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랜드에 갔던 어느날...

2015.04.15 19:26

여은성 조회 수:1766


  몇년전 어느날이었어요. 당시엔 늘 기분이 좋지 않았죠. 어느날 그 때만 해도 친구였던 사람이 아침에 전화와서 지방에나 한번 놀러갔다 오자고 하더군요. 그러자고 하고 나갔어요. 역앞 파파이스에서 간식을 사서 먹고 어딜 가냐고 묻자 한번 이제 우리도 어른이 됐으니 강원랜드에 가보자고 하더군요.


 그건 좋은 생각 같았어요. 그래서 출발했죠. 친구가 차를 100km넘는 속도로 운전하는 걸 보자 갑자기 멀게 느껴졌지만 쌩쌩 달리니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데...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강원랜드가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강원랜드가 이렇게 먼 곳이구나...서울에서 강원랜드까지 가는 사람들은 대체 도박이 얼마나 좋길래 이걸 참고 가는걸까 싶었어요. 휴게소를 한번인가 두번인가 들려서 계속 가는데 어느 순간, 서울에서는 어쩌다 한번 보기도 힘든 전당포들이 마구 보이는 거예요. 이곳이 그곳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죠.


 모처럼 강원랜드에 온 건데 서울에서는 해 볼 수 없는 약간의 연극적인 행동들을 하고 싶어졌어요. 이 곳의 사람들은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이니까요. 사실, 다시 보게 되어도 큰일이긴 하지만요.


 흠.


 그래서 강원랜드 도박장에 들어갈 때 어떤 대사를 할까 고민하다가...정했어요. 당시에 샹크스가 막 했던 대사인 "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라고 외치기로 했어요. 그리고 다음 문제는 돈을 따고 나가면서 어떤 걸 외칠지였죠. 고민하다가 정했어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고 외치면서 강원랜드를 떠나기로요. 로마 어로 외칠까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한국어로 외칠까 하다가 한국어로 외치기로 했죠. 돈을 따지 못하고 강원랜드를 떠날 때의 대사는, 정해 둘 필요 없을 거 같아서 무시했어요.


 그날은 평일이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강원랜드 주차장에 주차하기 위해 한참 헤매야 했어요. 대체 주말이나 휴가철은 얼마나 사람이 많은 걸까 싶었어요. 어쨌든 빙빙 돌다가 간신히 주차를 마친 후 조금 걸어 도박장으로 가는데...두명의 보안요원이 보이더군요. 그 두명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어요. 신세계백화점 같은 곳에서 일하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보안요원과는 다르다는 걸요. 강원랜드 보안요원들의 눈빛은 아직 비둘기들의 평균 체중이 낮았던 90년대의 놀이터에서 봤던, 끊임없이 좌우를 살피던 놈들의 눈빛과 같았어요. 그 군기잡힌 보안요원들만 봐도 우리가 유원지에 온 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죠.


 그리고 도박장입구에 갔는데...입장료가 5천원인가 하더군요. 일단 들어가자마자 5천원은 따고 시작해야 하는 건가 주억거리다가 누군가의 웬 손도장이 입구에 있더군요. 어느날 여기서 몇억 원쯤 땄는데 그걸 가져가는 대신 돈은 놔두고 손도장을 남기고 가는 걸 택한 사람의 손도장이었어요. 이런 곳에 손도장을 남겨도 위대한 사람이 되는 기분은 별로 안 들거 같아서, 몇억 원을 따면 그냥 가지고 돌아가야지 하며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러나... 


 그순간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됐어요. 강원랜드에 들어가려면 신분증이 필요하다는 걸요. 당시에는 휴대폰은 커녕 지갑도 안 가지고 다닐 때가 많았어요. 그냥 체크 카드 하나만 들고 다녔죠. 그래서 '어쩌지?'라고 말하려다가...그런 말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냥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는 거요. 친구는 가만히 절 바라보다가 '앞으로 신분증 정도는 좀 가지고 다니자'하고 휙 돌아서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친구를 따라 밖으로 나갔어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뭐라도 말해야 했어요.


 "우린 이 공기를 마시기 위해 온 것 같아. 이 맑은 공기. 강원도의 공기..."


 여기까지 말하다가 친구의 표정을 보고 더이상 말하는 걸 그만두었어요. 그냥 친구를 따라 차를 타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어요. 그런데 갑자기 웬 청승맞은 멜로디가 들리는 거예요. 친구가 이건 강원랜드를 나가는 도로를 건드리면 울리는 멜로디라고 설명해 줬어요. 강원랜드에게 돈 잃은 사람들이 이때까지는 눈물을 안 흘리다가 저 멜로디를 들으면 눈물을 흘린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멜로디는 꼭 돈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도 슬플 만한, 그런 구슬픈 멜로디였어요.


 하여간 차 얻어 타고 드라이브도 빚지고 강원랜드도 못 갔으니 가는 길에 좀 돌아서 횡성한우라도 먹고 가자고 하고 고기를 먹고 서울로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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