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글의 형태로 작성되어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작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작이었던 후카다 코지의 <러브 라이프>를 봤다. 현재 관객수가 적은 게 너무 아쉬울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었다. 후카다 코지는 이미 <하모니움>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적이 있을 만큼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아왔는데 최근에 일본 감독들 중 하마구치 류스케와 미야케 쇼가 국내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것에 비해 국내 관객들에게 덜 관심을 받는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좀 더 많은 관객들이 <러브 라이프>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쓰게 됐다. 

내가 <러브 라이프>에 감탄한 지점은 서사보다는 형식에 있다. 이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주인공 타에코가 상실을 겪으면서 본인의 과거와 다시 마주하게 되고 이를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 영화의 서사도 흥미로웠던 것은 맞지만 단순히 이런 내용만을 영화가 전달했으면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지금과 같은 반응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루세 미키오가 떠올랐고 내가 이 영화를 보고 감탄한 것은 <러브 라이프>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와 비슷한 미학을 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후카다 코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실제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감독은 나루세 미키오이다.) <러브 라이프>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다. 흔히 나루세 미키오는 현실의 어려움을 당당히 헤쳐나가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멜로드라마의 거장으로 알려져있다. 나에게도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이런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 매혹된 보다 큰 이유는 그가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의 미학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장 두셰는 나루세 미키오가 현실을 지극히 세세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현대성을 획득했다고 말했고 일본의 영화평론가 야마네 사다오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중요한 미학으로 ‘감정의 리듬’을 지적한 바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가 깊은 강과 같다고 평했다. 이러한 나루세 미키오에 관한 평들을 종합해본다면 나루세 미키오의 위대함은 일상을 세분화해서 그려내는 그만의 탁월한 능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서의 쇼트는 단독적으로 보면 평범할 수 있으나 그 쇼트들이 하나둘씩 모이면서 일상의 디테일들을 만들어낼 경우에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자로 재듯이 정확하게 인물이나 사물을 포착하는 쇼트는 순간 순간의 인물의 미묘한 심리와 감정을 잘 담아내며 스릴러적인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쇼트와 쇼트가 이어지며 서스펜스가 발생하기도 하고 인물들의 시선의 마주침이나 외면, 인물들간의 물리적 거리의 변화 등을 통해 다양한 함의를 이끌어낸다. 빛의 미세한 변화나 기차의 움직임 등 화면 속에 보이는 것들의 운동성 또한 특유의 무드와 리듬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일상을 소묘하듯이 차분하게 흘러가는데 일상의 디테일들이 하나 하나 쌓이고 쇼트들이 모여서 정보를 전달하고 극중에 서사의 레이어와 미묘한 뉘앙스를 만든다. 내가 나루세의 유작이자 최고작이라고 평가하는 <흐트러진 구름>에 늘 감탄하는 것도 언뜻 보면 단순한 멜로드라마로 보이는데 쇼트들의 운용을 통해 스릴러를 방불케하는 서스펜스를 만들고 두 남녀 주인공의 물리적인 거리의 변화를 통해 영화 전체가 두 벡터의 이동으로 봐도 될 정도의 추상의 경지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제 이와 관련해서 다시 <러브 라이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물론 위와 같은 쇼트의 미학이 비단 나루세 미키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나루세의 영화를 보면서 위와 같은 형식에 유난히 감탄했었기 때문에 <러브 라이프>를 보면서 나루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후카다 코지도 나루세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그냥 내 눈을 믿기로 했다.) 이 글을 보고 누가 나를 ‘쇼트 성애자’라고 불러도 할 말은 없지만 <러브 라이프>에 감탄한 지점이 쇼트의 미학에 있는 것은 사실이고 다른 영화를 볼 때도 그런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서사를 즐기지 못했다거나 서사로부터 어떤 감동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쇼트와 서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사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어떤 쇼트들의 연쇄로 인해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나는 <러브 라이프>를 보면서 오랜만에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보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 과소의 미학이 오히려 과잉보다 경탄할 만한 순간을 더 만들어낸다는 것이 놀라웠다. <러브 라이프>의 오프닝에서 후카다 코지는 이미 영화 전체의 지도를 그려내는데 쇼트 하나를 낭비하지 않으면서 빠른 시간 안에 그걸 해내는 걸 보면서 할리우드 고전 거장들의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 속에서 비극의 원인이 된 욕조를 섬세하게 다루는 방식이 훌륭했고 한밤중에 공원에서 주인공 타에코와 박신지가 본격적으로 대면하는 장면에서 두 인물 뒤로 빛을 발하며 빠르게 지나가는 열차의 움직임이나 타에코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타에코와 박신지가 서로 마주보면서 수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과는 별도로 빛과 바람과 열차의 움직임이 이미 많은 것을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나 스트라우브 위예의 영화에서도 나무의 흔들림이나 빛과 같은 요소들이 그 자체로 감동을 줄 때가 많은데 <러브 라이프>를 보면서 그와 유사한 감동을 느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러브 라이프>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이 시퀀스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타에코의 베란다에 매달려있는 CD가 빛을 반사하면서 타에코의 집의 실내에 비치는 빛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빛의 움직임은 화면 속에 어떤 초월적인 정서를 새겨넣고 빛이 없이는 영화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영화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빛의 움직임은 나로 하여금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러브 라이프>에서의 빛은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에서 벽을 비추던 신비로운 빛과 닮아있다. 

