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유감

2014.12.09 16:29

은밀한 생 조회 수:5377

 

미생 작가한테 이메일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입니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알아주는 드라마가 아니라 직장인들을 더 옥죄는 드라마를 쓰고 계신 건 아시냐고요.

일단 제 주변의 사례를 들어볼게요.

 

사례 1.

다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직장 생활 경험 없이 빈둥거리며 한량으로 지내다가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체를 물려받아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저의 선배 A.

이 선배가 절 가끔 만나면 제법 고민입네 하고 떠들던 것이 “난 일반 직장 경험이 없어서 내가 과연 직원들한테 제대로 대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 뭔가 실수하는 건 아닐까?“ 이런 고민이었습니다. 막연하게 상하 주종 관계에서 주인이 소작농에게 후하게 인심 쓰면 다 되는 거겠지 수준으로 말고, 제대로 된 매뉴얼로 회사를 경영하며 직원들을 대하고 싶어했죠. 헌데 이 선배가 최근 미생의 영향으로 이런 황당한 말을 하더군요. ”은밀아 그동안 난 내가 너무 호구 대표였던 것 같아. 이제부터 대표의 권리를 좀 누려야겠어. 직원들을 너무 상전으로 대우했던 것 같아. 미생 보니까 난 진짜 양반 중의 양반이더라. 이젠 좀 엄격하게 대하려고 해“ 이런 망할. 선배. 미생을 교과서로 삼지 마욧.... 그르지 마요 ㅡ_-;;

 

사례 2.

보통의 직장과는 좀 다른 개념이 존재하는 교육 서비스의 현장인 학원. 그 학원의 원장님인 제 친구(학원 강사)의 상사 B.

제 친구 말에 의하면 최근 이 학원 원장님께서 미생의 열혈 시청자로 모든 것을 미생 기준으로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학원 강사들 출근 시간이 오후잖아요? 그걸 두고도 “미생에 비하면 진짜 여유롭지.” 또는 전에는 안 그러더니 요즘엔 부쩍 학원 강사들 아무에게나 다 커피 심부름을 시킨대요. 그것도 돈을 주면서 정중히 부탁하는 것도 아니라 “김샘, 우리 커피 마실까?” 이러고 웃으면서 간다는군요. (성대리 빙의신가..;;) 그리고 매번 “미생에 비하면 우리 학원은 진짜 근무환경 갑이다 갑 ㅎㅎㅎ” 이런다네요.

 

사례 3.

평소 일반 직장 경험이 없는 게 콤플렉스인 디자이너 C. (저희 직장 디자이너분이죠)

홍대 인디 밴드 보컬 간지에 (써놓고도 이 표현이 좀 쭈글오글이긴 한데.. 암튼 쿨럭) 게임 덕후에 초중고를 입시미술에 바친.... 음. 그러니까 좀 일반적인 사회 생활 경험이 있는 타입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분이 요즘 틈만 나면 “하... 은밀님. 미생에 비하면 진짜 우리 팀장님은 양반이에요. 걍 꾹 참고 다녀야겠어요 :D" 한다거나, ”근데 실제로 일반 직장에선 여직원 얼굴에 서류 집어 던지고 그래요? 아 진짜 전 일반 직장 들어갔으면 하루 만에 관들 듯요“ 라고 하심. C양.... 현실 긍정이야 좋지만 이건 좀.... 아니자나요 ;;

 

가까운 지인분이 영업직만 15년 차인데, 미생을 보면 헛웃음이 난다 하더군요. 직장에서 매일 사랑놀이나 해대는 쟤네 신의 직장은 어디? 드라마랑 그 황당함 면에서 별다를 게 없다고요. 요즘 어느 회사에서 여직원 얼굴에 서류를 집어던지고 대놓고 분 냄새 운운하느냐고요. 그리고 대기업 사무직은 고졸 사원 자체가 들어올 수가 없다고... 미생 드라마 에피소드들이 딱 80년대 무역회사라고. 물론 제 후배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일요일에 팀장 딸 유치원 행사에 사진 촬영 작가로 불려가기도 합니다만.... 그건 교묘하게 말을 돌려서 부탁하는 상사에 대한 직원의 자발적인 협조로 이뤄지는, 친목이라 부르고 시간 외 근무라고 쓰는 형식이죠. 이런 실제 에피소드들은 널리고 널렸고요. 하지만 미생에 나오는 직원에 대한 그 노골적인 하대와 인격 모욕은 그렇게까지 공공연하게 행해지지도 않을뿐더러, 시대착오적인 삽화라고 봅니다. 요즘엔 모든 파행과 모욕이 비밀리에 이뤄지죠. 표면적으로는 일단 직원 존중의 포장지라도 유지를 하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파행적인 직장 내 모욕 사건이 일어나면 이슈가 되고 비난을 받는 거고요.

