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9 12:24
지난 해 프로즌과 레고 무비를 본 이후로 거의 1년 반 만에 딸 아이와 극장엘 갔습니다. 아빠간호사님이 인사이드 아웃 글을 올려주신 것을 보고 시간이 나면 아이와 극장엘 가서 꼭 봐야지 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시간이 났거든요. 이 동네는 매주 화요일이 극장 반값이라 둘이서 12불 이라는 경이로운 가격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전 사실 자막없는 통 영어 영화는 자신이 없었는데, 만 여섯 살이 된 아이는 유튜브 클립 몇 개로 예습을 하고 가서인지 한 시간 반 동안 영어로 계속 되는 영화를 단 한 번도 지루해 하지 않고 집중해서 잘 보아 주었습니다. 프로즌은 사실 뒷부분은 지루해 했거든요..
영화는 기본 아이디어를 비롯해서 소녀가 새로운 세상과 환경의 변화 속에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정말 멋지게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라일리가 하키 플레이어라는 설정도 좋았고, 명랑한 캐릭터도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몇몇 설정과 장면들은 좀 의문스럽긴 했지만 - 그토록 견고해 보이는 코어 메모리나 아일랜드들이 말 한 마디에 무너지는 장면들이라든지, 사실은 공감에 가까운 새드니스 캐릭터라든지, 다른 세 캐릭터의 반복되는 무능함이랄지. 행복이란게 거창한게 아니라 어떤 소통의 순간들의 모음이라는 기본 철학도 좋았고요. 아이들이 상처입고 비뚤어지고 반항하게 되는 심리를 좋은 기억의 상실과 통제 불능의 헤드쿼터로 보여준 장면도 탁월했다고 생각했어요. 상상의 공간, 장기기억의 통로를 배회하는 옛 추억의 인형.. 껌 CM 송 설정도 귀여웠고요. 부잉의 장면에서는 아이와 어른을 포함해서 꽤 여러 명이 훌쩍였네요.
영화를 보고 온 후 아이는 조이와 새드니스, 디스거스팅이 뭐라고 말했는지, 끊임없이 재잘대며 장면들을 되새기며 수다를 떨고, 부잉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멋진 영화를 보는 내내 제가 가장 신경쓰였던 것은 이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엄마, 아빠랑 셋이 꼭 끌어안고 있는 라일리의 패밀리 아일랜드가 딸아이에게 불러 일으킬 파장이었습니다. 아이는 보통 때는 엄마와 둘이 지낸다는 사실을 딱히 인식하지 않고 명랑하고 행복하게 지냅니다. 그렇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지내는 아이들과 가족끼리 만나거나 하면 아이가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곳 아이들은 그런 질문을 거의 하지 않지만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된 아이들은 "넌 아빠 없어?" 같은 질문을 툭 던지거나 합니다. "아니야, 아빠는 한국에 있어"라고는 대답하지만 아이의 마음 속에 무언가가 남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 또한 아빠없이 엄마 혼자서도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다고 이런저런 애를 써보지만, 뭐랄까 이런 엄마 아빠 아이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말로 어떤 "완벽한 가족" 이라는 그림 앞에 서면 그 모든 노력이 엄청 거대한 벽 앞에 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이가 영화를 보고 온 저녁에 평소에 안 하던 "아빠랑 카톡할래" 하면서 카톡을 보내보고선 바로 답이 오지 않자 조금 낙심한 것을, 그러나 그 낙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근데 아빠 잘못보냈어요" 라고 마무리한 것을 보았을 때 아이가 생각보다 빨리 자라겠구나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수없이 부딪치게될 완벽한 가족이란 그림 앞에서 아이가 괜스레 상기하게될 상실감에 대처하기 위해 뭔가 대비책, 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냥 "둘이서도 괜찮아" 로는 아마 부족할 것 같아요.
