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저수트 입은 래리

2023.08.23 17:11

돌도끼 조회 수:316

1980년대 초, 애플II 컴퓨터를 산 척 벤튼은 프로그래밍 연습삼아(!) 어드벤처 게임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줬더니 대호평인 겁니다. 지인들은 이정도면 돈 받고 팔아도 되겠다고 바람을 넣습니다. 꼬임에 넘어간 벤튼은 자비를 들여 패키지를 만들었습니다. 근데... 게임이 괜찮다고 저절로 팔리는 건 아니죠. 집안에 산처럼 쌓인 재고를 떠안고 고민하고있을  때, 컴퓨터 전시회에서 만난 온라인 시스템즈의 켄 윌리엄스 사장님이 벤튼을 영입하고 게임을 온라인 시스템즈 명의로 판매하기로 합니다.

이렇게 해서 1981년, 미국 최초의 성인용 컴퓨터 게임으로 알려진 '소프트포르노 어드벤처'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제목부터 참 거창하죠.
한 남자가 여러 여자들을 꼬셔서 목적...을 달성한다는 내용이고, 순수 텍스트 어드벤처였습니다. 온라인 시스템즈는 그래픽 어드벤처로 유명한 회사였으니 거기다 그림 좀 추가해서 그래픽 어드벤처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실제로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을 픽업해 그래픽 어드벤처로 바꾼 후에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벤튼의 원본을 거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출시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성인용이라는 리스크가 있어서 추가적인 투자를 꺼렸는지도... 그래서 이 '소프트폰'은 온라인 시스템즈, 즉 시에라(이하 걍 시에라라고 하겠습니다) 게임들 중에 유일한 순수 텍스트 어드벤처입니다.

성인용 게임이란 건 시에라도 처음 팔아보는 거니 딱히 마케팅 노하우같은 건 있을리 없고, 공격적으로 나갑니다. 상당히 도발적인 광고를 냈고, 역시나 아주 큰 반향이 왔습니다.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고... 하지만, 게임은 잘팔렸습니다. 제목부터 남사스런 게임이다 보니 사람들이 게임을 살 때 위아래로 다른 프로그램을 하나씩 포개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카운터에 들고왔기 때문에 엉뚱한 다른 프로그램들도 덩달아 팔렸다고 합니다.
그치만 성인용 게임을 내는 회사로 인식되는 게 크게 도움은 안되는 일이니까... 이만큼이면 벌만큼 벌었다싶은 시점에서 단종시키고, 디즈니와 계약해 미키와 도날드가 나오는 어드벤처 게임을 만들어 이미지 세탁에 들어갑니다ㅎㅎ(시에라의 첫번째 디즈니 게임을 만든 사람이 바로 척 벤튼이라는 듯...)

1986년에 문제의 게임 '소프트폰'은 해외게임을 일본에 컨버전하는 전문 업체인 스타크래프트를 통해 일본에 진출합니다. 아무리 일본이라고 해도 원제 그대로는 거시기했던지 제목은 '라스베가스'로 바뀌었고, 86년이라는 시점에 일본에서 순수 텍스트 어드벤처를 낸다는 건 무리가 있어 스타크래프트는 '라스베가스'를 그래픽 어드벤처로 개조합니다. 뭐 거창하게 바꾼 건 아니고, 원래 그 시기의 그래픽 어드벤처는 텍스트 어드벤처에 삽화가 들어간 정도였으니까 걍 그림을 잔뜩 집어넣은 거죠. 81년에 시에라가 안했던 일을 한 겁니다. 이렇게 일본에서 그래픽 어드벤처 리메이크가 나온게 영향을 끼쳤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87년에는 본가 시에라에서도 '소프트폰'의 그래픽 어드벤처 리메이크판이 나옵니다.

이 리메이크를 주도한 건 시에라의 재간꾼인 알 로우였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알 로우 역시 자작 게임을 팔고 있다 컴퓨터 전시회에서 켄 윌리엄스에게 픽업되어 시에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는 거였습니다. 글구 시에라의 디즈니 게임들을 여럿 제작한 사람이기도... 물론 이때는 디즈니와의 계약은 끝난 뒤였습니다.ㅎㅎ

'소프트폰'은 너무 오래된 게임이었기 때문에 업데이트-개조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림만 추가한 일본판과는 달리 '킹스 퀘스트' 이후의 시에라 어드벤처 스타일에 맞추는 것이므로, 화면에 나올 주인공이 필요했습니다. 로우는 이런 구닥다리 게임에 나올 주인공이면 레저 수트를 입는게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나봐요.
레저수트는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존 트라볼타가 입고 나왔던 옷입니다. 영화가 나왔던 70년대에는 멋쟁이의 상징이었겠지만, 10년 지나고 보니 촌스러움의 상징이 되어있었다는... 로우는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정확히는 38살이었다는데... 나중에 40세로 설정변경...) 래리 래퍼라는 주인공을 만들었습니다. 래리는 인생의 모험을 찾아 레저 수트를 걸치고 집을 나섭니다. 뭔가 80년대 초에 헐리우드에서 맹렬히 유행했던 하이틴 섹스 코메디같기도...ㅎㅎ(주인공 연령대가 확 차이나지만...)

로우는 주인공 뿐 아니라 상대가 되는 여성들에게도 각각 캐릭터를 부여했고 이야기를 확장합니다. 그리고 농담을 잔뜩 집어넣어 장르를 코미디로 만듭니다. 다재다능한 사람이라서 시나리오 짜고 프로그래밍에도 참여했을뿐 아니라 메인테마까지 직접 작곡했습니다. 벤튼은 이때 시에라를 퇴사한 뒤(시에라 입사 후로는 건전한 게임들만 만들었더랬습니다)라서 이 리메이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게임의 기본 틀은 '소프트폰'에서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로우와 함께 공동 디자이너로 크레딧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게임 '레저 수트 래리'가 시장에 처음 나왔을 때의 형편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전히 성인용이란 거에 사람들이 도끼눈 뜨는 인식이 있어 우린 그런 거 안받겠다고 손사래치는 매장이 많았고, 시에라는 '소프트폰' 때와는 달리 광고에도 힘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랬으니 잘 팔릴 수가 없죠. 출시 직후에는 아주 실망스런 판매량을 보여 회사도 로우도 망했다고 낙담하고 있었는데 몇달 지나는 사이에 알게 모르게 많이 나갑니다. 공식적인 판매 차트에서 상위에 오르고 그러진 않았는데 어쨌거나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ㅎㅎ
그렇게 차츰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래리'는 시에라가 예상못한 대히트였고 그 뒤로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시에라를 대표하는 작품들 중에 하나가 됩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연령체크 목적으로 당시 미국의 시사/연예 상식과 관련된 퀴즈를 풀게되는데 이것도 나름 재미있었어요. 근데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지금은 어른들도 모르는 것들이 잔뜩이라 인터넷에서 답이 공유되고 있습니다.

'소프트폰 어드벤처'의 표지에는 당시 시에라 여직원들이 반라로 등장하는데 그중 한명이 무려 로버타 윌리엄스 본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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