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퀘스트

2023.08.18 11:38

돌도끼 조회 수:193

어드벤처 게임의 아주 초창기 모습은 플레이어와 컴퓨터가 글로 대화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때는 컴퓨터에서 그래픽을 표시하는 것 조차 옵션 기능이었던 때라 게임 전체가 글로만 진행되었습니다. 1980년에 '미스테리 하우스'가 나오면서 그래픽 어드벤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글자로만 진행되던 게임에 처음으로 그래픽을 도입한 거죠.

몇년 지나자 순수하게 글자로만 진행되는 어드벤처는 쇠퇴하고 그래픽 어드벤처가 대세가 됩니다. 그래픽 어드벤처를 처음 선보였던 회사, 시에라는 어드벤처라는 장르 자체를 멱살잡고 끌고가는 업계 리더의 위치가 되었습니다.

그당시 그래픽 어드벤처와 텍스트 어드벤처를 구분하는 기준은 단순히 그림이 나오냐 안나오냐하는 거였는데, 지금 사람들이 보기엔 둘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시기 그래픽 어드벤처에서 그래픽은 텍스트로 진행되는 게임에 보너스로 깔린 삽화 정도였거든요. 실질적인 게임 진행은 다 글자로 이루어져서 그래픽이 없어도 게임하는데 별 지장없는 것들이 대부분... 그래픽 어드벤처라고 해도 플레이어가 게임하는 도중 주로 하게되는 일은 글자를 읽는 거였습니다.

텍스트 위주에서 벗어난 진정한 그래픽 어드벤처의 시대는 8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1984년 IBM은 회심의 역작 PCjr를 발표합니다. 이름은 PC=개인용 컴퓨터이면서 이름값 못하고 PC 시장에선 맥을 못추고 있던 IBM PC(PC 용도로 쓰기엔 과한 스펙과 비싼 가격, 형편없는 그래픽/사운드 기능...)에다 너프할 건 너프하고 버프 먹일건 먹여서 '게임 좀 할만하게' 만들어 PC 시장을 공략하고자한 야심작이었습니다.
PCjr를 준비중일 때 IBM은 원래부터 친분이 있던 시에라의 켄 윌리엄스 사장님에게 기깔나는 게임 하나 만들어달라고 의뢰를 합니다.

시에라의 대표 게임 디자이너 (바로 '미스테리 하우스'를 만든 장본인) 로버타 윌리엄스는 PCjr를 보고는 반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로버타의 주력 기종이 애플II였으니 당연하겠죠. '색깔이 안번진다'는 것만 보고도 감명을 받았다고 해요ㅎㅎ 아직 아미가도 나오기 전이고... PCjr는 그 당시의 16비트 컴퓨터 중에서는 유일하게 게임친화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던듯요ㅎㅎ
로버타는 기존의 어드벤처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게임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애플의 성능 한계 때문에 막혀있던 차에 PCjr면 가능하겠다 싶어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로버타가 새롭게 디자인한 게임, '킹스 퀘스트'는 일단 첫인상부터 기존의 어드벤처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거 어드벤처 맞아?' 싶을 정도로 다릅니다.
기존 어드벤처는 보통 플레이어의 눈으로 보고있는 장면이라는 개념으로 1인칭으로 그래픽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KQ'는 3인칭 시점에, 액션게임처럼 플레이어 캐릭터가 늘 화면에 나오고 조이스틱으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주인공 캐릭터의 이동 조작면에서는 액션 게임과 다를 게 없어진 거죠.

기존 그래픽 어드벤처는 화면에 그림으로 보여준 정황을 텍스트로 또 설명해주지만 킹스퀘스트는 그런식의 설명은 생략했습니다. 어드벤처 게임의 기초중의 기초가 'look' 명령을 쳐서 현재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었는데 'KQ'에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정보는 지금 화면에 보이는게 다입니다.(근데... 낮은 해상도와 시에라의 썩 높지는 않은 미술센스 때문에 화면에 나오는 물건이 뭔지 알아먹기 조금 애매했다는 문제는 있었습니다ㅎㅎ)

겉보기엔 액션게임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명령은 여전히 플레이어가 직접 글자를 입력해서 집어넣어야 합니다. 처음에 보고 이게 '어드벤처 맞냐?'하고 긴가민가 했던 사람도 여기서부터 아 맞구나...하게 되죠.ㅎㅎ

플레이어가 내린 명령의 결과도 구구절절하게 글로 다 설명하지 않고 일단 화면 안의 그래픽과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텍스트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양이 많이 줄었죠. 이렇게해서, 어드벤처가 '읽는 게임'에서 '보면서 진행하는 게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픽 없이는 아예 할수도 없는 게임이 된거죠.

