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발단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에서 시작됩니다.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 그리고 그 영화에 대한 그의 평은 블로그에 실려있습니다. (http://blog.naver.com/lifeisntcool?Redirect=Log&logNo=130187774173&from=postView)


제가 처음 그랜드 부다페스트의 한줄평을 읽었을 때, 그리고 이동진 기자의 한줄평을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이 반응이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발생했는지 처음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블로그에 실린 평을 읽고 나서, 그동안 이동진 기자의 한줄평에서 받아온 불편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런 불편함의 정체를 밝히고, 더 나아가 제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 와 평 에 관한 생각을 공유하고자 쓴 글입니다.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은 슈테판 츠바이크에서 그 영감을 시작한 듯 '보입니다.' 영화의 말미에 분명히 슈테판 츠바이크를 기리고 있고, 액자식 구성에서 나오는 '작가'는 분명 츠바이크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대놓고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의 첫 단락을 대사로 차용하고 있죠. 그 단락은 다음과 같습니다.

 

 



" (...) . 작가란 언제나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 채 무궁무진한 소재를 가지고 끊임없이 사건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작가는 직접 이야기를 창조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인물과 사건이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눈여겨보고 귀기울이는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사람들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마련이다. 운명을 좇는 자에게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려 하기 때문이다. / 이 이야기 또한 뜻하지 않게 누군가가 내개 들려준 이야기를 거의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 초조한 마음 p 7, 문학과 지성사, (연민 이란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이 단락이 영화의 서두에 거의 그대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실겁니다. 물론 이 소설이 영화의 내용과 분명한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소설은 오히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이며 주제는 "연민"이라는 감정을 둘러싼 인간에 대한 성찰입니다. 하지만 분명 저 첫 단락에서 읽히는 츠바이크의 '태도'를 영화 속 작가-이야기의 태도로 결부하고 있다는 것은 보시다시피 사실이죠.


이동진 씨는 아마도 이 영화에서 "슈테판 츠바이크" 그리고 그가 읽은 것으로 '보이는' "어제의 세계"란 책이 곧바로 생각이 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런 한줄짜리 평이 가능해지죠. 그는 평에서 어제의 세계란 단어에 따옴표를 사용해가며 분명히 영화에서 언급하고 있는 츠바이크에 방점을 찍고 ' 향수'라는 주제의식을 살리고 있습니다. 저의 문제의식은 그의 이런 한줄짜리 평이 평론가들의 클리쉐. '자신이 아는 것만 나오면 읽은 것을 갖다부치는 못된 습성'처럼 읽힙니다.  




츠바이크의 소설들은 대부분 '비극'에 가깝습니다. 츠바이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전기작가인 동시에 소설가이고, 무엇보다 20세기 초중반의 유럽의 비극, 전쟁을 겪으며 항상 고난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시절에 관한 향수"를 그리는 작가가 아닙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작품들, "광기와 우연의 역사" " 발자크 평전" "천재 광기 열정"을 비롯해 여러 단편소설과 몇 안되는 장편은 분명히 '광기와 고통에 처한 인물'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번역된 '초조한 마음 (or 연민)' 의 옮긴이 해설에는 이런 츠바이크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해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츠바이크는 영국인들이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적국 거류 외국인"으로 간주하여 감금시킬것을 염려한 나머지 아내와 함께 런던을 떠났다. 그들은 뉴욕, 아르헨티나, 파라과이를 거쳐 마침내 1940년 브라질에 정착했다. 1942년 중편 <체스>, 자서전 <어제의 세계>를 완성했다. 1942년 츠바이크는 자신의 정신적 고향인 유럽의 멸망에 절망하여 아내와 함께 브라질 페트로 폴리스에서 수면제를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츠바이크의 작품은 대개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주인공은 언제나 내적 외적 상황 때문에 바로 코 앞에서 행복을 놓치게 되고, 그것은 마치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격이어서 더욱 더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츠바이크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작품이 바로 <초조한 마음>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는 결코 정치적 작가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확고한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미 1934년 오스트리아를 떠날 만큼 정치적 판단력도 있었다.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망명할 수 밖에 없었지만, 츠바이크는 멀리 타향에서나마 20세기 최대 재앙이라 할 수 있는 양차세계대전이 그의 고향 오스트리아에 가져온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 그를 결코 " 어제의 세계" - [어제의 세계]는 전쟁으로 파괴되기 이전의 세계와 역사, 문명을 치밀하게 묘사한 츠바이크의 회고록이다 - 만을 바라보는 노스텔지어에 빠진 사람이라고 단언해서는 안될 것이다. "
- 초조한 마음, 옮긴이 해설 이유정

