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마스터

2023.08.11 11:23

돌도끼 조회 수:128

1987년 FTL 게임즈에서 아타리 ST용으로 발표한 1인칭 시점 던전 크롤러 RPG입니다.

90년대 초중반까지의 3D 던전 크롤러 장르를 정의했다고 할 수 있고 수많은 아류작을 낳았으며 게임 업계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국내에서는 언급되는 일이 거의...라기 보다는 전혀 없다시피한 듣보신세인 게임입니다.

이 게임이 나왔던 당시에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은 '울티마'와 '위자드리' 둘이 나눠먹고 있던 때. 이 둘의 속편이 완성되기를 사람들이 기다리는 기간 동안에 잠시 다른 게임들('바즈 테일'이라거나 '마이트 앤 매직'이라거나)이 나와 존재감을 어필하는 그런 형편이었고, 하드웨어 환경은 8비트 컴퓨터의 세상이었습니다. 16비트 컴퓨터는 게임하기에는 너무 고급진 장비이던 시절... 그래서 대부분의 (미제)게임들은 하드웨어의 성능한계가 명확하다 보니 사실적이거나 화려한 그래픽, 사운드같은 건 딱히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울티마'와 '위자드리' 공히 4편까지 나와있었는데, 지금 보자면 이 두 시리즈는 1편에서 5편이 될 때까지(두 게임 다 '던전 마스터'가 나온 직후 무렵에 5편이 나왔던 것 같네요.) 외적으로 그렇게 두드러지는 변화가 없습니다.
컴퓨터 RPG의 그래픽은 추상적인 아이콘이라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울티마' 같은 필드를 돌아댕기는 게임들은 이동 화면에서 사람이나 山이나 크기가 비슷하고 돌아다니다 이벤트가 생기면 그때야 실제 사이즈로 확대되는 방식이 많았고, '위자드리' 타입은 배경에 줄 몇개만 그어놓고 대충 방향이나 짐작하라고 하는 식이었죠.
게임의 진행도 대개는 턴 방식의 텍스트 위주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대원 A님이 고블린 B놈의 면상에 죽빵을 날렸습니다. 대미지 150.-

 -고블린 B놈이 손톱으로 대원 C 님의 얼굴에 스크래치를 내려했으나 빗나갔습니다.-

이런식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구구절절하게 다 문장으로 알려주는게 대세였죠.

'던전 마스터'는 기본적으로 (그저그런 스토리와) 뛰어난 퍼즐, 그리고 극악한 난이도를 가진 완성도 높은 RPG라고 합니다만, 이 게임이 다른 RPG와 달랐던 핵심적인 부분은, 한창 8비트의 전성기에 나왔음에도 16비트 전용으로 발표되었다는 겁니다. 16비트 컴퓨터니 속도와 처리 용량면에서 8비트와는 비교가 안된다는 거야 말할 것도 없고, 16비트 컴퓨터들은 그래픽/사운드 처리 능력에서도 탁월한 성능을 갖고 있었습니다.(IBM PC만 빼고......)

바로 이 빠른 처리 속도와 탁월한 그래픽/사운드 성능을 살려서 (당시 기준으로) 최대한 실감나는 게임을 만든다는 게 '던전 마스터'의 디자인 철학입니다.
일단 게임 메인 화면이 (당시 기준으로) 시원스럽게 널찍합니다. 거기에 그래픽과 사운드도 (당시 기준으로) 아주 정교하고 실감납니다. 글자로 구구절절한 상황설명 같은 걸 하는 대신에 대부분의 상황을 애니메이션과 사운드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모두 (당시 기준으로) 실시간으로 벌어집니다.
'던전 마스터'는 플레이어가 진짜로 던전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당시 기준으로) 생생한 체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8비트 컴퓨터로는 불가능한 게임이었죠.

아니 뭐 글로 설명하자니 참 장황해지는데, 90년대에 컴퓨터로 게임 좀 해보신 분이면 실은 아주 익숙한 겁니다. '마이트 앤 매직 3~5' '주시자의 눈 1~3' '지혜의 땅' 이런 게임들 중 하나라도 해보셨으면, 딱 그런 형태의 게임입니다. 90년대초 던전 크롤러의 전형적인 모습.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게 뭐 대수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그런 게임이 한창 8비트 세상이던 80년대-울티마 4~5 나오던 시기에 나왔다는 거죠. 위에서 말한 90년대의 유명 게임들이 전부다 '던전 마스터'를 카피한 것들이란 겁니다.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 나온 것들이지만 그래픽이 더 컬러풀해진 것 말고는 두드러지게 더 발전되었다고 할만한 것도 없어요. 그중에서도 '주시자의 눈'은 대고 베낀 수준으로 비슷합니다.  그니까 뭐 1인칭 시점 던전 크롤러 장르에서 '던전 마스터'의 위치는 서바이벌 호러 장르에서 '어둠속에 나홀로', FPS에서 '둠'과 비슷한 정도라고 봐도 될거예요.


