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 이 영화 안에 있고 싶다.'라는 생각을 처음 한 건 <플로리다 프로젝트>였어요. 더 정확히는 '이 감독의 대상이 되고 싶다'인데, 

전작인 <탠저린>을 보며 가치관에 혼란이 왔고, 감독 션 베이커에 대해 알게 된 후로는 뭐랄까.. 믿음이 생겼어요.

보잘 것 없는 내 삶도, 이 감독은 가치있게 다뤄줄 거 같다는 생각, 바람. 



<미드 와이프>와 <소공녀>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건 <플로리다~>와는 조금 다른데, 

저 인물의 자세를 계속 보고 싶어서, 

저런 인물을 그리는 감독의 세계 안에 있고 싶었어요.


너무 좋지만 자주 못 보는 건, 안 보다 보면 까먹으니까, 

자꾸 보고 있고 싶고


그런 인물을 등장시키는 영화를 보다보면

'어, 이 감독은 인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구나'라는 안심이 생겨서

그 평온함 안에 있고 싶거든요.


영화는 정말 가공된 세계이고, 120분가량의, 통로가 확실하게 정해진 허구구나, 라는 생각이 분명히 들고

정해진 면적의 세계가 끝나가는 게 안타깝지만 잠시 여기 초대될 수 있다는데 감사하고, 하지만 슬프고, 떠나갈 게 미리 싫어지는 그런 때가 있지요.



2.

<소공녀>는 거르려던 영화였어요. 

'소공녀'라는 제목 + 보헤미안적인 태도 + 헬조선과 불화하는 히피 느낌 + 인스타그램 필터 같은 비현실적인 이솜 배우의 조합에, 꽤 거부감이 들었거든요. 선입견 왕왕이죠. 한때 유행했던 '가난하지만 음악이 있으니 행복해!'같은 청춘 밴드 영화와 비슷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었어요. 


영화가 진행되면서 선입견들이 하나하나 허물을 벗어내는 듯했어요.

그리고 꽤 많이 울었다는;


물론 초반의 어색한 대사 톤들이 다시금 불안에 불을 지폈지만, 익숙해지니 괜찮아지기도 했고.



3.

가난한데 '위스키'를 마신다는 게 어떤 상징이라면

굉장히 상황 '설정'같은 대사들도 뭐... 극에 나쁠 것 없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되게 리얼한 소재를 얘기하지만 되게 상황극 같은 느낌. (영화가 좋았어서 이것도 좋게 퉁치는 걸지도 몰라요)


'가난한데 위스키를 마셔?'라는 질문이 초반부터 훅 떠오르는데, 

위스키가 아닐 뿐이지, 나에게도 '위스키'가 있는걸... 싶어 

나도 얼마나 편견 덩어리인가 싶어 잠자코 (닥치고) 영화를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4.

그다음부턴 영화가 쭉쭉 나아갔던 것 같아요.


어쩌면 홈리스 주인공 미소에 대한 게 아니라

미소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보여주는 영화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완벽히 어떤 상황, 타입을 대표하고 있는 주변 인물들 한 명 한 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워지지 않는 주인공인 미소가 다른 점이 뭘까, 제가 떠올린 단어는 '긍지'였어요.

자존감이 높다,라는 것보다 조금 더 동적인 느낌이 있달까요. 긍지가 있으면 사람이 저렇게 여물 수 있구나, 상황은 나와 다를 거 없는데 저렇게 다를 수 있구나, 비록 가공된 인물이지만 닮고 싶더라구요. 그런 태도.


(긍지와 맞바꾸어야 집을 얻는 걸까요.

집을 얻으려면 긍지를 포기한 척 숨겨야 하는 걸까요.


장미를 원하면서 빵을 원하는 건 불가능할까요.ㅎ


뭐 어딘가엔 그런 곳도 있겠죠. 

다만 이 영화에선 치환 대상처럼 제법 일대일로 다뤄지는데

슬프게도 그게 설득력 있네요.)


 

5. 

후반에 길게 펼쳐지는 이미지들도, 분명히 의도적이고 주제적인데 또 그게 거슬리지 않더라구요... 이유가 뭐였을까요.


이렇게 잘 달려온 이야기의, 게다가 현실에 답이 없는 이 소재의 결말을 염려하는 마음이, 인물에 대한 염려와 섞여 

그 긴 시퀀스 동안 애타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얼굴을 자연스럽게 많이 보여주는 초중반에 비해, 말미엔 굳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는 방식이 참 좋았습니다.

무책임한 게 아니라 예의 있달까요. 우리가 함부로 그녀의 삶이 어땠다고 이야기하진 말자,라는 엄중한 말이 어깨를 누르는 것 같네요.




6. (약스포)



1) '폭력적이다'라고 느껴지는 상황에서 '폭력적이야'라고 말해주니까 그냥 간단해지고 시원해져서 좋았어요.

2) 쿠키에 깜짝 놀랐어요. 제가 무서운 거 1도 못 보는 쫄쫄쫄쫄대쫄보라서. 

근데 재밌게 풀어질 거 같아서 궁금하네요. 비현실적인 소재를 굳이 쓰는 건 되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한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했는데, 왠지 그런 기대를 해봅니다.




7. 최근에, <히든 피겨스> 영화 개봉 당시의 후기들을 우연히 접했는데, 그때랑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구요.

최근 페미니즘 논의가 급성장하였잖아요.

당시엔 새로운 시도라고 여겨졌던 게, 지금은 한계가 지적되기도 하고.

<고스트 버스터즈>도 그렇고요. 좀 더 전에는 <헬프> 등등..


가장 최신 유행인 것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장 촌스럽게 느껴진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소공녀 영화는 참 좋았고

참 가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는데

ㅎㅎ.. 세상이, 이 이야기도 벌써 지난 담론이 되어버리게 빨리 좋아질까요 과연.ㅎ


하지만 그렇든 아니든 어떻든

나중에 제법 한계로 지적될지언정

지금에 사는 나는 

지금의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마저도 긍지가 부족하고 희망이 빈약하여 

채 다 뻗지 못하고 쥐었다 폈다 꼼지락하고 있지만요.




덧. <소공녀>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 이고

주인공 '미소'는 smile이 아니고 (캔디형 여주가 아니었어요 - 이것도 영화보기 전의 제 선입견에 한몫) 

'미생물이 서식지를 찾아다니는 미소서식지(Microhabitat)의 그 미소에서 이 독특한 여성의 이름을 불러왔다.'라고 하네요.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9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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