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법 조항은 사회구성원들의 직간접적인 당위적인 기준을 반영하는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나라의 사회 구성원들 대부분이 도박을 범죄행위로 판단하기 때문에 도박이 범법 행위가 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도박과 같은 행위를 범죄 행위로 간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법이 제한할 수 있는 개인의 행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도박이 실정법의 규제 대상이 된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로, '법이 규제를 가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고 물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어떤 한 사회 내에서 지켜져야 하는 규율에는 여러가지가 있을텐데 그 중에 법은 특정한 지위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어른에게는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윤리적 규율 같은 경우, 그것을 어길 경우 사람들에게 사회적 비난을 들을 수는 있지만 구속이 된다든지 벌금을 내야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법을 어겼을 경우에는, 국가가 권위적인 권력을 동원해 강제적인 방식으로 그 법을 어긴 사람이나 단체를 징벌합니다.

그러니까 윤리적인 규칙의 경우 어떤 문화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여러 다른 내용을 지닐 수 있겠지만,

법의 경우 그것이 공식적인 효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또 그것이 강제적으로 집행된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규율보다는 훨씬 더 엄격하게,

법을 어기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행위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법학을 공부하지 않아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법 이론 쪽에서 어떤 기준을 제시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바로는 이 문제에 대해 적지 않게 고민하고 또 적절한 기준을 제시하려한 시도들이 철학 혹은 윤리학 이론에서는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가지로 Libertarian, 요새 정의란 무엇인가란 베스트 셀러에 중요한 윤리 이론으로 등장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법의 이름으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경우에는 그 명목이 어찌되었건, 최소한 법에 의해 처벌 당하는 대상으로는 보아서는 안된다는게 이들의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victimless crime, 즉 피해자 없는 범죄에 대해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피해자 없는 범죄는 성립되어서는 안됩니다.

 

victimless cirme이나 피해자 없는 범죄니 말은 엄청 어려워 보이고, 과연 이런 행위들이 얼마나 되나 싶은데 사실 이 개념에 걸리는 행위들이 꽤 많습니다.

이 victimless crime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행위들이 도박, 매춘, 마약입니다.

이 세 가지 행위들은 분명 그 행위를 하는 당사자들에게 나쁘게 작용할 개연성이 매우 높아보입니다. 셋 중 하나를 즐길 경우 십중팔구 폐인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봤을 때 이 세가지 행위 자체가 이 행위를 하는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이 행위 자체로 인한 피해자는 없어 보입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렇다면 이 행위들을 범죄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했을 경우 그 행위 당사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 행위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받지 않는다면 법에게 그것들을 처벌할 권한을 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왜 법이 그러한 행위들을 처벌하면 안되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번역된 이름 처럼 자유라는 가치가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의 자유를 법이 제한할 수 있는 경우는 그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그들의 철학적/윤리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 위와 같은 기준입니다.

 

원칙적으로 victimless crime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공리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리주의라는 말에서 풍기는 이미지에 따르면 위와 같은 행위들은 사회의 전체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해가 되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들을 규제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리주의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공리를 산출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각 개인들의 행복과 불행입니다.

사회적인 공리는 개인의 행복과 불행으로 환원될 수 있고, 아무리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면 공리주의의 입장에선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어떤 사람의 행위를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경우는,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불러올 때 뿐입니다.

따라서 현대적 공리주의 체계를 거의 완성하다시피 한 존 스튜어트 밀 같은 경우에도 victimless crime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보입니다.

그러니까 밀도 위와 같은 행위들을 법적으로는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밀은 매우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가며 위 행위들을 한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거죠. 어떤 성인 남성이 상습적으로 도박을 하는겁니다. 그런데 그 남성에게는 부양해야할 어린 자녀가 있습니다.

어린 자녀는 성인 남성이 도박에 매진하는 바람에 제대로 양육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국가는 그 남성이 자녀에 대한 양육의 의무를 다 하지 않았으므로,

도박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도박을 안하는 것만으로 양육을 하지 못한다면 강제 노역을 시켜서라도 양육의 의무를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밀은 주장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 남성이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도박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양육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박과는 달리 양육의 의무는 지키지 않았을 경우 피해자가 발생합니다. 즉 도박 자체가 규제의 대상이 되는게 아니라 양육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것이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되는 사례인거죠.

그래서 이 사례에서 밀이 이 남성에 대한 처벌 방식으로 제안하는 것은, 감금이 아니라 양육비를 충당할 수 있는 강제 노역입니다.

