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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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한국인만 공유하는 특징들이 있다. (사)교육 열풍, 군대 문화, 지독한 경쟁과 열정, 고부갈등, 엄청나게 발달한 배달 및 택배 문화와 노동자를 굴리는 게 당연한 줄 아는 문화 등... 그 중에는 아파트에 대한 집착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그 욕망은 단순한 '내 집 마련'이 아니다. 어디 아파트에는 들어가줘야한다는, 어떤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과 동등하게 살아야한다는 계급투쟁이기도 하다. 서울의 어떤 동네는 다른 어떤 동네를 무시하고, 어떤 아파트는 옆의 다른 아파트를 무시하며 출입금지까지도 불사한다. 한국인들에게 아파트는 '나 어디 살어'라고 말하는 순간 자부심 혹은 수치심을 드러내는 징표이며 자본주의적 안정을 이룩하는 최후의 과제이다. 자가 아파트만 있으면 한국사람에게는 큰 걱정은 없다. 반대로 자가 아파트가 없으면 영원한 불안과 년단위로 이사를 해야한다는 과제에 시달린다.


이 지점을 건드리는 순간 한국인들은 강렬하게 반응한다. 어떤 논리보다도 그 욕망이 가장 큰 교집합이 된다. 이 때 이 욕망은 아주 간단하게 사회의 공공선을 초월하거나 집단이기주의로 돌변한다. 문재인이 가장 크게 욕을 먹는 것은 어떤 지점이었나. 아파트를 포함한 집값을 끝도 없이 올라서 집을 살 수 없게 했다는 것이었다. 코로나를 아무리 훌륭하게 대처했어도 주거구매 시장을 안정시키지 못한 죄는 대한민국 최악의 대통령에게 정권교체를 시킬 정도로 큰 죄였다. 한국인들은 이 욕망에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이것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사회의 규칙으로 거의 자리잡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대단한 점은 아파트에 대한 한국적인 집착을 디스토피아의 규칙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그 순간 이 영화는 현실을 상기시키는 선명한 교보재가 되면서 현실의 규칙에 따라 탄생한 새로운 세계가 된다. 종종 어떤 픽션은 현실적이면서도 픽셔널한 지점을 살린 채로 환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따져보면 이 영화의 설정 자체는 그다지 현실적이지도 않다. 지반이 무너진 세상에서 어떻게 아파트 한동이 하필 멀쩡하게 지탱되고 있으며, 그 아파트에는 또 살인범이 숨어들어가 있고 그 사람은 뒤틀린 영웅정신을 가지고 있나? 그런데 영화는 이 모든 지점을 아파트에 대한 욕망으로 다 설득해버린다. 그 정도로 이 욕망은 관객들에게도 강렬한 것이기에 비현실적이거나 작위적인 부분들을 순식간에 잊을 정도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어버린다. 내가 만약 저 아파트의 입주민이었다면, 내가 저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 가정법만으로도 이 낯설은 디스토피아는 순식간에 "나의 아파트"를 향한 욕망으로 어떻게든 이겨내야하는 또 다른 현실이 되어버린다.


엄태화 감독은 이 지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오로지 "입주민"의 입장에서만 전개 가능하다. 세상이 무너졌고 아파트 한 동만 딱 멀쩡하게 버티고 있을 때 그 아파트의 입주민이 아닌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가 공감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망했어도 남의 아파트를 뺏거나 살게 해달라고 하다니...'라고 이미 한국인 전체의 욕망이 합의되어있기 때문이다. 바깥이 불구덩이가 되어도 신발 바닥의 흙을 묻혀서는 안되는 공간인 것처럼 아파트는 한국인에게 너무 신성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내용이 나오면 꽤나 불쾌해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입주민 회의가 열리는 부분을 보자. 하필 아파트에서 제일 경계가 취약하다고 평가받는 1층의 누군가 칼에 찔렸고 그 집에 불이 났다. 외부인의 소행으로 보이니 외부인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입주민들은 회의를 시작한다. 이 때 제일 먼저 발언하는 사람의 논리는 이렇다. 자신은 이 아파트 근처의 초원교회 쪽 빌라에서 살다가 작년에 입주했는데, 입주하기까지 정말 시간이 많이 걸렸고 고생도 많이 했다고. 그래서 이렇게 고생한 자기 집에 외부인들이 있는 게 "싫어요"라고 분명히 말한다.  외부인이 위험한지 안위험한지, 엄동설한에 외부인을 쫓는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내가 고생해서 얻은 것을 아무 고생없이 저 사람들이 누리려는 게 싫다는 것이다. 이것은 안보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내 사유재산을 공유하기 싫다는 자본주의 독점의 논리다. 혹은, 내 것을 나누기 싫다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이기심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이 영화가 디스토피아물이니, 재난 생존장르이니 하는 것은 일종의 허상이다. 영화 초반부터 입주민들이 스스로 외치는 논리는 나의 안전이 아니라 나의 사유재산 독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히 말한다. 이 옆의 드림팰리스 주민들이 자신들을 얼마나 괄시했으며, 이런 상황이 생겼으면 그 사람들은 자기들을 발도 못들이게 했을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도 똑같이 되갚아주겠다는 이 논리는 계급이 뒤집혔을 때 상위 계급으로서 그들이 행했던 차별의 정치를 똑같이 해주겠다는 것이며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할지 기존 사회의 차별을 그대로 답습하겠다는 논리다. 다시 한번 짚자면 입주민 회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안보가 아니라, 계급의 논리다. 지들도 그랬을건데 왜 우리는 굳이 착하게 굴어줘야하냐는, 내가 고생한 건 나 혼자 갖고 싶다는 논리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것을 정확히 짚지 못한다. 아파트는 너무너무 절실하고 소중한 그 무엇이니까. 세상이 무너지든 말든 차마 나눌 수 없는 무엇이니까.


