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14:28
곰TV 고전영화에 그레타 가르보의 <춘희>가 올라와 있더군요.
<폭풍의 언덕>(1939), <초원의 빛>과 함께 제가 좋아하는 사랑 영화 Best 3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동안 수많은 영화, 오페라, 드라마 속에서 변주되어 왔던 이 닳고 닳은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기로 한 건
순전히 그레타 가르보 때문이었죠.
제가 본 영화들 속에서 그레타 가르보는 어깨도 넓고 씩씩하고 호탕한, 여장부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병으로 죽어가는 동백꽃 아가씨 같은 연약한 역할은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배우가 어떻게 연기하나 궁금했어요.
보고 난 후의 느낌을 말하자면.... 배우의 연기력은 어쩌면 이렇게 유명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에서
환하게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본 가장 매력적이고 지적이고 우아한 춘희(마그리트)였어요.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마그리트가 주위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녀의 성격이 하나씩 드러난다는 점이죠.
영화 속에서 그녀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여요.
다가오는 남자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기대하지도 않으며,
사랑에 쉽게 빠지지도 않고 영원한 사랑을 믿지도 않는, 세상 모든 일을 무심하게 웃어 넘기는 듯한 여자죠.
아만드(불어로는 '아르망'에 가깝지만, 로버트 테일러)와 나누는 대화들에서는 더욱 그녀의 성격이 멋지게 드러나요.
============ 이하 내용 스포일러 가득 (다음에 가로줄이 나온 이후엔 스포일러 없음 ^^) =============
아만드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한눈에 그의 순수하고 예민한 성격을 파악하죠.
그리고 자신의 저속한 친구들 및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히 판단하면서 그의 사랑에 응답할 수 없음을 담담하게 얘기해요.
아만드가 찾아오기로 한 밤에 갑자기 그녀의 후원자인 남작이 먼저 들이닥치고 대문에서 계속 벨을 울리는 아만드를
모른 척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마치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그냥 미친듯이 웃어버리죠.
마음은 이미 그에게 향하고 있지만 그녀의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요.
그런 그녀가 아만드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어쩌면 그녀는 이미 미래를 각오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그와 함께 하는 아름답고 황홀한 시간 속에서 그녀도 잠깐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찾아오고
그녀만큼이나 정확히 자식에 대해 알고 있는 노신사와의 대화 속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판단을 되새김했을 거예요.
그들의 대화는 노신사의 마그리트에 대한 경멸도, 그녀의 노신사에 대한 분노도 담고 있지 않아요.
노신사는 아들을 사랑하고 그녀는 애인을 사랑하죠. 그들은 아만드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생각해요.
마그리트가 아만드를 떠나고 그녀의 후원자 남작에게 돌아갔을 때 이미 그녀는 죽음을 원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지독한 상처를 주고 떠나보낸 후 그녀에게 무슨 살아가야 할 이유가 남아있겠어요.
그녀는 시름시름 앓으며 조금씩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먼 곳으로 떠났던 아만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요.
마침내 보고 싶었던 그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편안히 숨을 거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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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가르보의 연기는 마그리트라는 캐릭터를 비극적이고 숭고하게 만들어요.
그녀는 젊은 귀족의 사랑에 멋모르고 빠져든 순진한 처녀도 아니었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다 애인의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여 삶을 내던진 불쌍한 아가씨도 아니었어요.
그녀는 모든 것을 짐작하면서도 기꺼이 사랑에 몸을 던졌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녀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끝까지 책임을 지며 스스로의 고통을 견뎠죠.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까지 마음 속에서 몰아낼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10월의 마지막날, 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싶게 만든 영화예요.
2015.10.31 14:35
2015.10.31 14:45
제가 가끔 몰래 들어가서 영화 보는 유튜브 채널이네요. ^^ (어느새 업로드가 많이 됐군요.)
듀게에 알려져서 폐쇄되어버리면 어쩌나 걱정은 좀 되지만 ^^ 좋은 영화는 같이 봐야죠.
만들어진 후 80년이 다 된 오래된 영화는 그냥 보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2015.10.31 15:30
좀 아깝다 싶으면 http://offliberty.com/ 이걸로 유툽을 다운 받기도 하는데 그것도 불법에 들어가나 잘 모르겠네요
2015.10.31 15:56
알려주신 사이트에 들어가서 한 5분 노려봤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
예전에 영화 100기가 공짜 쿠폰 날아왔을 때 다운 받아놓은 옛날 영화들이 아직 제 하드에 버티고 있기도 하고...
