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와 함께한 세벤 여행'(1879)

2023.08.12 20:47

thoma 조회 수:146

처음 만나 서로가 낯선 당나귀와 스티븐슨. 

둘은 12일 동안 산골 마을들과 숲을 지나고 개울 건너 계곡을 오르내리는 산악지대 도보여행을 동행하게 됩니다.  

'이 녀석에게는 단정하고 기품 있고 퀘이커 교도처럼 우아한 무엇인가가 있어서 즉시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라고 첫인상을 쓴 스티븐슨은 만나자마자 이 암탕나귀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모데스틴이란 이름을 지어줍니다. 하지만 작가에게 당나귀를 길들이기 위한 사전 지식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짐꾼으로 태어났으니(그럴리가..) 그저 짐을 실으면 묵묵히 기품 있게 자기 짐을 감당하며 (자동적으로)앞으로 나아갈 줄 알았던 거 같습니다. 

모데스틴은 첫 비탈길에서 굼뜨기 시작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느린 움직임으로 속을 터지게 합니다. 지나가던 농부가 보더니 나뭇가지로 회초리를 만들어 건네며 다루는 말(프룻)도 한 수 가르쳐 줍니다. 이게 먹혀서 한동안 꽤 잘 걷다가 긴 언덕길에서 다시 퍼져 암만 어르고 밀며 프룻프룻 소릴 질러도 느릿느릿 느려터졌네요. 마음 아픈 회초리질을 계속 해야 겨우 전진. 이제 작가의 회초리 휘두르는 팔이 치통처럼 아파옵니다. 설상가상으로 당나귀에 묶은 짐이 풀려 살림살이 일체가 다 먼지구덩이에 쏟아집니다. 울고 싶어진 작가는 대신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몇 가지 소유물을 버리고(애초에 달걀 거품기는 왜 가져왔을까요 ㅎㅎ) 다시 짐을 싸서 나귀에 묶습니다. 이후로 한 번 더 짐은 풀리고...음 지치고 고생스러웠겠습니다. 그날 하루 묵게 된 여관에서 스티븐슨의 곤란을 알게 된 여관 주인이 몰이막대를 만들어 줍니다. 막대 끝에 짧은 핀이 달려 있어요. 이게 직방입니다. 이제 가볍게 모데스틴의 엉덩이를 찌르면 좌우도 안 보고 종종걸음으로 내뺍니다. 스티븐슨은 더이상 아픈 팔을 휘두르며 회초리질을 안 해도 됩니다. 모데스틴의 쥐색 엉덩이에 이따금 피가 한 방울씩 난들, 뭐 대수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전날 이 당나귀를 모느라 너무 고생을 한 탓에 동정심 자체가 사라진 것이에요. 


이것이 여행 이틀만에 일어난 일이고 우리의 첫인상은 이렇게 믿을 수 없는 것임을 또다시 배웁니다. 모데스틴과의 관계 정립이 된 이후로 이 작은 책의 재미는 급격히 떨어집니다. 작가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방문객으로 하루 머물며 수도사나 다른 방문객과 종교 얘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여행 후반은 카미자르 전쟁이 벌어진 지역을 지나는데 아마도 스티븐슨이 이 코스를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나 짐작을 합니다. 카미자르 전쟁은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대립으로 인한 전쟁인데 꽤 많은 분량으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한 유적지 답사의 느낌을 주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주류의 탄압에 저항한 소수 종교가 이 지역에서 명맥을 잇고 있음을 사람들을 만나 확인하기도 하고요. 스티븐슨이 신교도로서 이런 점들이 자신에게 매우 의미있는 확인임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숲의 빈터에서 아름다운 별무리와 솔바람 속에 잠드는 행복감을 표현한들, 아름다운 자연 묘사를 길게 해도, 종교적인 자부심 표현에 귀를 기울이려 해 봐도 모데스틴과의 상호작용 얘기가 나오지 않는 나머지 부분들에는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체 240페이지 중 앞 부분 50페이지만 위에 길게 요약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실제 책에 대한 소개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매우 용두사미의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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