   




츠바이크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는 자신이 고향을 떠나기 전에 살았던 유럽, 벨 에포크 시대와 같은 '영광'을 그리는 책이 아닙니다. 그는 이 자서전을 집필하고 난 뒤에 같은 해 (1942년)에 브라질이란 낯선 땅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위 옮긴이 해설에서 읽히듯, 그는 그 시대를 '향수'와 '그리움'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닌 '고통과 광기'로 해석하고 있고, 그런 시절에 대해 정치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입니다.<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그려지는 향수와 아름다운 미장센들은 그가 생각했던 시절과는 확실한 거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영화는 단지 츠바이크의 소설과 시대에 "모티브"를 얻었을 뿐, 그의 작품과 세계와는 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짚고 싶은 문제는 이런 츠바이크의 삶과 시대에 대한 진짜 성찰과는 전혀 "관계없이" 쓰고 있는 이동진 기자의 '장식적인 인용'입니다. 영화에서 언급된 츠바이크를 보고, 자신이 읽은 책과 지식으로 자신의 해석을 '포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어떤 인용과 수사를 빌려온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엄격하게 그 인용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전제하고 사용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엄격한 잣대죠. 그러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과 이동진 씨의 평에는 "츠바이크"가 있지만, 그 츠바이크는 츠바이크가 아니라, 단지 장식적으로 쓰이는 "츠바이크"에 불과합니다. 쉽고 거칠게 말하자면 그냥 있어보이고 싶어서 어제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줄평 마지막에 그가 덧붙인 "근원적 노스텔지어". 이동진 씨가 쓰고 있는 이 단어는 위에서 언급한 문제와 , 제가 그동안 느껴왔던 이동진 씨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대체 "근원적 노스텔지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질문은 위에서 논의한 "츠바이크 인용"에서 느껴지는 문제와 같은 방식의 아이러니를 안고 있습니다.


츠바이크는 '노스텔지어'의 작가가 맞습니다.이 단어가 그의 주제의식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동진 씨가 쓰고 있는 "노스텔지어"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노스텔지어를 츠바이크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로써 말이죠. '노스텔지어'라는 말은 보통 '향수/ 그리움'이란 말로 쓰이지만, 사실 이 단어는 '그리움'이란 뜻과는 거리가 있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정확한 어원과 뜻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입니다. Nostalgia 에서 Nost = Home 이며, Alg = Pain. nostalgia = yearing for home 입니다. 노스텔지아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장소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의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죠. 물론! 이 말이 보편적으로 향수와 그리움으로 언급되는 단어로 쓰이는 것은 맞지만, 츠바이크의 "노스텔지아"는 오히려 원 뜻에 가깝습니다. 그의 실제 생 또한 그렇죠. 자신의 고향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유럽을 뒤로 하고 남미로 망명한 작가의 생과 그의 비극적인 선택-자살-은 정말 '노스텔지아' 그 자체입니다. 그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의 노스텔지아-고통으로 쓰인 책이죠.