여러 가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10.31 14:42
영화를 보고싶게 만드는 글이에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2015.10.31 14:50
영화 보고 감상을 얘기하는 글을 쓸 때는 어쩐지 무플을 각오하게 되는데
(이런 저런 감상을 써놓은 글에 댓글 달기 어려운 건 저도 알거든요. ^^)
이 댓글 받으니 기뻐요. ㅠㅠ
2015.10.31 20:29
저 어렸을 때 '춘희' 읽고 감동 받았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닳고 닳은 그런 이야기잖아요. 그래도 그 이야기엔 뭔가 있었다, 고 생각하는데 그게 뭔지 알려면 재독, 혹은 영화라도 봐야겠죠. 시간 되면 봐야겠어요.
2015.10.31 22:39
영화 <춘희>를 보고 로맨틱해져서 시집도 한 권 빌려오고, 그레타 가르보의 무성영화
<Flesh and the Devil>도 찾아놓고 분위기 잡고 있어요. ^^
좀 있다 저의 달달한 와인, 마주앙 모젤이나 한 잔 하며 11월을 맞을 예정 ^^
푸른나무 님을 위해 시 한 편 적어봐요.
새의 위치
김행숙
날아오르는 새는 얼마나 무거운지, 어떤 무게가 중력을 거스르는지,
우리는 가볍게 사랑하자. 기분이 좋아서 나는 너한테 오늘도 지고, 내일도 져야지.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겨울 코트엔 온통 깃털이 묻고,
공중에서 죽어가는 새는 중력을 거절하지 않네.
우리는 죽은 새처럼 말이 없네.
나는 너를 공기처럼 껴안아야지. 헐거워져서 팔이 빠지고, 헐거워져서 다리가 빠져야지.
나는 나를 줄줄 흘리고 다녀야지. 나는 조심 같은 건 할 수 없고, 나는 노력 같은 건 할 수 없네. 오늘은 내내 어제 오전 같고, 어제 오후 같고,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오늘은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오늘은 발자국이 생기기에 얼마나 좋은 날인지,
사람들은 전부 발자국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네. 춥다, 춥다, 그러면서 땅만 보며 걸어 다니네.
눈 내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데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났다.
우리는 눈 내리는 소리처럼 말하자. 나는 너한테 안 들리는 소리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를 두 손에 보듬고 걸어가야지.
2015.10.31 23:07
우와, 언더그라운드님 집에 놀러가고 싶어지네요. 10월 마지막 날에, 옛날영화에, 와인에... 그리고 평온한 마음까지. 저한테 마침 꼭 필요했던 것 같은 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시집을 사야겠어요. 즐거운 밤 보내세요.
2015.11.02 09:38
저도 춘희를 중학생때 읽고 마구 울었던 기억이..
지금은 그깟 3년이면 무심해질 사랑에 왜 목숨을 바쳤을까 싶다가도, 그녀의 그 마음이 지금시대에도 필요한 소중한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2015.11.02 17:39
어떻게 사랑하는 게 잘 사랑하는 건지 100번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어요.
(100번 생각하느라 댓글이 좀 늦었어요. ^^)
이런 시를 읽으면 사랑하며 사는 게 참 행복할 것 같긴 한데 말이죠...
When I Heard at the Close of the Day
WHEN I heard at the close of the day how my name had been receiv'd with plaudits in the capitol, still it was not a happy night for me that follow'd;
And else, when I carous'd, or when my plans were accomplish'd, still I was not happy;
But the day when I rose at dawn from the bed of perfect health, refresh'd, singing, inhaling the ripe breath of autumn,
When I saw the full moon in the west grow pale and disappear in the morning light,
When I wander'd alone over the beach, and undressing, bathed, laughing with the cool waters, and saw the sun rise,
And when I thought how my dear friend, my lover, was on his way coming, O then I was happy;
O then each breath tasted sweeter--and all that day my food nourish'd me more--and the beautiful day pass'd well,
And the next came with equal joy--and with the next, at evening, came my friend;
And that night, while all was still, I heard the waters roll slowly continually up the shores,
I heard the hissing rustle of the liquid and sands, as directed to me, whispering, to congratulate me,
For the one I love most lay sleeping by me under the same cover in the cool night,
In the stillness, in the autumn moonbeams, his face was inclined toward me,
And his arm lay lightly around my breast--and that night I was happy.
Walt Whit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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