<러브 라이프>의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장면에서도 후카다 코지는 미니멀리즘으로 승부하면서 관객에게 감동을 안긴다. 결혼 피로연장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고 혼자 몸을 흐느적거리면서 춤을 추고 있던 타에코는 하객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사라지자 홀로 남겨진다. 타에코의 주변으로는 노란 풍선들이 매달려있다. 이 장면은 타에코가 비로소 스스로의 고독과 맞이하게 되는 중요한 순간을 담고 있는데 이 장면을 후카다 코지는 무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평범하게 보여주고 있다. 왠만한 감독 같았으면 타에코가 춤을 추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카메라를 움직인다거나 숏을 쪼개서 보여준다거나 하는 방식을 취했을 법도 한데 후카다 코지는 춤을 추고 있는 타에코의 뒷모습만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을 뿐 어떠한 것도 하지 않는다. 한참 동안 뒷모습을 비추다가 뒤늦게 잠시 카메라가 타에코의 정면쪽을 잡으면서 그녀의 표정을 보여주는 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미니멀한 방식으로 현란한 조명과 카메라 움직임과 시각 효과를 동원해서 만들어진 스펙터클과 맞먹는 시각적 황홀경을 선사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에서 버스를 타고 가던 주인공 노부부가 버스가 흔들리자 덩달아 몸이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운동성과 리듬이 선사하는 시각적 쾌감과도 유사하게 말이다. 이 영화를 촬영한 야마모토 히데오는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1997), 미이케 다카시의 <오디션>(1999), 시미즈 다카시의 <주온>(2004), 이상일의 <훌라 걸스>(2006) 등에 참여한 베테랑 촬영감독으로 <러브 라이프>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이 빛나는 빼어난 영상미를 구현해낸다.

글을 정리하자면 <러브 라이프>는 현재와 같이 관객들의 외면을 받을 작품이 아니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하마구치 류스케와 미야케 쇼의 영화들 속에서 어떤 영화적인 순간들과 마주하면서 감동을 느낀 관객들이라면 단언컨대 후카다 코지의 <러브 라이프>를 보면서도 그와 맞먹는, 아니 어쩌면 두 감독의 영화를 뛰어넘는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러브 라이프>와 관련해서 한국인이나 한국에 대한 묘사가 아쉽다는 얘기들도 있고 그런 부분에 대해 나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지만 위에 얘기한 것처럼 내가 <러브 라이프>를 보고 감탄한 지점은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아쉬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평소에 <러브 라이프>를 보면서 만날 수 있었던 것과 유사한 영화적인 순간들을 보기 위해 영화를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늘 다른 영화에서도 그런 순간들과 마주하기를 기대한다. 이미 상영하는 곳이 별로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내 글을 읽고 혹시라도 마음이 동한 분이 계시다면 <러브 라이프>를 꼭 보러 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극장에서 못 보게 되신다면 2차 매체를 통해서라도 꼭 보셨으면 좋겠다. 분명히 영화만이 줄 수 있는 감동과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러브 라이프> 예고편: https://naver.me/GvXuU4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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