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오펜하이머

2023.08.17 10:16

잔인한오후 조회 수:674

개봉일에 주변의 IMAX 예매까지 하며 봤는데, 생각과는 전혀 다른 영화였습니다. 약 3시간짜리 영화니까, 사실 한 번 보고 이게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게 어려운 게 아닌가 싶지만, 나중에 다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이니 적당히 적어봅니다.


이보다 더 한 영화를 봤던걸 떠올리려면 꽤 오래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마초마초한 영화였습니다. 스크린에는 오직 남자들만이 가득하고 권력과 미래, 정치와 과학 그 모든 것은 강력한 힘과 남성에게서 남성에게로 전달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감각은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영화에 서서히 몰입해서 완전히 빠져들지 못하도록 꾸준히 괴롭히는 거스러미 같은 것이어서 처음에 말해 둡니다.


영화는 한 번에 흐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플래쉬 백이 많은 혼란스러운 영화였습니다. 흑백과 컬러 시점이 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흑백보다 컬러가 더 이전 시대입니다. (오펜하이머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상황을 흑백으로 처리했는지 명확하지 않군요) 오펜하이머가 등장하는 현재는 아마도 보안 인가를 위한 청문회였던 것 같고, 다른 법정 같이 보이는 흑백 청문회는 스트로스가 장관직을 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걸로 보였습니다. 영화에서는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나오며, 그 사람들 각각이 꽤 이름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굉장히 시끄러운 영화이기도 해서 영화 전체의 1/3 정도는 고조되는 저음과 여러 가지 음으로 구성된 파음들을 듣게 됩니다.


제가 이해한 영화의 큰 맥락은 이런 식입니다. 오펜하이머는 똑똑하지만 비실용적인 연구를 하던 과학자입니다. 별의 죽음 따위 공산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자본주의가 서로 힘을 겨루는 현실 세계에서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미국에서 양자역학을 가르치며 두 개의 파격적인 신문 기사를 보게 되는데, 하나는 나치의 폴란드 침공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핵을 부쉈다는 실험 기사입니다. 이론 물리학자인 오펜하이머의 계산에 따르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바로 실험물리학자가 있는 옆 방에선 그것이 현실이 됩니다. 이후 연쇄 붕괴를 기반으로 한 폭탄을 만들어내고, 이후 그보다 더 강한 폭탄을 만들지 말자는 이야기를 했다가 애국심을 의심받으며 취조로 고생합니다.


젊은 오펜하이머는 현실 세계의 감각을 잃고 미시 세계로 빨려 들어가기를 반복합니다.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 같은 화면의 전환은 꾸준히 계속 됩니다. 뭔지 모르겠는 입자와 (아마도) 전자의 궤도, 블랙홀과 연쇄 붕괴, 폭발 등을 포함한 물리학적 비젼이 현실 세계와 교차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그 세계가 딱히 현실 세계에 영향을 주지 않던 과학자가 폭탄으로 현실 세계에 그 내역을 재현합니다. 핵의 폭발은 굳이 영화적 신 교체를 통하지 않고도 현실 세계에 물리학적 비젼을 구성해냅니다. 영화의 맨 첫 장면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물 표면이고, 마지막 장면은 그 물 표면 건너에 보이는 세계의 멸망입니다. 실제로 그 물건을 만들기 전까지는 무슨 의미인지 아주 구체적으로는 몰랐지만 사용되고 나서는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리지 않은 선지자가 종말의 미래를 보았고, 그 과정 중에 크게 자기 책임이 있다, 라고 화두를 던지는데 주인공에게 크게 이입되지 않으니 제 몰입은 궤도를 이탈합니다. 두 건의 청문회를 사용해서 까지 그 과정에 도달하는 내면을 속속들이 캐내어 던지지만, 그 과정에서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의 인간성도 그대로 반영되고, 딱히 친구하고 싶은 사람은 아닙니다. 영화적 진실에서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스트로스와 대비되지만, 극의 몇몇 조각들은 실제 그가 상당히 중립적이며 회피적일 수 있다는 가정을 하게 합니다. 아버지로서도 최악이고요. 그래서 다 보고 나서 그렇긴 해, 하지만 어쩌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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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와 냉전 시대의 편집증적 태도들은 정말 생생했습니다. 특히 우리가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징후로 가득한 최근에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 시대를 마음으로 준비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일 대만과 중국에 전쟁이 난다면? 한국은 미일과 협업하며 서해는 봉쇄되며, 말라카로 넘어오는 여러 물품들은 막히고 물가가 치솟고, 한국에서의 대중국 태도를 그와 같이 샅샅이 잡는다면? 덩달아 좌파적 사고도 북한 공작단의 선동이라고 청문회에 서게 된다면? 아마 이 영화를 본 한국 사람 중 청문회나 인가 과정을 보며 검찰 취조를 안 떠올린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면에서 재미있게 봤습니다. 멘하탄 프로젝트가 훨씬 커졌을 꺼고, 오펜하이머의 과는 거의 없어졌을 것이며, 분명 일본에서 원폭 터지는 장면이 나왔을 겁니다. 이 영화는 심지어 그 원폭이 터진 결과에 대한 장면도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펜하이머가 그 장면을 보는 장면만이 들어 있을 뿐이죠. 두 개의 핵폭탄이 군용차에 실려 털털 거리며 빠져 나가는 장면은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어디론가 결과가 사라져 가는걸 바라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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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대화하는 장면만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이론 물리학자 둘이 '우리 둘 다 수학 못 하잖아, 안 그러나?' 하는걸 어디서 보겠습니까. 게다가 알버트가 '골방 늙은이 취급 당해봤어? 너도 그렇게 될 꺼야' 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제가 아는 어떤 트친은 과학자들의 신성화를 무지하게 싫어하는데, 여기서도 사실 좀 이상하고 능력있는 사람들로 나오긴 하지만, 전보다는 훨씬 인간적으로 다뤄져서 좋았습니다. 파인만이 북이나 두드리는 식으로 나오는 것도 좋았어요. (그 지인의 말에 따르면 파인만이 제일 심하게 신성화되었다고 하더군요.)


강력한 폭탄을 만들었고, 적과 그 폭탄을 만드는걸 협의하고 싶은데, 존재 자체의 지식이 적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또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하는 그런 아이러니적 상황도 잘 그려져서 좋았습니다. 어렸을 적에 책에서, 원자 폭탄과 수소 폭탄 이야기가 근사하게 나와 있어서 (A폭탄 100개가 B 폭탄 1개!) 그런 그림들을 그렸던 생각이 납니다. 심지어 슈팅 게임에서는 필살기로 폭탄들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고요! 그런게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이었는가 싶습니다.


P. S.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대사가 어디에서 처음 나오는지 봤을 때 실소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관점도 그와 비슷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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