 

공리주의자들의 윤리관은 실질적으로 현재 대부분의 리버럴, 자유주의자들이 공유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위 이야기하는 좌파들, 그러니까 유럽식 정치 지형도에서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세력들도 최소한 정치적 이슈에서에 만큼은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들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경제적인 이슈에 있어서는 좌파들과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극단적으로 대립합니다.)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법이 침해할 수 없는 것처럼, 바로 그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다보면 도박, 매춘, 마약도 최소한 법의 규제 대상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BuRaQuee님의 입장에 대한 제 나름의 의견을 펼쳐보겠습니다.

제가 할일 없을 때 열심히 생각해 봤는데, 저의 정치적 혹은 윤리적 입장은 자유주의 혹은 공리주의인 것 같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저는 victimless crime은 원칙적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가 없으면 범죄가 아니고 따라서 법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BuRaQuee님의 대한 주장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도록 하지요.

 

제가 취하고 있는 입장과는 다르게 BuRaQuee님이 주장하시는 입장에서는 도박, 매춘과 같은 행위는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행위로 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행위들은 사회적 법익에 해가 되기 때문에 그 행위를 규제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로 제기하고 싶은 것은, 그 사회적 법익이라는 것이 얼마만큼 기준으로서 적합한 개념인가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마약을 복용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는 피해자를 발생시키지 않지만, 허용했을 경우 사회적 법익을 침해할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로 인해 복용자들의 노동 의욕은 저하될 것이고, 환각 상태에서 사람들이 범죄행위를 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적 법익이라는 기준에 따라 마약을 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면, 똑같은 필요에 의해 담배나 술 또한 규제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흡연은 당사자의 건강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고, 술에 의해 촉발 혹은 조장되는 범죄 또한 상당수이며,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 또한 막대할 겁니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사회적 법리에 관점에서 악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그것들 자체가 법적으로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수일 것입니다.

 

혹은 말씀하신 도박개장죄를 처벌해야 하기 때문에 도박죄를 의심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도박은 죄가 아니며, 도박개장죄 또한 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도박개장죄가 법적 규제에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는 바다이야기와 같은 도박장의 경우 그 피해, 사회적 피해가 너무 막대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사회적 법리에 해가 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도박장 개장이 사회적 법리에 해가 될 수 있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나라에 성행하는 여러 온라인 게임들도 사회적 법리에 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바다이야기에 대응해서 리니지에 대해 생각해보죠. 리니지라는 게임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폐인이 되었고, 사기, 폭행 등 그 게임과 관련된 여러 부작용도 생겨났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법리라는 입장에서는 리니지라는 게임의 서비스를 법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온라인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몇몇 국가에서는 법적으로 온라인 게임의 접속 시간을 제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는 리니지 서비스에 어떤 제한을 가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이건 어떤 일관성이 결여된 법 집행이 아닐까요?

 

물론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을겁니다. 리니지가 어느 정도 사회적 법리에 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다이야기는 리니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해악이 되기 때문에 리니지는 법적으로 규제할 필요가 없지만 바다이야기는 규제해야 한다고요.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법리라는 개념 자체가 아니라,  법적 처벌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로 해가 되어야 하는지 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 정도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합의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 그 둘 사이를 차별적으로 제한하는데 근거로 그 정도라는 것이 고려된 적도 없다고 생각 합니다.

도박장 개설은 그게 사회적 법리에 어느 정도에 해를 끼치든 간에 도박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 도박장 개설 금지의 원인이 아닐까요?

 

 

하여튼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사회적 법리를 근거로 어떤 행위에 법적 제한을 가하는 것은 그 기준 자체가 명확하지 않고, 그것이 어떤 수준이 되어야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근거 또한 불분명하기 때문에, 처벌의 정당성이 부여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제가 취하고 있는 입장은 그나마 기준이라는게 있어보여요. 타인의 자유를 침해했는가, 혹은 타인의 불행을 야기했는가 같은. 이 기준은 사회적 법리라는 개념보다는 명확하고, 위에서 논했던, 법을 통해 처벌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주장은 실정법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법이 어떤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가'라는 원칙에 대한 소신이며 기준입니다.

진중권씨는, 그 법이라는 것이 비록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할지라도, 실정법에 의해 그러한 식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법이 처벌할 수 있는 행위'라는 근본적인 원칙(진중권씨 자신이 믿고 있는)에 비추어 봤을 때,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원칙적 민주주의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요.

 

 

 

   

뭐 그런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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