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I의 골드박스 게임들

2023.08.14 18:06

돌도끼 조회 수:183

7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던전 앤 드래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여러명이 모여서 각각 역할 정하고 주사위 굴려서 하는 게임입니다. 여기서 다른 애들 역할을 컴퓨터한테 맡기고 혼자서 하는 디앤디를 구현해낸 것이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
80년대가 되면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맞물려 컴퓨터 RPG 시장이 크게 성장합니다. 그런 성장을 지켜본 디앤디의 개발사 TSR은 컴퓨터 게임쪽에 진출할 것을 선언합니다.
RPG의 원조가 직접 컴퓨터 게임을 내겠다니, 팬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수 없죠.
여러 게임 회사가 입찰한 끝에 87년, TSR의 컴퓨터 사업 파트너로 SSI가 선정됩니다.

꽤나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SSI가 RPG를 안만들어본 건 아니지만, RPG쪽으로 딱히 이름이난 회사는 아니었거든요. 그시기에 컴퓨터 RPG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울티마'의 오리진, '위자드리'의 서텍, 그외에 '바즈 테일'의 인터플레이(당시는 EA 소속) 등등 RPG로 이름을 날리던 명제작사들을 제끼고, 회사이름(Strategic Simulation) 그대로 전략/전쟁 게임 전문이던 SSI가 공식 디앤디 파트너가 된 거니까요.(잡지에서 기사를 봤을 때 저까지도 엉?하는 소리가 나왔더랬어요ㅎㅎ)
근데 뭐 애초에 디앤디가 전략게임의 일부 시스템을 변형해서 만들어진 거였다고 하니까 SSI가 디앤디 게임을 맡게 되는게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ㅎㅎ

SSI는 1988년 첫번째 공식 디앤디 라이센스 게임인 'Pool of Radiance'를 발표합니다.
그때까지 나온 컴퓨터 RPG는 디앤디의 요소들을 이리저리 가져다 쓰면서도 저작권에 걸리지 않기 위해 요래저래 변형을 시켜서 등장시켰지만 'pool'은 디엔디에서 당시 막 새로 등장했던 세계관인 포가튼 렐름을 바탕으로 해서 거침없이 디엔디의 시스템과 고유명사와 캐릭터들을 썼습니다. 평가도 꽤나 좋았던 편이어서 이 시리즈는 4편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pool'에서 사용한 게임 엔진을 92년이 될때까지 마이너 업그레이드 정도만 시키고 계속 우려먹으면서 10여편의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이 게임들 대부분이 금색(진짜 번쩍거리는 금색은 아니고 그냥 누리끼리한 색) 테두리의 박스로 출시되었기 땜에 통틀어서 '골드박스'라고 부릅니다.

첫번째 게임이 88년에 나왔으니 당시의 메인 기종은 8비트 코모도어 64였고, 그래서 게임이 8비트 시절 RPG의 형태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기반의 턴제이고 게임진행은 단축키로 이뤄집니다. 그래픽은 심심하지 말라고 붙여놓은 삽화 수준이고 마우스는 쓰면 오히려 불편합니다.

대륙맵에서 아이콘 형태로 이동하다가 마을에 도착하면 확대되어 1인칭 시점으로 돌아다니게 되고 마을마다 1개 이상의 던전이 있어 게임의 대부분은 던전크롤링으로 진행됩니다.
던전에서 돌아다니다 전투가 발생하면 그때부터는 SSI의 장기를 살려 전략게임 형태의 전투를 하게됩니다. 어찌보면 일본의 SRPG와 비슷한 것도 같은데 SRPG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던전과 마을 사이를 돌아댕기는 도중에 이런저런 이벤트와 스토리가 진행됩니다. 스토리는 1직선은 아니고 여러가지 미션을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하다보면 대강 이야기가 이어지는 식입니다.
시스템이 다 똑같아서 하나만 해보면 다른 것들은 굳이 매뉴얼을 보지 않아도 할 수 있을 정도... 단, 후기작들은 여러가지 편의사항이 추가되었으므로 후기작 먼저한 사람이 전기작을 나중에 하면 애로가 꽃핍니다.

골드박스 게임들은 전반적으로 미국에서는 꽤 잘나갔던 편입니다. 하지만 디앤디 공식 게임이란 건 바꿔말하면 디앤디를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안먹히는 게임이라는 소리... 미국과 달리 디앤디 팬이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는 완전 찬밥신세였습니다. 동서에서 초기작들 몇개 말고는 거의 다 출시해준 편이지만 거의 무반응...


국내에서는 일부 RPG 팬들이 '디앤디가 RPG의 원조다'라는 사실만 피상적으로 알고있었던 정도... 그 디앤디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실제로 본 사람도 거의 없었죠.
(전 외국에서 살다온 친구가 있어서 걔네 집에서 몇번 해보긴 했었는데 솔직히 뭐가 재미있는 지 모르겠더라구요.ㅎㅎ)
지금 현재까지도 울나라에서 디앤디하면 캡콤의 오락실 게임이 제일 먼저 떠오를 정도고 대중적 인지도는 바닥이죠. 혹시 성공했더라면 디앤디의 인지도를 올려주었을지도 모르는 영화도 조용히 내려갔으니 뭐...
일단 캐릭터 만들기부터 복잡해서 게임 시작하는 준비과정만 몇십분이 걸리는 등 장벽이 있는데다, 골드박스 게임들의 그래픽과 사운드는 90년대에 IBM 계열에서 막 VGA 그래픽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의 다른 게임들이 비하면 구립니다. 게다가 그래픽 데이터를 계속 돌려가면서 써서 스샷만 보면 어떤게임이 어떤 게임인지 구별도 안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눈길을 끌기도 어려웠겠죠.




골드박스 게임들은 처음엔 코모도어 64용으로 출시되었다 8비트 시대가 막을 내린후 IBM PC가 메인 기종이 됩니다. 초기엔 EGA에 PC 스피커까지만 지원하다 점점 지원하는 그래픽과 사운드 범위를 늘려갑니다. 아미가 버전은 IBM보다는 약간 더 나아진 모습을 보였고, 일본에도 몇몇 게임이 PC-9801용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일본어판은 IBM 버전보다는 고해상도 그래픽을 선보이지만 일반적인 일본산 게임들에 비하면 그래픽이 많이 구린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평생 살면서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컴퓨터 게임이 골드박스 중에 '드래곤랜스-크린' 시리즈였기 때문에 골드박스에 대한 나름의 애착이 있습니다. 그치만 지금 시작하라고 하면 못합니다ㅎㅎ


SSI에서 낸 디앤디 라이센스 게임이 전부다 골드박스였던 건 아니고('주시자의 눈' 같은건 테두리가 검은색) 92년경부터는 지나치게 낡은 골드박스 엔진을 버리고 새로운 엔진과 좀 더 그럴듯한 그래픽과 사운드를 장착한 게임들을 선보입니다. 그러다가 얼마후 계약이 끝나고, 그후 인터플레이에서 디앤디 라이센스를 얻어서 '발두르의 문'같은 히트작을 내면서 한동안 주춤했던 컴퓨터 RPG가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든가...(전 이시기쯤에 컴터 게임을 접어서 자세히는 모릅니다.)
아마 현재 캠콤 오락실 게임을 제외하면 디앤디 계열중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게 그 '발더스 게이트' 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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