입주민 회의는 사실 정상적인 회의가 아니다. 외부인이 이 아파트에 들어와도 되는지를 논의하는 과정이라면, 입주민과 외부인이 함께 논의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처음부터 이 아파트를 입주민들만의 공간으로 아예 못을 박아놓고 시작한다. 그리고 본인들이 외부인의 거주 문제를 결정한다. 타인의 생존권을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다는 이 논리 앞에서 폭동 혹은 분쟁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후 입주민들은 어떻게 하는가. 당신들은 이 아파트에서 나가줘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빈 아파트를 제공하겠다'는 거짓말로 이들이 나오도록 꾀어냈다. 정말로 이것이 생존의 문제라면 왜 나의 아파트는 나의 생존을 위해 너와의 공생보다 더 앞서는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외부인들을 쫓아내는 회의의 참여인원, 외부인 배제의 논리, 외부인 배제의 방식 이 모든 것들이 '생존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디스토피아물의 윤리를 무색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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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로 감상을 하면서 김영탁의 정체를 처음부터 알고 보게 됐다. 이 때 입주민 회의는 굉장히 기괴하게 보인다. 입주민들끼리 외부인을 몰아내야 한다고 하고 있는데, 외부인인 모세범이 김영탁인 척 앉아있으면서 태연하게 김영탁 흉내를 내고 외부인을 몰아내자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도 이 입주민 회의를 '생존의 논리'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히 틀리게 된다. 모세범은 입주민을 살해한 가장 위험한 외부인인데도 이 외부인을 입주민들은 전혀 걸러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세범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할 것이다. 그는 대체 왜 아파트 1층에 난 화재를 끌려고 그렇게 열심이었나. 그는 그렇게 정의롭거나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의 그 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실질적으로 갖지는 못했어도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이 아파트가 너무나 소중하기에, 자기 집 아닌 다른 곳에 불이 난 것조차도 위기로 느끼고 바로 반응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런 모세범을 중심으로 모인 이 주민단체는 생존의 논리와는 크게 상관이 없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모세범, 부녀회장 금애, 그리고 다른 주민들 모두가 "내 아파트에 대한 소유욕"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실현하려는 것은 자본주의에 의한 독점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안전 및 다른 모든 생존권의 독점이다. 관객인 우리는 이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아파트는 입주민과 외부인의 생존권이 서로 대치상태에 있지 않으며, 자본을 독점하고자 타인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필연적이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이 경우 제일 중요한 것은 자원의 분배 문제이지만 아직 이 문제를 입주민들은 건드리지도 않았고 민성은 이 외부자로부터 황도를 구했다) 이 입주민 단체는 생존권을 위해 타인을 어쩔 수 없이 희생시키고 있지 않다. "내 공간에 있는 게 싫어서" 이들을 쫓아낸 것이다.


