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와 미디

2023.08.17 13:40

돌도끼 조회 수:189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켄 윌리엄스는 낙관적이었습니다. 시에라의 일본 진출을 모색하기 위해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된 켄은 일본 컴퓨터 업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막연히 미국보다 뒤쳐져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죠.
막상 일본에 도착한 후 켄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일본의 컴퓨터 수준은 예상보다 높았고 오히려 미국보다 더 발전해있었던 겁니다. (8비트 컴퓨터의) 하드웨어 수준이 미국과는 비교도 안되었어요. 고해상도 그래픽에 FM 사운드가 거의 기본이고, 그런 하드웨어를 바탕으로 해서 미국에서는 컴퓨터 게임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화려한 게임들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테구자...THEXDER'에 꽃힌 켄은 하라는 일은 안하고 게임만 하고 돌아다녔다던가... 매장에서 줄창 'THEXDER'만 붙잡고 있다가 직원이 눈치를 보이면 나가서 다른 매장에 가서는 또 'THEXDER'를 붙잡고 있기를 반복했다네요.

켄의 귀국길에는 '연구용'으로 구입한 PC-8801과 'THEXDER'를 비롯한 몇몇 게임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물건 팔러 갔는데 소비만 하고 왔다는...ㅎㅎ
사장님이 구입해온 일본 게임들은 시에라 사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그것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올 정도가 되자 사장님은 금지령을 내리고 88을 지하실에 봉인했다고 합니다.
사원들에게 인기폭발이었으니 일반 소비자에게도 먹히겠죠. 시에라는 'THEXDER'를 시작으로, '실피드' '젤리아드' 등을 연달아 미국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일본 게임들을 계속 취급하면서 시에라는 자기네들이 만드는 게임이 거기에 비해 심하게 쳐진다고 느끼게 됩니다. 8비트의 세상이었으니 당시 미국의 주력기종이던 코모도어 64나 애플II에 맞춰서 미국 게임들이 전반적으로 일본 컴퓨터 게임에 비하면 겉보기의 화려함에서는 뒤쳐지고 있었습니다(게임 내용쪽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다릅니다만...ㅎㅎ)

사실 당시 미국의 16비트 하드웨어는 8비트와는 사정이 달라서 아미가, 아타리 ST, 애플IIGS등 일본 컴퓨터들은 쨉이 안되는 막강한 그래픽/사운드를 자랑하는 기종들이 나와있었던 상태이지만 이쪽은 8비트에 비하면 시장이 작아서 아직 그렇게 활성화되어있지 않았죠. 시에라는 '킹스 퀘스트'에서부터 게임 개발은 16비트 IBM PC로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래픽 해상도는 160x200이었고(당시 일본 게임들 해상도는 640X200) 사운드는 최고 옵션이 PSG 3화음... 16비트에서 제작했지만 게임이 8비트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8비트 기종으로 이식판이 나오기도 했죠.

16비트 기종들 중에서는 시에라는 애플IIGS를 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나온 시에라 게임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결정판은 늘 GS버전이었죠. 문제는 이게 16비트 중에서도 제일 마이너였다는거(그래서 현재에도 GS의 에뮬레이션은 다른 기종들에 비해 좀 부진합니다. 쓰는 사람이 많았어야 그만큼 에뮬 제작도 활발해지는데...) 심지어 애플 회사에서도 버린 자식 취급이란 소문이 있을 정도고... 거의 대부분의 게임회사들이 (8비트 애플로만 게임을 내고) GS를 외면했습니다. 시에라 혼자 적극적이었죠.

이유는 모르겠는데 시에라는 이상할 정도로 GS에만 집착을 보였습니다. 성능만 따지면 아미가나 ST가 더 뛰어난 데도 시에라는 그 기종들로는 그냥 구색으로 내주는 정도로... 해당 하드웨어의 우월한 성능을 제대로 살리지 않고 딱 IBM 버전을 그대로 때려박은 정도로만 냈습니다. GS 버전만 눈에 띄는 그래픽과 사운드의 업그레이드가 있었죠.

일본을 능가하는 시청각적으로 화려한 게임을 만들자니 8비트로는 안되겠고, GS는 시장이 너무 작고,  IBM PC로 가기로합니다. 문제는 IBM PC를 게임용으로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 애초에 IBM PC는 게임할만한 물건이 아니었다는 거. 당시 IBM PC는 8비트 보다 더 답없는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확장성은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었죠. 하드웨어의 기본 성능이 미천하더라도 그걸 보충할만한 옵션 장비를 장착하면 됩니다.
시에라는 16비트 전용에 당시로서는 살짝 고사양에 맞춘 새로운 게임 엔진을 만듭니다. SCI라는 이 새 엔진은 드라이버를 추가/변경해서 여러가지 옵션 장비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GS는 CPU 속도가 저질이라... SCI를 돌릴 수 없었기 땜에 시에라는 GS를 버립니다.

마침 87년부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이전까지 완전 불모지대였던 IBM PC의 사운드에 갑작스런 옵션의 쓰나미가 몰아칩니다. MT-32 미디 모듈, IBM의 뮤직 카드, 애드립, CMS, 코복스 등등이 그해에 줄줄이 등장합니다. 그중에 시에라가 꽃힌건 제일 비싼 장비였던 MT-32였습니다. 어쩌면 'THEXDER'의 IBM 버전을 만들어보고는 정말정말 답이 안나오는 IBM 사운드 때문에 그 반동으로 최상의 장비를 택하게된 건지도...ㅎㅎ 사실 MT-32는 컴퓨터에 달아서 쓸 수는 있어도 게임하고는 관계가 없는 악기였는데... 시에라가 전자 악기를 게임 장비로 바꾼거죠.