 

그렇지만 미생이 이야기의 완성도면에서 후줄근하고 캐릭터가 단편적이진 않아요. 일단 재밌고요. 하지만 전 미생 신드롬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에요. 굉장히 현실적으로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에요. 문제는 이 드라마가 먹고사니즘에 대한 드라마이기에 미생이 마치 직장 생활의 교과서처럼, 리포트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단 거죠. 특히 일반적인 회사의 룰과는 좀 다르게 흘러가는 직업군이나 말단 사원 경험이 없는 오너들, 그리고 수많은 군소 중소기업(오너 말 한마디에 모든 게 오락가락하는) 직원들에게 거의 직장 생활 실사판처럼 받아들여지는 부분. 이게 엄청난 문제 같아요.

 

미생의 인물들이 좀 어렵게 일합니까.... 정말 직장 생활 말고는 다른 삶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죠. 물론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하는 요즘 직장인들에게 그 생활의 피로도와 중대함만큼은 충분히 공감할 내용이지만, 미생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너무 구식이에요. 설령 현재 미생처럼 굴러가는 사내 조직이 있다하더라도 그 내용이 드라마에서 다뤄지는 건 부작용만 심할 뿐이지 긍정적인 효과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건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다뤄야 그것이 잘못된 행태라는 경각심이 일어나지, 미생처럼 화제가 되는 드라마에서 마치 일반적인 요즘의 직장 생활인 것처럼 그려지면 직원을 존중하는 ‘척’이라도 하던 오너들이 자기 합리화를 할 구실만 잔뜩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생 유감입니다.

대체 장그래, 안영이처럼 심신을 송두리째 회사에 던져야만 살아남는 드라마가 우리 직장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란 말입니까. 이건 열정 드립 강연의 장편 드라마 버전일 뿐이에요. 아울러 직장 생활 경험 하나도 없이 직장 생활에 대해 무척 철저한 자료 조사로 작품을 썼다는 윤태호 작가한테도 불만입니다. 조사를 한 정보원들의 연령이나 경험이 혹시 획일적이진 않았는지 묻고 싶어요. 전 미생 첫 회를 보는 순간 (미생 웹툰은 보지도 않았고 작가에 대해서도 아무 관심도 정보도 없었죠) 아 이거 누가 직장 생활 경험은 없는 작가가 자료 조사해서 쓴 티 팍팍 나네. 그랬거든요? 그런데 왜 미생이 직장 생활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완벽하게 갖춘 거 마냥 대우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물론 어떤 작품을 쓰려면 반드시 그 직업군에 대해 작가가 체험을 하고 써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에요. 하지만 사랑과 환상과 추억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체험 삶의 현장 같은 드라마를 쓰려면 적어도 다양한 정보를 방대하게 수집해서 쓰고 검증에 검증을 더 하는 건 해당 작가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전 김대리가 제일 좋습니다.....+_+

미생이란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현실감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나머지 캐릭터들은 예전에 존재했거나, 지금도 존재하지만 음지에서만 발화하기에 더 근절이 어려운. 그런 캐릭터들이라고 생각해요. 전 미생의 많은 캐릭터와 에피소드들이 심히 과장돼 있는데도 왜 사실적이고 섬세한 직장 생활 드라마라고 칭찬인지 의아합니다.

이건 마치 범죄 고발 프로그램이 범죄를 고발하고 예방하고 개선하는 게 아니라 범죄 수법을 범죄자와 예비 범죄자에게 자세하게 알려주는 부작용, 바로 그런 식의 느낌입니다.

 

먹고사니즘의 내용을 정면으로 다루는 드라마기에 실제 직장에서 그 파급 효과가 보통의 드라마와는 다름을 체감하기에 써봤습니다.

저와 제 주변만 미생의 부작용이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여러분과 여러분의 주변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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