어쩌면 시대의 흐름에 따른 필연적인 변화였다고 볼수 있을겁니다.
그때까지는 어드벤처도 롤플레잉도 실제로는 거의 글자로 진행되는 게임이었습니다. 컴퓨터의 성능이 후달리다 보니 별로 할수 있는게 없어서 거의 글로 때웠고 나머지는 플레이어의 상상으로 메꿨습니다. 그래서 더 재미있기도 했지만...ㅎㅎ
'던전 마스터'의 경우처럼, 16비트 컴퓨터가 개입하면서 향상된 그래픽/사운드 기능 덕에 좀더 보여줄 수 있는게 많아지자 글을 줄이고 직접 눈과 귀에 어필하는 방향으로 가게된 겁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컴퓨터 하드웨어의 발전과 더불어서 더 많은걸 보여주는 쪽으로 발전해갔죠.



이렇게 혁신적인 게임이었습니다만... PCjr는 지금까지도 IBM의 역대 삽질 중에 수위로 꼽히는 물건...이죠. 시원하게 망했습니다. PCjr 전용으로 개발되었던 'KQ'의 운명도 거기 따라갈 뻔 했지만, 다행히 PCjr도 결국은 IBM PC 호환기종의 한 갈래였으니까 시에라는 게임을 일반 IBM PC용으로 컨버전해서 냈고, 내는 김에 다른 여러기종들로도 이식합니다. 그중에는 8비트 애플 버전도 있습니다. 그니까 로버타 여사가 마음속으로 구상했던 게임을 처음부터 애플II에서 만드는 것도 가능은 했었을거란 소리죠ㅎㅎ

그렇게 해서 'KQ'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된 건 첫 출시후 시간이 좀 지난 다음이었지만 그래도 당연히, 대박났습니다. 'KQ'가 대박나면서 이후 시에라는 더이상 텍스트 위주 게임을 만들지 않고 'KQ'와 같은 형태의 게임만을 만들었습니다(글고 그중 대부분의 제목이 '퀘스트'로 끝났습니다ㅎㅎ)
한동안은 'KQ'와 같은 형태의 게임은 시에라만의 전매특허와도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모방작들이 생기기 시작해 차츰차츰 3인칭 시점의 애니메이션 어드벤처 게임(시에라가 자칭하기로는 '3D 애니메이션 어드벤처')은 점점 대세가 되었고 나중에는 그런 애니메이션 어드벤처 게임을 그냥 어드벤처라고 부르게 됩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드벤처라고 하면 바로 떠올리는 모습이 그거죠.




시에라가 디지게 못하는 것중 하나가 새로운 하드웨어에 적응하는것...이라서... PCjr 버전 개발 당시에 난항이 많았고, 시간이 급했던 IBM이 직접 나서서 실제 프로그램 제작은 IBM측 사람들이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진 게임을 가지고 이후 데이터와 시나리오를 바꿔가며 돌려쓸수 있도록 게임엔진화 해서 AGI라고 이름붙인 시에라는 88년 SCI엔진을 새로 만들어 갈아탈 때까지 아주 열심히 써먹었습니다.(다시 말해 AGI의 초저해상도 그래픽을 88년까지 봐야했습니다ㅎㅎ)

PCjr및 초기 IBM 버전은 매번 그림이 실시간으로 그려지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애니메이션으로 진행되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장면 바뀔때마다 화면이 다 그려질때까지 몇초씩 기다려야 하는 모순이 있었는데 초기의 몇몇 AGI 게임들까지 그랬다가 나중에 미리 그려놓은 그림을 불러와 한방에 표시하는 방식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기존작들도 전부 재출시했습니다.(그때 'KQ'의 게임 타이틀에 원래는 없었던 부제가 붙었습니다.) 현재 판매중인 버전은 다 업그레이드판입니다.

게임기인 마스터시스템 버전을 논외로 하면, 컴퓨터용 이식판들이 다들 IBM 버전과 비교해 고만고만한 수준인데, 애플IIGS 버전만, 더 부드러운 색감의 팔레트에 다른 버전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런저런 스테레오 BGM들과 다양한 디지탈 음향효과(일부 음성도 포함)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GS만 특혜를 받은 건 모든 AGI 게임 공통입니다. 현재 GS 에뮬레이터가 썩 활발하진 않고 Scummvm에서도 GS는 제대로 지원 안해서 지금 GS 버전을 플레이하기엔 약간의 애로가 있습니다.

90년에 SCI 엔진으로 업그레이드한 리메이크가 나왔습니다. 시에라가 90년대 초에 열나게 했던 고전들 리메이크의 첫 스타트였습니다만, 너무 일찍 나온 탓에 VGA가 아닌 EGA까지만 지원합니다. 그걸 애석하게 생각한 팬들이 2000년대에 VGA상당(실제 VGA는 이미 퇴출된지 오래...)의 그래픽에 음성지원까지 추가한 팬리메이크 버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게 또 불을 당겨서 기타 다른 시에라 게임들의 팬리메이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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