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것.

2013.06.14 15:04

라곱순 조회 수:6834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저는 항상 물병에 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평소에 오백미리 정도의 물병이 없으면 참 불안합니다.
모 장소에 용무가 있어서 가야 하는데, 버스를 타면 오분도 안되어서 가는데 이십분 정도를 걸어갔습니다. 버스비 쓰기가 싫어서요.
용무를 다 보고 다시 걸어서 거의 집에 다 오고 나서야 그곳에 실수로 제 고물 핸드폰을 두고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굉장히 더운 여름날 오후, 왕복 거리와 용무 포함한 약 한시간을 걸어서 왕복한 후, 
핸드폰 가지러 다시 그 장소에 걸어 갔다가, 또다시 집으로 이십분 넘게 걸어왔습니다. 
두시간 가까이 걸은 셈이지요.
땀은 비오듯 흘리고 중간에 물병 물이 똑 떨어져서 목이 말랐지만, 지갑을 열어 근처 편의점에서 제일 싼 오백원의 생수를 사는게 망설여집니다. 
집에 가면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으니까요.

자, 이러면 저는 명목상으로는 버스 왕복비 x 2번 + 생수비를 아낀 셈입니다만, 그 이상의 기회비용을 날렸습니다. 귀중한 시간과 갈증이라는.

그런데도 여전히, 다시 같은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제 낡은 지갑을 열어서 (십수년이 넘었습니다. 해진 부분은 바느질로 꿰메어서 계속 씁니다) 
총 4번의 버스비(이 경우 교통카드)와 생수사는 비용을 꺼내 쓰는 것이 망설여집니다.

올 초부터 이런 돈과 관련한 강박증적인 경향이 특히 심해졌습니다. (그 원인은... 지금 짐작이 가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일하는 곳에서는 다행히도 식비 없이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만, 만약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아마 매일 밥에 김치 싸서 다녔을 것입니다.  지갑 열어 돈 쓰는게 싫어서요.

자, 이것 역시 낮은 자존감의 결과일까요. 힘들여서 귀하게 번 돈이니 푼돈이라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내 스스로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저의 수많은 문제점들과 함께, 이런 것들 역시 저는 상담을 받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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