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의 Hype Boy를 처음 들었을 때 위화감이 들었다. 가사는 분명 어떤 소년을 향한 소녀의 호기심과 애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안무나 뮤직비디오에서는 어떤 연애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각 멤버를 주인공으로 총 네편이나 제작이 되었지만 그 뮤직비디오들은 민지의 뮤직비디오를 제외하면 딱히 연애스토리가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이 남자가 아니었거나, 호감을 품은 남자얘에게 실망하거나, 락커룸에 친구와 몰래 숨어들었다가 소동만 펼치고 나오는 우정드라마에 더 가깝다. 심지어 민지의 뮤직비디오도 딱히 연애가 결실을 이루는 내용은 아니다. 이 노래의 영상이미지들은 가사를 반영하는 대신 오히려 상반되는 내용들을 보여준다. Hype Boy는 연애에 대한 이야기보다 연애라는 현상을 맞닥트린 "소녀"의 이야기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해보인다.






Ditto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의구심은 더 커졌다. 영상은 뉴진스 멤버들을 담고 있지만 이 영상을 찍고 있는 서사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반희수'라는 한 여자아이이다. 반희수는 뉴진스 멤버들과 어울려 놀거나 이들이 춤추는 걸 카메라로 찍고 있다. 여기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이 뮤직비디오가 비춰주는 한 남자아이의 존재다. 반희수는 종종 이 남자아이에게 카메라의 초점을 빼앗긴다. 뉴진스를 찍고 있어야 하는데, 자꾸 이 남자아이를 찍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반희수는 뉴진스와 멀어진다. 쓸쓸한 표정을 한 뉴진스를 뒤로 한 채 반희수는 홀로 떠난다. 사슴의 얼굴과 반희수의 얼굴이 교차한 다음 장면에서 반희수는 이 남자아이와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즉 이 남자아이가 뉴진스와 반희수의 우정을 방해하는 불순물, 혹은 결별의 계기처럼 그려진다.


Ditto에서 반희수는 뉴진스와 결별할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카메라가 반희수의 시점에서 다른 외부인의 시점으로 이동하면 그 때 반희수는 허공을 향해 멍하니 있거나 자기 눈에만 보이는 뉴진스를 향해 혼잣말을 하는 이상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 뮤직비디오에서 반희수는 이미 자신과 세상의 대립을 겪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뮤직비디오는 '자꾸 거슬리는 존재'로서 어떤 남자아이에게 초점을 맞춘다. 즉 반희수는 양자택일의 갈림길 앞에 놓인다. 자기 눈에만 보이는 뉴진스와 어울릴 것인지, 세상 속의 어떤 한 남자아이와 함께 할 것인지. Ditto의 뮤직비디오는 뉴진스 VS 연애의 구도를 세워두고 있다.


Ditto의 뮤직비디오는 어떤 여자아이가 성장기 과정에서 자신만의 오타쿠스러운 세계에 푹 빠졌다가 현실을 깨닫고 연애도 하면서 자라나는 이야기라고 누군가는 축약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EP.2의 뮤직비디오들은 어떤가. 트리플 타이틀곡인 Super Shy, Cool with you, ETA의 각 뮤직비디오에서는 항상 남자와 여자가 연애에 실패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뮤직비디오들 안에서 뉴진스가 그 장면을 목격하거나 직접 서사 안으로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연애를 하지 말라고 하기도 한다. 특히나 눈길을 빼앗는 건 오히려 노래 가사나 뮤직비디오의 내용이 설레는 연애감정을 노래하는 듯한 Super Shy에서조차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연애 갈등이 명확하게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생기넘치고 통통 튀는 노래의 뮤직비디오라면 오히려 사랑스러운 커플들을 보여주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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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남자의 꽃다발 고백을 거절하고 떠나는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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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층에서 싸우고 있는 커플과 이를 바라보는 뉴진스의 댄서들 -


Super Shy에서부터 연애를 실패하거나, 연애로 괴로워하는 커플들은 계속 등장한다. 그리고 뉴진스의 세계 속 사람들은 이를 계속 목격한다. 특히 고층에서 싸우는 이 커플을 뉴진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이 뒤의 Cool with you에서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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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빠진 정호연(큐피드)과 그런 그를 바라보는 뉴진스의 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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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가가려다가 인간이 아닌 자신과,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뉴진스를 의식하는 정호연 -