2015.08.19 13:30
2015.08.22 17:25
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해석이네요. 슬픔이가 공감 역할을 잘 했고, 까칠이 소심이 분노?도 자기 역할을 했다는 데에 동의해요. 그런데 제 생각 하나 덧붙이자면 기쁨이가 기쁨이라는 감정을 대변하는 역할이면서 또 스스로 항상 즐거워야 하고, 슬픔이는 또 본인 스스로 항상 슬프고 무기력하다는 설정 자체가 까칠이, 소심이가 어떤 역할을 하기 어렵게 스토리가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결과를 낳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또 실제로 제 마음은 기쁨이나 슬픔 보다는.. 덤덤함? 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ㅎㅎ 물론 이런 식으론 어떤 얘깃거리를 만들어 내긴 어렵겠죠. 생각꺼리를 던져주신 좋은 댓글 감사해요~
2015.08.19 14:01
2015.08.22 17:29
아하하. 저도 부모들의 감정이 정말 일차원적이라는 생각했어요. 엄마들이 실제로 저렇게 스트레스 앞에서 멋진 남자 사진만 떠올려도 붕~ 할까. 나도 그런가 생각했거든요. 뭐 그런 면도 있고 과장된 면도 있고, 라일리의 감정에 집중하다보니 집중적으로 다뤄지기 어려웠겠고 그랬겠지만 살짝 아쉬운 것은 사실이예요. 마음놓고 우는 사회!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불러온 반작용일까요. 눈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네요..
2015.08.19 16:24
2015.08.22 17:31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 자신도 '정상 가족'이라는 신화를 일찌감치 깨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제 안에도 견고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네요..스스로 노력할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게 아이에게 중요하겠죠..
2015.08.19 18:52
엄마, 아빠, 아이 구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들이 나오는 영화를 아이와 함께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니모를 찾아서' 같은 영화는 어떨까요? (아빠가 더 생각나려나요... ㅜ_ㅜ)
2015.08.22 17:32
아하하. 요 소심쟁이 꼬맹이는 니모를 찾아서를 보고서도 무섭다며 니모가 그물에 낚이는 장면에서 울고 불고 난리를 치더라고요. ㅎㅎ
그래두 다양한 가족이 나오는 영화들을 일부러 찾아서 보여줘야겠어요. 추천 감사해요~
2015.08.19 19:37
2015.08.22 17:33
그런 면이 약간 있죠? ㅎㅎ
2015.08.20 05:13
2015.08.22 17:35
오! 다음 영화 토이스토리 들어갑니다~ 전 앤디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갔었네요..
다만 엄마가 장난감을 기부한다고 하셔서 생각있는(?) 좋은 엄마네.. 했던 것만 기억나요..
알고 보니 싱글맘 엄마가 다른 싱글맘 엄마에게 장난감을 물려준 거였군요! 이런 디테일한 배경 좋네요~
2015.08.20 05:16
2015.08.20 10:13
이거 멋진 말이네요. 기억해 둬야겠어요.
2015.08.22 17:39
경험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직 부족한게 많아서 여전히 아이와 같이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또 육아는 정말 판타스틱한 면이 있는 것 같네요.
무엇보다 제가 지금이 더 행복하니까 아이에게도 더 잘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만 생각하려고요!
언제 한번 진득하게 아빠간호사님께 조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네요 ㅎㅎ 좋은 주말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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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캐릭터가 사실상 ‘공감’에 가까웠다기보다는 슬픔이란 감정이 영화 속에서 ‘공감’이란 역할을 적극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겠습니다. 분노와 까칠, 소심이 무능하다고 하셨는데 사실 라일리가 그렇게 파격적인 결정을 하게된 건 (실제 임상심리학적으로도 폭발적 추진력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감정인)분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까칠과 소심은 라일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요. 기쁨이와 슬픔이가 빨려나간 후 셋이서 좀 삽질을 하긴 합니다만…그 와중에도 가만 보면 그 감정들 스스로는 자기 역할을 합니다. 그저 기쁨과 슬픔이 자리에 없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