그러나 '평론가' 이동진 씨는 아주 낭만적으로 "어제의 세계"를 언급하면서 "근원적 노스텔지아"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시종 일렁이는 영화입니다. (그게 이 영화가 끝날 때 자막을 통해서 '어제의 세계'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를 기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겁니다.) 미국인인 웨스 앤더슨은 자신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그와 같은 특정한 시공간에 대한 향수를 수많은 문화적 레퍼런스와 개인 경험을 뒤섞어가며 독창적이고도 아스라한 느낌을 주는 동화로 그려냈습니다. 물론 극중 시공간은 정확히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 그 자체를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물론 노스탤지어에 대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사라져버린 '어제의 세계'에 대한 달콤쌉싸름한 회상의 감각은단지 이 영화의 주인공인 제로 무스타파의 것만은 아닙니다. 그건 또다른 주인공인 구스타프의 것이기도 하면서, 무엇보다 직접 경험한 적 없는 이야기를 듣거나 읽거나 옮김으로써 간접 체험하는 이 영화 속 작가나 독자, 즉 세상의 모든 예술 창작-향유자들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직접적인 상실의 경험이 아니라 간접적인 상실감입니다.) 그러니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음에도 그 세계가 사라진 것에 대해 관객들이 나직하게 탄식을 내뱉으며 노스탤지어에 젖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원론적으로 말해서 예술이야말로 바로 그렇게 직접 경험한 적 없었던 세계와 시간에 대해 향수를 느끼도록 하는 것일 겁니다. (부디 그걸 거짓 향수라고 하지 마시길.)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이 속해 있는 곳은 결국 우리가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이겠지요.


[출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고 | 작성자 이동진




그가 Feel 을 받고 계속 쓰고 있는 단어 "노스텔지아" "어제의 세계"를 만약에 위와 같은 츠바이크에 대한 이해와 그가 치른 시대에 대한 감수성을 알고 읽는다면, 아마 괴리감과 불편함만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치 "마담 보바리"와 "안나 까레니나"를 "사랑-로맨스 소설"이라고 얘기하는 듯한 불편함 말이죠. 영화 "세월"을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의 이런 지적이 마치 "꼬투리 잡기" "말꼬리 잡기"로 보이실 수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그는 저 글에서 츠바이크와 노스텔지아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한 해석의 주제로 인용하면서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 '어제의 세계'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를 기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 ? [근원적 노스텔지아] ? [간접적인 상실감] ? ['어제의 세계'에 대한 달콤쌉싸름한 회상의 감각] ? 아마도 이런 감상들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한 나름의 감상은 될 수 있어도, 츠바이크, 혹은 그 시대에 대한 "올바른 감수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죠. 이건 마치 새마을 운동과 박정희 시절의 경제발전 시기를 "아름답게 그리워하는" 조선일보 애독자같은 해석처럼 느껴진다고 한다면... 너무 심한 비아냥일까요.



<그랜드 부다페스트>는 그 자체로 정말 아름다운 영상미와 이야기를 지닌 작품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의 현실은 그런 동화책으로만 묘사하기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당시를 살았던 작가들과 지식인들이 치른 "고통"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설령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이 "아름다움"을 누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산산조각 났는지를 떠올린다면, "아 그때가 참 좋았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주먹을 날릴 것만 같은 사람들의 글이 분명 역사에 실재하고 있습니다. 단지 "향수"니, "근원적 노스텔지아"니 라고 언급하며 포장하며 인용하기에는 정말 "전쟁같은 시대"였으니 말이죠. 이동진 씨의 평에는 그런 시대에 대한 감수성이 부재한 채, (혹은 생략한 채) 낭만적인 영화에 대한 해석을 너무 낭만적으로만 포장하고 있습니다. "근원적"의 근원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스텔지아란 단어의 "근원"은 분명 "고통"입니다. 이동진 씨의 평에는 이런 고통에 대한 감수성-츠바이크의 삶-이 부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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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로저 에버트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흥미로운 우디엘런에 관한 얘기가 있었습니다.우디엘런은 1970년대부터 2000년 까지 그는 매일 '자살'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생각은 평생 변함이 없었구요. 그의 최신작들을 떠올리면 따뜻한 미소가 지어지지만, 사실 그는 항상 비관적이고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찬 감독이기도 하죠. "미드나잇 인 패리스"의 아름다움은 <그랜드 부다페스트>의 그것과 조금은 닮아있기도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도 여전히 시니컬하고 비관적인 구석으로 인물을 관찰하는 양반입니다. (로저 에버트의 우디 엘런에 대한 글은 그의 영화 미드나잇 패리스가 만들어지고 난 뒤의 글입니다.) 


