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김경미 시인

2015.07.14 18:58

마르타. 조회 수:1826



다정에 바치네



당신이라는 수면 위
얇게 물수제비나 뜨는 지천의 돌조각이란 생각
성근 시침질에 실과 옷감이나 당겨 우는 치맛단이란 생각
물컵 속 반 넘게 무릎이나 꺾인 나무젓가락이란 생각
길게 미끄러져버린 검정 미역 줄기란 생각

그러다
봄 저녁에 듣는 간절한 한 마디
저 연보랏빛 산벚꽃
산벚꽃들 아래
언제고 언제까지고 또 만나자

온통 세상의 중심이게 하는








나는 좌절하는 것들이 좋다


함박눈 못 된 진눈깨비와
목련꽃 못 된 밥풀꽃과
오지 않는 전화와 깨진 적금.
나를 지나쳐 다른 주소로 가는
그대 편지

나는 좌절하는 자세가 좋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뿌리의 세계를 들여다본 것들
마치 하늘에 엎드려 굽어내려보는 신 같은









흉터


하루 종일 사진 필름처럼 세상 어둡고
몸 몹시 아프다
마음 아픈 것보다는 과분하지만
겨드랑이 체온계가 초콜릿처럼 녹아내리고
온 몸 혀처럼 붉어져
가는 봄비 따라 눈빛 자꾸 멀어진다 지금은
아침인가 저녁인가 나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빈 옷처럼 겨우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본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온갖 꽃들이 다 제 몸을 뚫고 나와 눈부시다
나무들은 그렇게 제 흉터로 꽃을
내지 제 이름을 만들지
내 안의 무엇 꽃이 되고파 온몸을 가득
이렇게 못질 해대는가
쏟아지는 빗속에 선
초록 잎들이며 단층집 붉은 지붕들이며
비 맞을수록 한층 눈부신 그들에
불쑥 눈물이 솟는다 나 아직 멀었다
아직 멀었다










나는야 세컨드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이 아니라 늘 다음,인
언제나 나중,인 홍길동 같은 서자,인 변방, 인
부적합,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다정


꿈속에서 그는 물빛 양복의 서양 청년이었고
우리는 막 신혼여행을 떠나려는 참이엇다.
비행기 표가 싱싱한 초록 나뭇잎을 펄럭였고
그는 연신 사랑한다, 애정에 빛나는 트렁크를 꾸렸는데
내 속마음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라벤더 향내의 여행 끝 이태리쯤의 낯선 뒷골목에서 그토록 다정한 그가
날 없애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도 모르게 스윽-
내 목을 처치해버릴 것만 같았다.

다정해서 그럴 것 같았다.
누가 다정할 때마다 그럴 것 같았다.

장미꽃 나무가 내게 다정해서 죽을 것 같았다.
저녁 일몰이 유독 다정해서 유독 죽을 것 같았다.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 같았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낯선 읍내를 찾아간다 청춘이 시키는일이다
포플러나무가 떠밀고
시외버스가 부추기는 일이다

읍내 우체국 옆 철물점 싸리비와
고무호스를 사고 싶다
청춘의 그 방과 마당을 다시 청소하고 싶다
리어카 위 잔뜩 쌓인 붉은 생고기들
그 피가 옆집 화원의 장미꽃을 피운다고
청춘에 배웠던 관계들
언제나 들어오지 마시오 써 있던 풀밭들
늘 지나치던 보석상 주인은 두 다리가 없었다
머리 위 구름에서는 언제나 푸성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시계를 차도 시간이 가지 않던
시간이 오지 않던
하늘에 1년 내내 뜯어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건
좌절과 실패라는 것도 청춘의 짓이었다

구름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고개가 부러졌던 스물셋
설욕도 못한 스물여섯 살의 9월
새벽 기차에서 내리면 늘 바닷속이었던
하루에 소매치기를 세 번도 당했던
일주일 전 함께 갔던 교외 찻집에 각각
새로운 연인과 동행했던 것도
어색하게 인사하거나 외면했던 것도 언제나
청춘이 시킨 짓이었다

서른 한살에도 서른여섯 살에도
계속 청춘이라고 청춘이 계속 시키며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다 청춘의 짓이다
어느덧 불 꺼진 낯선 읍내
밤의 양품점 앞에서
불 꺼진 진열장 속 어둠 속 마네킹을 구경하다가
검은 마네킹들에게 도리어 구경당하는 것도
낯선 읍내 심야 터미널 시외버스도
술 취해 옆 건물 계단에 앉아 우는 남학생도
떨어져 흔들리는 공중전화 수화기도
다 청춘이 불러낸 짓이다

그 수화기 떨어지며 내 청춘 끝났다 절규하던 목소리도
그 전화 아직 끊기지 않았다는 것도
지금이라도 얼른 받아보라고
지금도 시키는 것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아직도 시킨다고 따라나서는 것도
아직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라고 믿는 청춘이
있다는 것도 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엽서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년 혹은 이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대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는 구절이 서늘하게 공감되는 제가 좋아하는.

김경미 시인의 시들 몇 편 올립니다.

언제나 서늘한 느낌으로 위로받는 기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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