시에라가 제작한, 세계 최초로 미디를 지원한 IBM PC 게임은 1988년 하반기에 선보인 '킹스 퀘스트 4'였습니다. 이왕에 전문 음악 장비인 미디 모듈을 쓰는 김에 시에라는 헐리우드 작곡가인 윌리엄 골드스틴('페임' TV 시리즈의 작곡가)을 섭외해 음악을 맡겼습니다. 골드스틴은 본업에도 미디를 적극 활용하던 사람이므로(흥미롭게도, '페임' 시리즈 중에 미디를 사용해 음악을 하는 학생과 그걸 고깝게 보는 교수의 이야기가 나왔던 듯...) 'kq4'는 영화음악과도 별 차이없는 사운드트랙을 선보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그때까지의 게임 음악과는 다른, 한차원 올라가는 도약이었죠.

MT-32 뿐 아니라, 시에라는 당시에 IBM에서 쓸 수 있던 거의 모든 사운드 옵션을 다 지원했습니다. 데이터는 MT-32용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다른 옵션들은 드라이버를 통해 변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장비들(애드립이라든가...)에서는 그쪽 전용으로 만든 음악이 아니라 어쩔수 없는 열화가 발생했지만, 내장 스피커의 삑삑거리는 소리만 듣던 사람들한테는 그것까지도 환상적이었죠.

그런데 정작 문제는, 헐리우드 작곡가를 기용해서 영화음악과 같은 수준의 사운드를 만들었으면 뭐해요. 사람들이 PC 내장 스피커만 쓰고있는데...
시에라는 사운드 옵션 장비를 보급해야한다는 짐까지 떠맡았습니다. 각종 사운드 카드가 내는 음악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뿌리는 등 홍보자료를 내고, MT-32, 애드립, CMS 사운드 카드 등을 자기들이 직접 팔았습니다. CMS라는 이름이 밋밋하다고 게임 블래스터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시에라라고 해요.(CMS의 후속작이 사운드 블래스터)

그치만 그렇게 크게 효과가 있지는 않았던 듯 해요. 사운드 카드가 본격적으로 보급이 되기 시작한 건 90년대부터였으니까...
사운드 카드 없어도 게임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는 거고, 있으면 물론 더 좋기야 하겠지만, 사람들이 그걸 체감하질 못했어요. 게임 사운드는 그냥 삐용삐용하는게 상식이던 시대에 갑자기 영화음악 수준의 음악을 들이댄다고 해도 그것땜에 굳이 그 비싼 걸 살 필요가 있냐 싶겠죠. 맨날 티비로만 영화보는 사람한테 아이맥스의 장점을 아무리 설파해도 몇만원 주고 극장 가지는 않는 것처럼...

일반 소비자에게 어필하는건 실패했을지라도 게임 제작자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화려한 미디 음악을 자랑하는 시에라의 SCI 게임들이 계속 나오는 걸 본 다른 회사들도 MT-32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몇년 지나지 않아 어지간한 메이저 제작사들은 미디를 기본으로 지원하게 됩니다.

시에라는 드디어 일본에 진출합니다. 성공하지는 못했어요. 미국에서는 그렇게 잘나갔던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 시에라는 내내 찬밥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그동네 스타일의 어드벤처가 자리잡은 뒤라서 (미국 표준이었던) 시에라 스타일의 게임이 전혀 먹히질 않았죠. 그렇지만 89년 시에라의 '폴리스 퀘스트 2' 일본판이 출시되었고, 이게 일본에서 나온 첫 미디 지원 게임이라는가 봐요.


시에라는 90년 '킹스 퀘스트 5'에서부터 VGA를 지원하기 시작해 다시 한번 컴퓨터 게임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KQ4'가 "이게 과연 컴퓨터 게임에서 나올 수 있는 음악인가..."하고 사람들에게 쇼크를 먹였다면 'kq5'는 "이게 과연 컴퓨터에서 나올수 있는 그림인가..." 싶은, 보는 사람의 눈을 의심하게 만들 그래픽을 선보였습니다.(시에라의 자체 능력이었다기 보다는 VGA 그래픽으로 정평이 나있던 다이나믹스를 합병한 결과라고 합니다. 88년에 사운드쪽에만 혁신을 일으켰던 건 아마도 그때는 시에라가 VGA를 활용할 능력이 없어서였던듯...?)

'kq5'(와 오리진의 '윙코맨더')의 쇼크로 인해 너도나도 VGA를 구입하게 되었고 내친김에 사운드 카드도 삽니다(미디 모듈은 아니고 가격도 싸고 성능도 떨어지는 애드립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단기간에 VGA와 사운드카드는 IBM PC의 표준장비가 되다시피했고 게임회사들이 거기에 맞춰서 게임을 만들게 되면서 드디어, IBM PC는 아미가, 아타리 ST를 다 도태시켜버리고 유일한 게임 컴퓨터로 우뚝서게 됩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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