그런 다음 영화는 제 4의벽을 깨면서 정신차릴 기회를 한 번 준다. 부녀회장 금애가 아예 카메라를 쳐다보며 관객들에게 황궁 아파트의 입주민 규칙을 설명한다. 관객은 금애의 우스꽝스러운 설명 영상을 보면서 우리가 이 황궁 아파트의 입주민인 것처럼 그와 눈을 맞춘다. 그리고 입주민의 시선이 얼마나 괴상한지 그것을 직접 실감한다. 영화는 공무원 민성이 변 처리 방법을 설명할 때는 마치 화재 진압이나 민방위 영상을 보여주듯이 보여주며 마지막에는 아파트 광고영상의 문법으로 황궁아파트의 입주민들을 보여준다. 이 영상은 얼어죽을 확률이 매우 높은 추위에 외부인들을 막 쫓아낸 직후에 나온다. 황궁의 입주민들은 '자기들끼리만' 행복한 영상으로 설명 영상을 마무리짓는다. 여기서 과연 이 시퀀스 자체를 대한민국의 현실, 아파트만 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죽든말든 무신경한 이 현실과 과연 분리지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후기들을 보면 꽤나 많은 관객들이 이 입주민의 시선 자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입주민의 입장에서, 편의적으로 생존이라 해석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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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또 다른 대단한 점은 황궁아파트 입주민들이 정치적 입장을 설득하는 태도다. 입주민들은 외부인들에게 당신들이 잘못했고 우리들의 어떤 선택은 정당하다고 하지 않는다. 입주민들은 갈등에 부딪혔을 때 피해자의 위치를 선점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생존권을 박탈한다. 어떤 식으로든 본인이 피해자인것처럼 주민회의가 끝난 후 외부인들을 쫓아낼 때, 입주민들은 이들에게 곧바로 무력싸움을 진행하지 않는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퇴거 명령을 일단 선언한 후, 흥분한 외부인들이 달려드는 것에 맞서기 시작한다. 이 때 몸싸움은 김영탁(모세범)이 국회의원 보좌관에게 밀쳐지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몸싸움이 격렬해지다가 흥분한 외부인 한명이 쇠파이프로 김영탁의 머리를 가격한다. 김영탁의 머리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대가리가 깨진" 상황에서 김영탁은 자신의 피투성이 몰골로 외부인들에게 "다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육체적인 항쟁 끝에 이들을 이긴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이제 사람 머리통까지 깨부수냐면서 이들에게 남은 일말의 양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투쟁을 무력화시킨다. 너희들이 감히 우리를 이렇게까지 다치게 하다니! 


현실을 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강제철거를 당하는 사람들, 노조, 시민단체들이 이런 식으로 공권력의 겁박을 당한 뒤 허울좋은 '준법투쟁'의 기치 아래에서 폭도로 몰린다. 이 영화에서 입주민들은 자본주의적으로만 강자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강자의 위치를 점유하려한다. 너네가 나쁘고 우리는 피해자라는, 이 끊임없는 피해자 자리의 쟁탈전은 단지 시위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목격되는 장면들이다. 이 피해자로서의 윤리는 이후 슈퍼마켓을 약탈할 때도 다시한번 적용된다. 남의 물건을 가져가면 당연히 안되고, 자기 물건을 지키려는 슈퍼마켓 주인의 인질극은 그 세계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민성이 이 주인의 시선을 돌리고 입주민 일행이 슈퍼마켓 주인을 무력화하면서 이들의 약탈은 정당화된다. 아직 어린 아이를 감히 인질로 잡느냐며, 김영탁은 그 주인을 심하게 두들겨팬다. 나이먹은 양반이 어디 얘를 인질로 잡냐면서 김영탁은 그에게 계속 도덕적 응징을 가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병헌이 [광해]에서 말했던 '부끄러운줄 아시오'와 유사한 대사, '부끄러운줄도 모르고'를 반대의 논리로 쓰고 있는 걸 상기해보면 묘하다) 