제가 느닷없이 이동진 평론가와 <그랜드 부다페스트>를 이야기하면서 우디엘런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동진 기자가 우디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교양속물'들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화 <스몰 타임 크룩스>를 기억하시는지요. 갑자기 졸부가 된 주인공-우디엘런-이 빈곤한 취향과 정신세계를 숨기기 위해 "속성 교양 과외"를 받는다는 내용의 영화 말이죠. 그의 최근 영화 <로마 위드 러브>에 나오는 엘런 페이지는 <스몰 타임 크룩스>에서 우디가 비웃고 있는 인물들과 닮아있기도 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한 어려운 작가와 작품을 인용하면서 똥폼을 잡고 남자를 꼬시죠. 속물들에 대한 비아냥과 조소는 우디엘런의 장기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동진 평론가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평에서 그런 우디엘런이 비웃는 인물들의 태도, 따뜻하게 그려지긴 하지만, 사실은 약간 비웃고 있는 <미드나잇 패리스>의 주인공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우디엘런 최근 영화의 외양만 보고 "참 웃기고 따뜻한 양반"이야. 라고 말한다면 우디 엘런이 평소에 얘기하는 감정들 -자살, 삶을 망친것만 같다는 생각-은 휘발되어 버리는 것처럼, 이동진 기자의 이런 '인용'은 뭔가 '핵심'이 없는 포장지의 리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의 이런 태도가 그의 인기비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달콤하기만한 해석은 언제나 그 안에 어쩌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고통'을 숨기고 있기 마련이죠. 이동진 기자에게 그런 고통 까지 이해하고 인용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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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면서 즐겁고 따뜻했지만, 제 취향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분명 누군가가 "그 영화 어때?" 라고 묻는다면, 좋은 영화고 꼭 봤으면 한다고 추천도 해줄 수 있겠지만, 예전에도 적어왔듯, 저는 그런 "달콤한 판타지"에 잘 넘어가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물론 그 작품에도 "씁쓸함"이 있죠) 제가 이동진 기자의 평에서 느낀 불편함과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달콤한 포장"과 "리본"처럼 사용된 "어제의 세계"와 "노스텔지어"에는, 그 안의 진짜 인물과 시대와는 거리가 있으며, 설령 이것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항상 평론가는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와 "인용"의 적절함을 따지며 ,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 없이 단지 낭만적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은 마케팅의 방식이지 비평의 방식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물론 이것은 저의 "주관적인" 입장이니, 그에게 강요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요즘 이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찬 시대에 저런 달콤한 술수로 인기를 끄는 사람들을 보면 제법 많이 씁쓸해집니다. 지금은 유행이 지났겠지만, 한때 난리를 쳤던 '멘토'들과 그들이 자주 사용했던 "힐링"이라는 말에 담긴 달콤함. "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기만"이 요즘 시대의 모든 '달콤함'에서 느껴진다고 하면 제가 너무 예민한걸까요? 하지만 이동진 씨의 저런 "멋있는 한줄평"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기만과 닮아보입니다. 과장일까요? 하지만 이런 시대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윤동주가 시대에 관해 느낀 부끄러움을 츠바이크에게도 읽어낼 줄 알고 그것을 소개한다면 더 좋은 "인용"이지 않았을 까 싶습니다. 요즘 지식인들에게 요구되는 감성은 "죄책감"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P.s



 

"연민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그 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 초조한 마음 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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