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각잡고 뭘 쓰는 게 좀 피곤해져서 주절주절 떠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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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재미있다, 웃기다, 슬프다,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많지만 어라라...? 하면서 흥미를 느낀 건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어떤 작품들은 현실에서의 탈출구를 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계속 넘나드는 통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보면서 어느 순간 현실을 목도하고 실감하며, 현실과 픽션이 자꾸 겹쳐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매혹적인 작품이었습니다.


- 세상이 멸망했습니다. 법도 없고 군대나 경찰도 없고 이전처럼 물건을 사고 파는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산 중 하나인 "집"도 당연히 그걸 본인이 소유하고 지키는 원칙 자체가 무너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이 집을 지키는 논리는 대규모 재난 이전의 논리를 그대로 끌고 옵니다. 이 아파트는 내가 돈 주고 산 아파트다, 그러니까 이 아파트의 한 호수를 내가 독점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하나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이 부분에서 이 영화는 엄청나게 흥미로워집니다. 한국사람들이 아파트에 대해 갖는 열망과 집착이 얼마나 강렬한지 세상이 망해도 아파트의 소유권만큼은 절대로 내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 감정을 걷어내보면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원칙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와 그 자본주의가 바탕으로 하는 사회질서의 근간이 아예 무너졌잖아요. 자본주의는 화폐가 가치있다는 전제로 돌아가는 시스템이지만 영화 속 세상에서는 화폐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집은 내가 돈주고 산 거임! 이라는 논리가 무용지물입니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영화에서 자동차를 두고 아무도 그런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차를 사려고 얼마나 쎄빠지게 돈을 모았고 이 차에 얼마나 애정을 들였는지 아느냐!! 아무리 울부짖어도 그딴 논리는 이 영화 속 사람들에게나 영화 바깥 속 사람들에게나 절대 통용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망했는데 망하기 이전의 세상 규칙을 왜 떠들고 있냐면서 그 나이브함을 비웃겠죠. 그런데 아파트라는 개인 자산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영화 속과 바깥 사람들 모두가 자본주의적 독점의 권리를 순식간에 납득하고 맙니다. 이것은 논리나 원칙이 아니라 다수의 감정적인 합의에 불과하죠. 아파트를 내가 내 돈 주고 샀으니 공유할 수 없다는 이 논리는 언제라도 외부인들이 부숴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황궁아파트 입주민들도 슈퍼를 약탈하잖아요? 


- 그럼에도 이 논리를 초월한 황궁 아파트 입주민들의 독점과 단결의 원리는 영화 내부와 외부의 사람들 모두를 납득시키고 맙니다. 자본주의의 논리가 완전히 무용해지기 전인 비교적 초반이라는 시간적 타이밍도 있겠지만, (영화에서는 이미 화폐가 가치를 잃었죠) 아파트만큼은 절대 내놓을 수 없다는 이 독특한 소유권이 합의를 얻습니다. 내가 살 집을 얻기위해 쏟아부은 시간과 자본주의적 노력이 이 신세계의 도래에도 끄떡없이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집은 그냥 주거공간이 아니니까요. 편의를 위한 의식주 중 하나가 아니라, 이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혹독한 절약을 하고 수없는 투자 공부를 하고 집값 변동에 대한 귀동냥을 해가면서 한 개인이 자본주의적으로 축적한 소득의 거의 전부를 투자한 무엇이니까요.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갈아넣어진, 원념의 결정체 같은 것입니다. 한국판 은전 한닙을 조금 더 큰 단위의 것으로 보는 거죠. 물론 실용성 측면에서 실거주용 집과 은전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만...


- 1층에서 누가 칼에 찔리고 그 집에 불이 납니다. 주민회의가 열리고 거기서 임시주민대표가 뽑히며 아파트 거주민들이 아닌 사람들을 전부 다 내보내기로 결정됩니다. 이 계기가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이 재난이 터지자 그 때 다 모이자고 하지 않습니다. 이 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가 아니라 이 집을 누군가에게 뺏길지도 모른다, 는 위기감에 사람들을 하나로 모읍니다. 이 아파트 주민회의의 본질은 애초에 독점이 목적인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자꾸 이 영화를 디스토피아 장르로 놓고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는 효율적으로 타인들을 배제해야한다고 하는데, 각 디스토피아물도 그 안의 지배적인 세계관이나 작동원리가 다 제각각입니다. 그리고 그 디스토피아물을 어떤 식으로 해석할 것이냐에 따라 자신이 어떤 원칙에 찬성하거나 세계관으로 살고 있는지를 공개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이야기는 사실 생존의 논리가 아닙니다. 입주민 회의에서 계속해서 자기가 얼마나 고생해서 이 집에 들어왔는지를 이야기하며, 그런 자기 집에서 남들이 거주하는 게 불쾌하다는 논리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죠. 우리가 고생해서 누리는 권리를 남들이 누리는 게 싫다는, 차별의 논리입니다. 따져봅시다. 정말로 안전을 따질 거라면 이 아파트의 입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전부 다 쫓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안전에 해를 끼칠 염려가 적은 노인들이나 각 입주민들의 가족은 내버려두면 되는 일입니다. 식량 지급이야 사람 수가 아닌 각 호수로 할테니 그건 알아서 데리고 있는 입주민들이 감당하라고 하면 되구요. 


