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이대>, <소나기>, <운수 좋은 날>, <감자> 같은, 

 중고등학생들이 필수로 읽는 한국소설들에 대해서는 기묘한 감정을 갖습니다. 

 아버지가 국어교사셨거든요. 그리고 아버지의 방침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중학생용 도서를 가급적 읽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컴퓨터가 흔하지 않았는데, 

 제가 유치원 다닐 적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아버지는

 학교 국어시험지를 집에서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했어요. 

 키보드를 치면 화면에 글자가 뜨는 게 너무 신기해서 해보게 해달라고 졸랐었는데, 

 그래서 국어시험지의 지문을 타이핑하는 게 가끔 제 몫으로 떨어졌어요.


 신기한 기계 앞에서,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지문들을 두 손가락으로 조심조심 입력해 보면서 

 <수난이대>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물을 건너는 장면이나 

 <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가 우는 장면들, <메밀꽃 필 무렵>의 흐뭇한 달빛 장면들을 

 아주 열심히 읽었어요. 물론 아버지는, 아직 너는 동화책을 읽을 나이라며 절대 전문을 읽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 장면들은 그 후로도 수년간 제가 흐릿하게 이해하는 딱 하나의 장면으로만 기억했지요.  


 어린시절이 낳은 것들 중 낭독에 관한 애호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어린 우리를 불러와 어떤 한 구절을 읽어주곤 했는데 그런 시간들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알던 사람들 중 책을 낭독하는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으니

 아마 지금 제가 누구에게 책 읽어주는 걸 좋아하는 건 아버지에게서 온 습관이겠지요.

 (아련아련하게 들리지만 실상은 책을 읽다가 감상에 겨운 아버지가 -경상도 사투리로- "야 임마 이놈들 일로 와봐라!

 느그들 이거 들어야 한다, 와~ 이런 걸 읽으면 가슴이 벅! 차! 올라야 하지 않나?

 임마들 어 읽어줄때 어서 와서 단디 들으라!" 하는 게 귀에 생생하네요-_-)  

 

 그러나 살면서 낭독할 기회는 별로 없습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굳이 제 낭독을 듣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하, <더 리더>에서처럼 애인에게 읽어주면 되겠네요, 그런데 애인이 없습니다 안생겨요.  

 제 아버지도 낭독의 갈증으로 시험지에 일부러 오타를 내고 

 방송실에서 정정방송을 하는 방식으로 낭독했다고 술회합니다. 

 


 아버지는 한국시를 전공했고 저는 영국시를 전공하지요. 

 우리의 대학생활에는 제 나이만큼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서재에서 간혹 절판된 그러나 갖고 싶은 책들을 발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들의 오래된 판본들이 아버지 서재에 들어 있기도 하지요. 

 대학에 와서 제가 여백에 뭔가를 메모해가며 "공부"했던 책들의 이십 년 전 초판본을 발견해서

 펼쳐보면 그 여백에 꼭 저처럼, 그러나 다른 부분들에 밑줄과 메모를 쳐가며 "공부"했던 아버지의 흔적이 묘해요. 

 제가 가진 클리언스 브룩스나 김현의 책들 같은 건 아버지 서재에서 훔쳐온 책들이지요. 


 오랫동안 아버지 서재 같은 서재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제 아버지는 학술에 종사하는 사람도 대단한 장서가도 작가도 아닌,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평범한 책들이었어요. 아버지가 좋아했던 책들, 정기구독했던 문예지들과 

 한국소설 전집들, 한켠에는 시드니 셀던이나 로빈 쿡 같은 대중소설들도 꽂혀 있고, 

 또 한켠에는 어머니가 젊을 때 읽었던 책들도 꽂혀 있지요. 

 

 그 중에는 나름대로 큰맘먹고 사들였을 <한국문학대계> 100권 시리즈나 <민족문화사전> 같은 것들도 있지만,

 그래도 작심하고 구색을 갖춘 것이 아니라, 취향이 분명하지만 사치를 않는 사람이

 오랜 세월 동안 한 권씩 천천히 구입한 책들로 구성된 평범한 서재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어린시절의 많은 부분을 그 서재를 여행하며 보냈습니다. 자랄수록 제가 읽도록 허락받은 책들은 점점 늘어났지요. 

 개중에는 만인의 애독서도 있고, 해당년도에 가장 많이 팔렸을 것 같은 책들도 있고 

 어린 눈으로 봐도 쫌 쓰레기같은 책들도 있었습니다만 어린나이에는 바벨의 도서관 같던 곳. 

 아버지는 시 독자였으니 저는 어릴 때부터 시집을 읽고 자랄 수 있었지요.

 아버지가 젊을 때 읽었을 게 분명한 어떤 책들에는 제가 본 적 없는 젊은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종종 나옵니다. 


 

 서울에 따로 살고 있는 저에게도 그런 식으로 모인 책들이 꽤 있는 편입니다. 

 제 방에 수용 가능한 최대한의 책꽂이를 놓고 있지만 책은 항상 책꽂이의 범위를 넘어서 고구마처럼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책들이 아니라면 (예: 실제로 씌어질지 잘 모르겠는 논문 준비용, 

 심장에서 너무 가까워서 멀리 보낼 수 없는 책들, 지금 쥐고 있지 않으면 다시는 못 구할 것 같은 책들, 

 옛 애인이 헌사써준책 등등) 읽고 처분하려는 편입니다. 중고로 팔거나 누구 주거나 기타등등.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서재 같은 "평범한 서재"를 가질 날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요. 

 대학을 졸업하고 곧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고 집을 가진 아버지와는 달리 

 전 대학을 졸업했지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년에 한 번씩 혼자 월세방을 이사다닐 겁니다. 

 기초밖에 없는 제 바벨의 도서관은 폐쇄적인 곳이예요. 저는 이미 질리도록 여행했고 

 달리 여기를 여행다닐 사람이 없지요. 와, 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예요. 

 제게 가족이 생기면 그 가족은 빈약한 도서관을 갖겠네요. 왠지 슬프고 아쉬운 일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무겁고 외로운 도서관을 가지고 다닐 순 없어요.  


 여행할 사람이 없으면 책이 여행하면 되겠네요. 책에는 날개도 달렸으니까. 

 그래도 밑줄이 가고 손때(및 각종오염)가 묻은 책들은 난감합니다. 이런 건 팔리지도 않고 팔기도 민망하지만

 여전히 좋은 책들이거든요. 더 이상 다시 읽혀지지 않을 제 책장에서 상해가게 만들자니 미안합니다.   

 

 책을 팔고 책이 팔려나간 자리에 또 책들을 채우는 일을 반복하면서 책의 권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들 사이에서 

 제가 가진 건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하는 책들과 가장 실용적인 책들만 남은 이상한 책장이 되어갑니다.  


 


 요 한두 주간 읽었거나 읽고 있는 책들은 듀나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로사 몬테로 <루시아, 거짓말의 기억>,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 보리스 비앙 <세월의 물거품> 이예요. 넷 모두 즐겁게 읽었거나 읽고 있습니다. 

 어떤 책들은 가까운 데 남고 어떤 책들은 팔려나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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