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네거트 읽는 여자, 그 표현을 듣고 저는 바로 하루키를 떠올렸습니다.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이나 수필에서 종종 언급하는 작가들이 있죠.

레이몬드 카버, 커트 보네거트, 트루만 카포티 정도가 일단 떠오르네요.

 

우리나라 독서 시장에서 하루키의 영향력은 대단하죠.

제가 지난해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압도적으로 많이 본 소설이 하루키의 '1Q84'였습니다.

대부분 칙릿 소설에 나올 법한 젊은 여성들이 보고 있었죠.

 

제가 보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밈(문화복제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키의 글에 나온 문화요소들이 읽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퍼져가겠죠.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이런저런 음식이나 음악은 물론이고 종종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라고 언급되는 작가들.

제가 마지막으로 읽은 하루키 소설이 '해변의 카프카'인데...

베토벤의 대공트리오 하나는 머릿속에 콱 박혀 있습니다.

 

종종 인터넷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로 꼽는 사람을 보면 하루키가 떠오릅니다.

이 소설은 하루키가 무척 좋아하는 소설로 알고 있거든요.

이상하다,  '위대한 개츠비'가 뜬금없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까, 어느 날 10초 정도 생각해보니까 대충 짐작이 가더라구요.

 

레이몬드 카버도 있죠.

좋은 작가지만 하루키가 아니었으면 지금만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이몬드 카버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게 90년대 중반으로 알고 있는데 옮긴이의 말에 이 책이 출간되는 것은 하루키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저도 덕분에 카버를 알게 됐죠.

이처럼 단지 하루키가 좋아하는 소설가라는 이유로 레이몬드 카버 소설이 하루키의 해설과 함께 소개될 정도니 하루키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다고 봅니다.

 

또 한 가지, 하루키 소설 흉내내기는 90년대에나 유행하는 줄 알았는데

얼마전 황정은이라는 젊은 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도 있어요.

이건 뭐 일부러 하루키 문체를 연구하고 썼나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라서 한숨이 나왔는데 문단에서는 평이 아주 좋더라구요.

이 사람들이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가 아니면 하루키 소설도 안 읽어봤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잘은 모르지만 커트 보네거트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어느 정도 하루키 덕분 아닐까 싶어요.

'커트 보네거트 읽는 여자'에 담긴 의미는

'하루키가 언급한 바로 그 작가의 소설을 읽을 정도의 수준 있는 여자' 뭐 이정도 아닐까요?

체 게바라가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체 게바라 프린트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위의 문구를 읽는 사람이 하루키와 커트 보네거트의 연관성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이미 어떤 이미지를 획득한 거라고 봐요.

모두가 아는 '톨스토이를 읽는 여자'보다는 '커트 보네거트...' 쪽이 일종의 차별성을 가진다고나 할까.

아는 사람은 안다, 뭐 그런 우월감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것일 수도 있구요.

어쨌거나 이 문구를 생각한 사람은 좀 낯간지러운 구석이 있어요.

 

 

게시판에 올라온 커트 보네거트 얘기를 보고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하루키 얘기를 좀 하자면, 저는 하루키가 어떤 작가인지 잘 모르겠어요.

일단 소설은 읽는 재미가 있으니까 거의 다 읽었는데 뭔가 깊이 공감해본 적은 없어요.

딱 하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이 소설은 하루키 소설 중에서도 가장 알아듣기 쉽게 써서 그런지 '상실의 시대'보다 더 잘 썼다고 생각하고 또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언젠가 문학지에서 같은 일본작가인 시마다 마사히코와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초기작들에서는 굉장히 뛰어난 재능을 느낄 수 있는 소설가였죠...)

이 사람이 하루키에 대한 얘기를 하더라구요.

하루키의 소설은 마치 일본의 천황제와 같다고 말이죠.

그러니까, 알맹이는 없으면서 그냥 어정쩡하고 모호하게 남아 있는 뭐 그런 거라는 의미로 얘기하더군요.

 

제 생각도 그와 비슷합니다.

얼핏 보면 안개 속에 뭔가 커다란 것이 감춰져 있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게 바늘 하나에도 터지는 커다란 풍선 같은 것이라서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하루키가 '내 소설과도 같은 게 바로 인생이야' 라고 말한다면 '어, 그건 맞아요' 라고 대답할 것 같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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