이후 입주민들은 대형 마트의 생필품을 대량으로 발견하고 가져가다가 다른 이들의 습격을 받는다. 부녀회장의 아들은 화염병의 불길에 끝내 죽고 만다. 이 사건은 단순한 참사가 아니라 일찍이 슈퍼마켓에서도 발생했던 일의 다음 순서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린 아이를 인질로 잡느냐고 그렇게 화를 내던 김영탁은 왜 이 어린 아이가 계속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그냥 방치해두는 것일까? (그 원칙도 어차피 입주민들의 협의로 정한 거라 협의를 다시 하면 되는 일이다) 단순하게 보면 부녀회장 금애가 영탁의 뺨을 때리며 화를 내는 것은 과잉된 모성애처럼 보이지만 실상 김영탁의 분노가 얼마나 도구적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의 희생을 오로지 타인을 공격하는데 사용한다. 일찍이 슈퍼마켓에서 부녀회장의 아들이 쓴 헬멧에 총을 맞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영탁은 또 다시 사지로 그 어린 아이를 내몬 것이다. 우리 집단은 피해자이고 외부의 적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야하지만, 정작 그 외부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어린 아이를 희생시킨다는 이 영탁의 논리는 현실세계의 극우보수정치의 폐해를 그대로 담고 있다. 집단을 지켜야한다고 하면서도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자꾸 촉구하고, 그 희생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영탁은 꼭 필요한 지도자가 아니다. 그가 실질적으로 죽게 만든 입주민들이 모두 아이라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그는 아파트 입주민들이라는 집단을 위해서는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것도 거리끼지 않는다. (그는 금애의 아들을 죽게 한 다음에는 혜원을 쫓아가서 죽여버린다) 혹은 그는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넘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내 대가리가 깨져도'라는 그의 희생정신은 과연 집단이 영웅시해야할 성격의 것일까. 한 사람의 희생정신은 개인 단위로는 숭고해보일지 몰라도 집단의 단위에서는 자신의 희생만큼 타인의 희생도 강요하는 파시즘으로 전락한다. 입주민들은 입주민 개개인을 지켜주고 있는가. 입주민 개개인은 본인들의 안위를 위해서 사는게 맞는 것일까. 가부장제의 위대한 아버지는 아들과 딸 모두를 죽이지 않았나. 그리고 이 영화가 개봉한지 불과 1년 전에 백여명 단위의 청년들이 죽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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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탁이 마이크를 잡고 아파트를 부를 때, 영화는 그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는 사실 모세범이라는 사람이고 902호의 실제 주민인 김영탁은 그가 죽여버렸다. 영화는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질문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존을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치더라도, 우리 자신이 세운 원칙에 위배되는 이 김영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할 것인지. 그리고 이 원칙으로 돌아가는 입주민 모임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지. 이 때부터 영화는 웃음기가 빠진다. 코메디로 치부하기에는 모세범의 정체가 이 황궁아파트라는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의아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명화를 타박하고 비난해도 모세범을 비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명화의 고발은 모두의 생존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입주민들이 의존하는 이 리더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를 밝혀야, 입주민 전체가 그를 배제하고 생존률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고주망태 선장의 배를 탈 것인가, 정신이 또렷한 선장의 배를 탈 것인가. 그 누구라도 현실에서는 후자를 택하겠지만 그 취한 것이 사상인 경우에는 제대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모세범에 대한 가치판단을 포기해버린다. 그가 이미 한번 뽑은 지도자이기 때문일까. 그를 부정하는 경우 그가 제시한 가치관을 따라왔던 자신의 틀림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일까. 이 또한 현실정치에서 쉽게 관측되는 현상이다. 보수의 잘못은 원래 그런 거라면서 넘기지만, 진보의 잘못은 위선자의 타락이라면서 죽일 듯이 몰아붙인다.


거짓말쟁이는 집단의 존속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리고 모세범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난 이후, 혜원을 분풀이로 죽여버렸다. 이 장면에서 그는 과거의 자신과 선을 그을 변명거리조차 사라진 셈이다. 모세범이었던 나는 비록 입주민을 죽였던 외부인일지몰라도, 그 때는 원래 내 집이었야 할 902호를 되찾기 위한 항쟁이었을 뿐 현재 김영탁이 된 나는 이제 입주민들만을 생각한다는 자기변호도 하지 못한다. 그는 입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다른 입주민을 망설임없이, 그저 분풀이로 죽여버린다. 그는 다른 입주민들에게는 통제불가한 괴물이다. 만약 외부인들이 처들어오지 않았다면 김영탁은 지도자로 계속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혹은 그 아파트에서 머무를 수 있었을까. (실제 김영탁의 시체가 담긴 김치냉장고를 들고 온 입주민들은 외부인 규정을 어겨서 죄송합니다를 200번 외치고 수모를 당한 입주민들이었다)


이 영화는 다시 한번 "바퀴벌레"들이 황궁아파트에 침입해 입주민 체제를 무너트리는 것으로 실질적인 결말을 맺는다. 이 외부인들에 의해 입주민들은 쫓겨나간다. 이 영화가 왜 입주민들의 시체를 보여주는 대신 입주민들이 비를 맞으며 쫓겨나가는 장면을 보여주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유재산의 독점은 천부인권 같은 게 아니고 우리가 타인과 공생을 도모해야하는 것은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쫓아낸 타인들이 새로운 위험분자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지극히 사회적인 논리를 이야기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어떤면에서는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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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이 영화의 초점은 김영탁에게 맞춰지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가 아파트 노래를 부를 때 카메라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그를 줌인한다. 아예 얼굴을 들이밀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들여다보자는 듯이. 그는 대단한 악인도 아니다. 자기 소유가 됐어야 할 아파트를 사기당했고 그 사기를 친 사람이 뻔뻔하게 굴자 분을 못이겨 몸싸움을 벌리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만 사람이다. 그의 울분은 관객들이 이해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한국에서 아파트를 사기맞았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범죄가 아니라 가족의 보금자리이자 여태껏 살아온 인생 자체의 무게를 무시하는 행위니까.