- 이 전에 정성일 평론가가 멕시코 영화 [뉴 오더]를 해설하기 전에 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영화를 우화로 볼 것인지, 근미래 SF로 볼 것인지에 따라 감상이 꽤나 달라질 것이라고요. 저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도 마찬가지의 감상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렇게 되어야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움직일 것인데 이 영화는 그 부분에서 부정확하다고 말하는 평들이 있는데, 이 영화를 우화로 보면 그 감상도 좀 달라질 수 있겠죠. 아파트 하나만 멀쩡히 버티고 있으면 사방에서 이 아파트로 몰려들어서 입주민 회의고 뭐고 아수라장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영화는 우화적으로도 충분히 기능합니다. 아파트를 국가로 놓고 그 국가에서 외부인들을 어떻게 내부인이 대하는지 비유한 이야기로 본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또 다른 즐거움이겠죠. 


- 김영탁, 사실은 모세범인 이 캐릭터의 존재는 이 영화의 아파트 입주민 중심주의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줍니다. 아파트 입주민이 아닌 사람은 황궁아파트에서 나가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파트 입주민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폭력적 위험분자들이니까요. 그 위험을 그대로 증명한 게 바로 모세범입니다. 아파트 입주민이 아닌 사람이, 아파트 입주민을 살해하고 집을 빼앗은 거죠. 이미 위험한 짓을 저지른, 제일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파트 입주민들은 이 사람의 실체를 구분못합니다. 여기서부터 황궁아파트의 입주민들의 논리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집니다. 단순히 영화 내적으로만 봐도 입주민 사이에서 제일 위험한 건 모세범입니다. 한번 한 짓을 두번이라고 못하겠습니까? 스토리가 전개될 수록 이 사람의 폭력은 가차없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입주민을 죽여버립니다.


- 그런데 사람들은 의외로 모세범과 그를 포함한 황궁아파트 입주민들에 대해 말을 안합니다. 박보영의 명화만을 이야기하죠. 이 영화 속 황궁아파트 입주민들의 내적 논리가 얼마나 부실한지, 명화가 어떻게 내부의 위험을 발견하고 고발했는지는 그 효과는 말을 안합니다. 이 영화에서 우화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살려면 무슨 짓이든 해도 되고 거짓말이든 거짓말로 정치를 하든 다 상관없다고 해버립니다. 관객들은 명화만을 가치판단합니다. 이 부분에서 엄태화는 한국 관객들의 도덕성을 과대평가한거죠. 지극히 평범한 악과 선을 대치시켰을 때 악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우리와 이 사람은 얼마나 다른가? 를 질문하면 관객들은 그 드라마에 휩쓸려 질문을 포기해버립니다. 황궁아파트 입주민들이 가장 대원칙으로 내세우는 정체성인 "입주민"도 아니고, 거기서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는 "외부인의 입주민 살해"를 저질렀음에도 사람들은 소름돋아하지 않습니다. 살려고 그랬겠지, 하고 넘어갑니다. 


- 우화적 영화를 필요한 경우에는 SF로만 읽으면서 가치판단을 뛰어넘어버리는 것을 볼 때 어쩌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창작자의 숙제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범한 악을 열심히 묘사하면 사람들은 금새 거기에 쏠려버립니다. 그리고 평범한 선을 너무 단순하게 묘사하면 관객들은 그에 흥미를 잃죠. 누군가를 반드시 희생시켜야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거짓말이며 때로는 자신들을 향한 거짓말인지 영화는 선의 입장을 조금 더 묘사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 그럼에도 상당히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아직 쓰지 못한 게 많지만 영화 시간이 머지 않았으니 전 2차를 뛰러 ㄱ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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