트리플 타이틀 곡의 뮤직비디오를 공개된 순서대로 해석하면 재미있는 도식이 나온다. Super Shy의 뮤직비디오에서 여자와 남자의 연애가 금이 가는 광경이 나왔지만 뉴진스는 이를 직접적으로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 다음 Cool with you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어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걸 뉴진스가 직접 목격한다. 그 다음의 ETA에서는 말 할 필요도 없다. 목격에서 멈추지 않고, 뉴진스는 누군가의 실패한 연애에 직접 개입해서 결별을 설득한다. 뮤직비디오가 순차적으로 공개될 수록 뉴진스는 적극적으로 "연애"에 개입하고 그것을 깨트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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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 With You의 뮤직비디오에서 또 흥미로운 것은 양조위가 분한 어떤 신이, 큐피드의 연애를 깨트리는 과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양조위를 아프로디테로 해석하는데 나는 오히려 불화의 '여신' 에리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호연의 큐피드는 뭔가 금기를 어겼고 양조위는 전능해보인다. 그는 정호연의 큐피드가 반한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 때 그의 전능함이라면 정호연의 큐피드를 남자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남자는 정호연의 큐피드 앞을 지나가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준다. 남자가 단순히 여자를 망각하거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정호연에게서 다른 여자로 옮겨놓는다. 즉 남자가 사랑했던 여자를 배신하게 함으로써 양조위는 이 연애를 파괴한다. '그는 나를 버렸어'가 아니라 '그는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했어'로 이별을 시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여기서 양조위가 하는 일은 단순한 연애의 금지와 벌이 아니라, 남자가 얼마나 가벼우며 못믿을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양조위의 성별이 남성이라는 것도, 결국 여성의 사랑을 깨트리는 것은 남성이라는 함의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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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진스의 ETA 뮤직비디오를 Cool with you 뮤직비디오와 연결해서 보면 더 재미있다. ETA의 뮤직비디오에서 이제 뉴진스가 직접 Cool with you 안의 양조위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자기 자리를 떠나서 남자를 사랑하는 것에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목격하고 학습한 뉴진스가 이제 다른 여자(친구)를 아예 구해주겠다고 나서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과정에서 하니가 등에 날개를 매달고 있는 모습은 마치 Cool with you의 요정들이 다른 모습으로 다른 현장에 현현顯現한 것 같다. '역시! 남자가 다 그렇지 뭐!' 그들은 너무 쉽게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남자의 변덕을 이미 본 적이 있다.


이 세 뮤직비디오를 차례대로 보면 ETA의 결말은 조금 섬뜩하다. 노래의 가사는 그 남자랑 헤어지라는 내용이지만 뮤직비디오는 그 남자를 죽일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ETA의 뮤직비디오는 바람난 남자친구를 여자친구가 죽이는 데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그 둘의 시체를 차에 싣고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낭떠러지에 도착하는 곳에서 끝난다. 그런 점에서 '실패한 연애' 3부작은 연애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증명하며 끝이 난다.


그렇다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맴돈다. 왜 뉴진스는 Ep.2의 뮤직비디오를 통해 연애라는 것이 여자에게 실패가 이미 확정된 것처럼 연속해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일까? 비연애를 장려하기 위해서? 그런 정치적인 의미보다는 미학적인 구도로 이 'anti-love'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뉴진스의 이번 뮤직비디오들은 여자 팬들에게 "남자와의 연애"가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실패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자"가 아닌 "뉴진스"를 향한, "연애"가 아닌 "팬질"이다. 한창 소녀 때에는 남자라는 존재를 향한 이성애를 괜히 꿈꾸고 두근거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큼이나" 멋지고 황홀한 건 바로 "뉴진스를 팬질"하는 것이다. EP.2의 마지막 타이틀곡 ETA를 다시 곱씹어보자. 바람난 남자친구 때문에 마음 고생하는 친구에 뭐라고 하고 있는가. 뉴진스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남자친구를 찾아다니고 연애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낭떠러지 말고는 갈 데가 없다.


뉴진스의 이번 앨범은 덕질의 새로운 차원을 도모하고 있다. 그 누구라도 덕질은 덕후들만의 특이한 감정이고 그것은 현실의 연애에 비할 바 안되는 것이라고 인식할 것이다. 뉴진스는 여기에 연애와 덕심의 대립 구도를 세워놓고 자신만의 공식을 주장한다. 연애야말로 덧없고 여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며, 뉴진스를 좋아하는 것은 연애만큼이나 혹은 연애보다도 훨씬 더 반짝거리고 신나는 무엇이라고. 뉴진스는 소녀들의 사랑을 대신 이뤄주는 대리자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그 연애에 대한 환상과 열정을 뉴진스 자신을 향해 쏟아주길 원한다. 남자는 아무리 좋아해도 결국 다른 여자에게 한눈이나 팔지만 뉴진스는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존재로 남아서 팬들과 함께 할 거라고.


아이돌 산업은 이제 이 정도 수준으로 왔다. 각 아이돌끼리 능력치와 매력을 겨루는 게 중요하지 않다. 아이돌이 팬을 어떻게 해석하고 호명할지, 전통적인 이성애마저도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특별한 사이야". 뉴진스는 아이돌과 팬 사이의 새로운 유대관계를 발명해내려고 하고 있다. 뮤직비디오 곳곳에 숨어있는 anti-love와 

new love의 메시지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미 깊이 파고들었을 것이다. 연애보다 중요한 무엇이 "우리 뉴진스와 팬 사이에" 있다고 속삭이는 이 뮤직비디오들의 서사는 과연 어떤 종류의 숭배와 사랑을 만들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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