문제는 영화가 그의 사연을 전시하며 관객들이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아파트에 대한 욕망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 사연은, 욕망에 대한 경고장보다 면죄부처럼 작용한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라고 김영탁을 동정하는 동시에 그의 모든 정치적 행위들마저도 정확히 판단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영화는 이 정도의 사연을 다른 캐릭터들에게 거의 할애하지 않는다. 재난 현장에서 민성이 어떤 여자를 구하지 못했던 장면 정도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줄 뿐, 명화나 혜원이나 금애에게도 이 정도 사연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서사를 불균형하게 부여하고 있다. 연대의 실패를 연대의 성공보다 더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감정을 이입한다. 이미 입주민의 시선에서 김영탁에게 심정적으로 의지를 하며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이 불균형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영탁의 피투성이 최후까지도 쫓아가며 아파트를 지키려했던 그의 고군분투를 비춰준다. (영탁이 입주민들을 지키려했던 게 아니라 아파트를 지키려했다는 게 중요하다)


영화는 김영탁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거의 주지않는다. 오히려 김영탁의 시점에서 자신이 의심당하고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더 보여준다. 어떤 관객들은 명화나 혜원이 그의 정체를 고발하는데 실패하기를 분명히 바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김영탁을 중심으로 바라보게끔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가 김영탁을 고발하듯이 보여주는 그의 공포정치들조차도 관객들에게는 위협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퀴벌레"들을 숨겨주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이며, 엄연한 입주민 규칙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탁의 시점이 아닌 명화나 혜원의 입장을 더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영화는 생존이라는 허울로 영탁의 모든 행위를 합리화하는 이 황궁아파트의 세계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지점에서 혜원이 외부자로서 가진 시선이 조금 더 묘사되지 않은 것은 아쉽다. 영화가 영탁의 내면까지 완전히 들어갔다 나왔다면, 이제 그의 정체를 다 알고서 황궁아파트 입주민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봤어야 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혜원은 다소 기능적으로 쓰이고 그친다. 그가 영탁에게 살해당하기 전 입주민인 자신을 죽일 거냐고 조금 더 따져물었으면 어땠을까. 원칙마저도 스스로 무력화시키며 날뛰는 영탁을 영화가 피해자 당사자의 눈으로 조금 더 바라봤다면 관객들은 이 황궁아파트가 얼마나 미쳐있는지를 조금 더 실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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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우화로 바라본다면,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유토피아의 발견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희망적인 결말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도 있을 수 있지 않겠냐는 감독의 가정법이니까. 이 장면에서 명화가 따뜻한 쌀밥을 받아드는 장면은 인상깊다. 이 새로운 무리는 단순히 의식주를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약탈을 하지 않아도 되는만큼 그들 스스로의 생산수단을 겸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희망적인 의문을 들게 한다. 황궁아파트에서는 차를 끓여먹는 장면도 나왔지만 계속해서 생라면이나 통조림만을 먹었다. 그 밥의 온기를 만들고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은 결국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에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부감으로 찍은 그 곳의 장면은 이상하게도 사회취약층들을 위한 급식소처럼도 보인다)


명화가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수평으로 누워있는 아파트다. 천장이 벽이 되어있고 그곳은 단 1층만이 나열되어있다. 아파트는 얼마나 수직적인 공간인가. 영화에서 외부인들을 쫓아냈던 것은 영탁과 무리들의 위협뿐만이 아니라 아파트 고층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화분과 여러 물건들이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그 폭력은 아파트란 공간의 본질을 가리킨다. 1층부터 고층까지, 수직적으로 세워진 이 공간을 탐하는 우리 한국인들은 얼마나 더 높은 곳에서 따로 모여살기를 바라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영탁 일행이 습격을 당했던 것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화염병들이었다. 다소 안온해보여도 이 정치적 메시지를 믿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영탁과 입주민들의 실패를 생생히 목격했으니까. 


@ 영화를 2회차 보고서야 외부인들이 황궁아파트에 쳐들어왔던 게 내부인과의 결탁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리를 찔렸던 입주민이 밖으로 나간뒤 외부인들을 불러들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입주민과 외부인의 구분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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