'울티마 언더월드'가 던전 크롤러를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키고 다들 다시 그 게임을 따라하게되기 전까지 나온 것들은 다 '던전 마스터'의 영향력 안에 있다고 봐도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닐겁니다. 그 '언더월드'도 기획 초기에 막혀서 진전이 없을 때에 '던전 마스터'에서 영감을 받아서 길이 열렸다는 듯하고요. 던전 크롤러 뿐 아니라 3D 시점으로 진행되는 게임들 전반에 꽤 영향을 미쳤다나봐요.

RPG 장르 자체의 시조인 '위자드리'와 '울티마'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원래부터 1인칭 던전크롤러의 시조인 '위자드리'는 6편에서는 후배에게서 받아들인 영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고, '울티마'는 6편부터 VGA와 각종 사운드카드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래픽과 사운드를 이용하게 되면서 1~5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입니다. 게임 진행도 더이상 이동 맵화면으로 따로 전환되는 일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화면 안에서 실제 스케일로 이뤄지고 게임 인터페이스도 '던전 마스터'의 아이콘/마우스 체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아예 리처드 개리엇이 개발진에게 '던전 마스터'를 참고하라고 지시를 했다는 듯...)

그러니까 '던전 마스터'는 플레이어들 뿐 아니라 개발자들한테도 충격적인 게임이었던 거죠. 8비트의 전성기 때 나왔지만 16비트의 성능을 활용하면 이런 이런 것들을 할수 있다는 걸 시연해 보여준 겁니다. 한창 8비트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그 충격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건 컴퓨팅 환경이 16비트로 넘어간 90년대부터이지만...



'던전 마스터'는 87년 연말 아타리 ST 전용으로 처음 발표되어서 아타리 ST 유저들 사이에서는 원톱, ST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이 됩니다. 그래봐야 ST 자체가 마이너 기종이었으니 아주 높은 수치는 아니예요. 이듬해에 조금더 시장이 큰 아미가로 이식되어서 거기서도 대박을 칩니다. 아타리와 아미가쪽에서는 높은 판매고와 함께 여러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고 이런 저런 상도 많이 받았지만... 그래픽/사운드 쪽으로 가면 8비트 보다 성능이 떨어지던 IBM PC 유저들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엤습니다.

결국 IBM PC가 VGA와 사운드 카드로 무장하고 '게임도 할수 있는' 컴퓨터가 되어서 16비트 시장을 통일해 버린 뒤에야 IBM 버전이 나오긴 했는데 그때가 무려 1992년!.... 이미 '던전 마스터'의 영향을 받은, 또는 카피한 게임들이 IBM 진영에도 줄줄이 나온 다음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나온지 이미 5년 이상 지난 게임이 이목을 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겠죠. (평론가들은 그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해볼만한 훌륭한 게임이라고 치켜세워줬습니다만...)

특히나, 미제 컴퓨터라곤 애플과 IBM 밖에 안써본 나라의 사람들한테는 그냥 미지의 게임으로 남았죠.

일본에서는 ST 버전이 처음 나왔을 당시부터 미국에서 아주 대단한 게임이 나왔다며 게임잡지 등에서 소개해 바람을 잡은데다 PC-9801등의 일본 컴퓨터로 이식되어 꽤 히트합니다. 그동네 특성대로, 만화책에 소설책으로도 나오고 일본 기종용의 독자 프리퀄 시퀄도 나오는등 해서 나름 인지도가 있는 편입니다.
공식 속편도 일본에서 먼저 나오고 몇년 있다가 미국에 출시되었습니다. 다만 이 속편은 북미쪽에는 너무 늦게(95년) 나오는 바람에 그렇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이 게임을 알게된 것도 게임이 나왔던 당시에 일본 컴퓨터 잡지에 소개된 걸 보고서였습니다. 뭐라뭐라 떠들어대는 게임의 장점들을 실감하지는 못했어도 그래픽은 끝내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한참 지나서 IBM에서 '주시자의 눈'을 봤을때 처음 든 생각이, '이거 '던전 마스터' 아냐?'
'주시자의 눈' 게임을 해보니 그때까지 했던 다른 RPG와는 몰입감의 차원이 달랐습니다. 오래전 봤던 게임 잡지의 '던전 마스터' 소개문구들을 그제서야 이해하게된듯... 그리곤 빠져서 한창 열심히 했고 뒤이어 비슷한 게임들을 몇개 해보고 난 다음에야 IBM 용으로 나온 '던전 마스터'를 드디어 실제로 보게되었는데... 이미 더 화려한 아류...후배 작품들을 해보고 난 뒤라 그닥 흥이 안나서 바로 접었더랬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도전해볼 생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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