 되는 것인데, 항상 제가 마주 바라보고 있는 건 미로가 그려지지 않은, 미로의 바깥 저 너머입니다. 그곳의 불빛은 창백하고 차가워요. 그래서 실은 발을 내딛는 걸 매번 주저주저합니다.

3. 언어란 이미 그 자체가 타인의 시선이죠.  따라서 글쓰기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거짓말 한계와의 '싸움' 을 보여주기라고나 할까요.

4. '현재'는 언어로 씌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근본적 불가능성 때문에 글쓰기의 가치가 파괴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이성이나 언어로써 현재를 다스릴 수 없다는 한계가 삶과 글쓰기를 덜 위태롭게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5. 아직 제가 모르는 언어가 많겠죠. 그 가운데는 지옥 같은 암흑의 언어도 있을 거고, 깊고 아름다운 언어도 있을 겁니다.
제가 살지 못한 언어, 제가 구경한 적이 없는 언어, 제가 이해하지 못한 언어들이 저편에 있다고 생각하며 책을 읽고 여러 예술을 감상하고 인터넷 서핑을 해요. 그런 미지에 의해서 언어에 대한 저의 자세가 조형되겠죠. 쓰고 보니 이건 대치의 국면일 수도 있겠네요., 도달하지 못했음, 모호함, 막막함 - 그러나 저를 꿈꾸게 하는 부분입니다. 

6. 제 언어의 흔적이 없다는 것 - 이 세계의 시간과 공간에 나를 새겨 넣을 수 없다는 것. 한때는 그게 쓸쓸한 거라 여겼는데 이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만일 개개인의 흔적들이 다 새겨질 수 있었다면, 우리는 타인들의 무수한 언어의 흔적들에 눌리고 압도되어 살아가기 힘들지 않을까요?  뭐 종이는 쉼없이 먼지로 변해 흩어지고, 책을 읽는 사람은 서서히 늙고 죽기마련이긴 합니다만. 

7. 지금 진실이 누구에게 문을 열어주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온 세상이 문들이 여닫히는 소리로 가득하지만, 제게 열리는 문은 저의 문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자세로 완강하게 응시했을 때에야 햇볕과 파란 하늘, 서늘한 공기는, 가까스로 제게 하나의 어휘를 위한 자리를 내어줄 듯 잠시 멈칫거리는 거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됐어요. - - 

덧: 사흘 전, 모 유저의 글에 붙인 댓글에 달린 대댓글을 좀전에야 봤는데, 마음/생각을 건드리는 말씀이라 이 글을 함 써봤습니다. -_- 
덧2: 점심시간에 인턴 학생이 실수로 제 발등에 커피팟의 뜨거운 물을 쏟았어요. 금세 아기주먹 만한 물집이 솟아오르더군요. 하여 병원에 가느라 이른 퇴근이 허용되었... ㅎ 피부과 쌤이(여성) '발이 참 예뻐요'라고 우쭈쭈해주셔서  통증 따위는 숨도 못 쉬었다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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