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7 17:40
이건 출처도 없고 그냥 여기저기서 들은 얘기니 그냥 흘려 들으셈.
원래 원나라는 제국이고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포용했어야 했기에
무역이나 교통에 관대한 나라였죠.
따라서 흔해빠진 목화씨가 반출금지품목이었단건 말도 안되고 오히려
몇몇 군사적인 핵심분야를 빼면 엄청난 자유를 누리던 제국이었죠.
그리고, 목화의 한반도 재배는 문익점이 처음이 아니라고 하네요.
이미 삼국시대부터 재배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근데, 왜 목화가 그제서야 한반도에서 재배되었냐 하면,
이전의 목화는 품종이 인도와 같은 더운 지방에서만 자라는 것 뿐이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한반도같은 곳에서는 심어도 자랄수가 없었음.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북방에서도 재배가능한 품종이 나왔고
마침 문익점이 원에서 목화씨를 가져와서 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다는 것.
2015.11.27 18:25
2015.11.27 19:07
2015.11.27 22:20
어찌 보면 문익점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들의 마음에 쏙 드는 인물이었죠.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에 충절을 지키다 귀양살이하고(실상은 반대. 고려사절요에도 분명히 문익점은 덕흥군파였다고 기록....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후손들에 의해 왜곡되어 원나라 황제 앞에서 내가 어찌 왕에 대한 절개를 꺾겠냐며 일갈한 의인으로 둔갑합니다;;), 목화 재배 업적으로 다시 관직에 올랐던 우왕 때에는 정몽주 등과 더불어 고려를 지키자는 온건사대부 파에 섰다가 관직에서 물러난(신기한게 관운은 없지만 인덕은 있는 양반인지 덕흥군의 역모를 돕고도 파직만 당하고 이성계에 맞서고도 파직만 당한 채 낙향하여 72세까지 장수) 대쪽같은 선비이자 성리학자들의 가장 큰 약점-명분놀이 하느라 백성의 실제 삶에 아무 도움이 못 된다-마저 완벽하게 극복하며 백성의 삶에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니까요. 조선 초부터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해 태종 떄 서원 설립, 세종 때 영의정 추증, 세조 때 부민후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는 임금이 직접 서원 사액, 남명 조식의 소설로 성리학뽕이 최고조에 이르러 고종 때는 유생들이 목은 이색과 함께 문묘에 봉안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목화 재배 & 보급에 큰 업적이 있는 분이긴 한데 성리학 OB 멤버인 덕분에 후세에 버프를 많이 받기도 했죠.
2015.11.27 23:46
2015.11.27 19:22
이번에 문익점 얘기 이래저래 풍성하게 당시 역사적 배경, 후대 정치적 이해관계, 권력구도, 시대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조명이 참 좋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2015.11.27 22:28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 >3< / 예전에는 문익점을 그냥 백성을 위한 마음에 목숨을 걸고 목화씨를 들여온 열혈애국지사 정도로 생각했는데, 주변에 얽힌 얘기가 상당히 재미있는 게 많은 분이더군요. 어찌보면 인생사 새옹지마의 모범 케이스입니다. 덕흥군 사태 때 줄을 잘못 서서 파직당했지만 벼슬을 잃고 돌아와 소일거리로 시작한 목화재배가 대박나며 다시 벼슬에 올랐고, 온건 사대부파에 섰다가 일찌감치 낙향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끝가지 버티던 정몽주가 참살당하거나 아니면 이성계 편에 섰던 급진사대부파조차 나중에 이방원에 의해 썰려나간 것 생각하면 일찍 낙향한 게 신의 한 수... 이후 평탄하게 장수하다 죽고 죽은 뒤에는 유생들에 의해 충절과 애민의 아이콘으로 추존되었으니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이죠.
2015.11.27 18:54
유익한 얘기들이 많네요. 역시 게시판에 물어보길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2015.11.27 22:52
참, 떠도는 이야기 중에 문익점의 아들이 아버지의 의지를 이어받아 목화에서 실을 뽑는 방적기를 발명했고, 그의 이름 '문래'가 바뀌어 '물레'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별 근거는 없습니다. 실 잣는 물레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문래는 문익점의 아들이 아닌 손자. 혹시 기존에 있던 물레를 목화실 뽑는데 적합하게 개량했다면 모를까 말이죠. 또 문익점의 손자인 '문영'의 이름에서 목화 섬유를 일컫는 '무명'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것도 별로...=_=;; 목면을 한자로 읽으면 '무몐'이 되는데 이를 음차했다는 주장이 더 타당해입니다.
2015.11.27 23:50
2015.11.28 00:19
2015.11.30 00:00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 >3< / ...사실 전부터 알고 있던 거라기보단 저도 최근에 인터넷, 인터넷 신문기사 & 위키에서 주워들은 자료들이에요 >_<;;
2015.11.28 10:09
저도 글쓰신 남친님 비롯 샌드맨님등.. 여러분께 감사감사드립니다.
2015.11.30 00:01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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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들은 바로도 목화씨 얘기는 과장이 많이 섞였다고 하더군요.
이야기에서는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를 숨겨오다 적발되어 강남에 유배갔다지만, 실제로는 원나라에서 권력투쟁에 휘말려 귀환이 늦어졌죠. 당시 홍건적의 침입에 골머리를 썩던 공민왕이 원나라와의 관개 개선을 위해 사신을 파견하지만, 원나라에서는 반원자주정책을 펴던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실제로 덕흥군에게 군대까지 주어 고려를 공격했지만 최영 장군이 물리쳤죠. 이 때 사신들 중 원나라에 남아 덕흥군 옹립 계획에 협력하던 자들도 있었는데, 문익점도 그 중 하나입니다;;(덕흥군 옹립에 반대하고 공민왕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 유배당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건 후손들 주장) 덕흥군을 앞세운 고려 공격이 실패한 뒤 원나라는 이용가치가 사라진 고려 사신들을 고려에 돌려보냈는데, 문익점은 가담 정도가 약했는지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는데도 파직만 당하고 끝났습니다. 이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들여왔죠. 금수물품이나 붓두껍 얘기는 물론 뻥이고, 길 가다가 목화나무가 눈에 띄길래 씨앗을 훑어 주머니에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뭐 삼국시대에도 이미 면 옷감의 흔적이 발견됐고(다만 수입산일 가능성은 있음)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목화를 재배했을 가능성이 크니 최초로 목화씨를 들여왔다는 건 뻥이겠지만, 그래도 추운 지역에서 잘 자라는 개량종 목화씨를 들여오고 장인 정천익의 도움으로 대량 재배에 성공하여 여말선초 전국적인 목화 보급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란 것만은 사실입니다.
문익점이 이야기가 이렇게 과장된 것은 그가 고려말 유학자로 조선 성리학의 산파 격인 목은 이색의 동기로 신진사대부 세력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선 중기 이후 명분을 강조한 성리학 덕분에 정도전 뿐 아니라 조선 건국의 걸림돌 중 하나였던 정몽주까지 복권 & 추존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 성리학자 OB멤버 문익점까지 자연스레 재조명. 우리가 알고 있는 문익점 이야기는 남명 조식이 쓴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문익점이 목화 재배 성공 & 보급만으로도 위인 반열에 오를만한 업적이지만, 후대 성리학자들이 선배들에 대한 존경을 마구마구 담아 전설 수준으로 미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