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그것이 동질감이든 반감이든, 결국 작가와의 접점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쇳밥일지]는 여러모로 저에게 읽는 동안 유난히 제 자신을 상기시키는 책이었습니다. 일단 글투가 그러한데, 이분은 유난히 형용사나 직유법을 많이 쓰세요. 그것이 문장을 보다 유려하게 꾸미려는 자의 필사적인 펜짓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글쓰기 수업에서 종종 지적받던 문제였거든요. 아마 다른 분들은 그런 형용사 덕에 문장들을 재미나게 씹으셨겠지만 저는 종종 건더기가 너무 많은 문장같아서 제가 괜히 쑥쓰럽기도 했습니다. 일개 독자인 제가 감히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마 이 책을 쓰신 천현우님도 탈고를 하면서 어느 정도 자포자기를 한 채 그 자의식의 증거를 용감히 냈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천현우씨의 글이 불을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불에는 고정된 형태가 없고 타오르고자 하는 의지만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갑니다. 쇳물이 고여있는 듯한 그 삶속에서 불씨를 하나하나 건져올리며 그것을 글로 이렇게 태우는 것이 어떻게 처음부터 정제되고 단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지난 삶을 회고하는 글이지만 불같은 글이기에 현재와 과거의 거리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종종 그 순간에 빠져들며 허덕이거나 숨을 고르는 그 생동감에 저도 괜히 삶의 무게에 육중히 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이 그의 용접공으로서 단련되는 과정과도 겹쳐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한 그의 불꽃이 더 나은 용접을 위한 불꽃으로 보다 밀도높고 집중력높은 하나의 점에 모여가는 첫번째 발화점처럼도 느껴졌습니다. 천현우씨도 처음에는 용접을 준비하면서 어떤 과정에서는 쇠판에 구멍을 내기도 하고 산소절단기로 미숙한 용접을 다시 메꿨다고 하던데, 이번 책이 언어들을 그의 정신적 불꽃으로 얼기설기 붙여놓은 것 같았습니다. 자꾸 제가 천현우씨의 글을 평가하게 되는데, 사실 이건 다 독자로서 제가 얻은 감명을 위한 하나의 전제라는 변명을 좀 하고 싶습니다. 천현우씨가 이 책을 쓰기까지 단지 언어들을 자르고 붙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몇십년 삶을 통째로 잘라내고 붙이고 떼어내고 하는 과정들을 거치면서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을지요. 재미있었고, 너무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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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 재미있게 술술 넘어가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삶이 아주 어릴 적부터 현실로 닥쳐온 사람의 삶이 글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니까요. 저는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지만 종종 대학졸업장과 무관한 현장을 겪을 때가 있었는데, 그 지독한 현장의 노동강도 속에서 학벌주의의 형벌을 몸소 체감하곤 했습니다. 아마 듀톡에서도 그런 체험을 하신 분들이 많으실텐데, 저 같은 경우는 택배 상하차 일을 하면서 종종 그런 걸 느꼈거든요. 악명높은 한진택배에서 반짝 일을 했었는데 그 때 하루에 45000원 일당을 받고 어떻게 오후 여섯시에서 오전 여섯시까지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장에서는 종종 이탈자들이 생겼고 제 평생 제일 길었던 밤들이 시작되곤 했습니다. 새벽에 비둘기가 현장에서 종종 얼쩡거리면 이제 이 일이 끝나는구나 싶어 안도했고, 퇴근하면서는 오전반을 보면서 또 괜히 몸서리를 쳤구요. 그런데 이것도 고작 한달 남짓 일한 거라서 그걸 도망치지 못한 20대 전체로 체화한 천현우씨의 삶은 얼마나 녹이 슬고 종종 삐그덕거렸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저의 조각이 누군가에는 인생 전체였을테니까요. 


아니나다를까, 천현우씨의 삶은 절망으로 점철되어있는데, 청년으로서의 출발점부터 각박한 기능의 딱딱한 수업과 혹독한 공장노동입니다. 저는 제 주변에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미지와 불안이 꽉찬 삶을 천현우님이 살아내는 걸 보면서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번 자문했습니다.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커리어도 인정받지 못한 채로 계속 최저시급의 굴레에 갇혀야하는가. 값싸고 순종적이며 우수한 노동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대로 뺑뺑이를 돌며 살면 되는 것인가. 이것은 사실 모든 노동자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학교 졸업장 보유자와 비보유자 사이의 갈등으로 계급적 다툼이 한번 더 생길 뿐이죠. 그리고 천현우씨가 어렸을 적 받은 아동학대와 가난까지 정확히 첨부해서 읽다보면 4계절이라는 것도 공평치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생이 봄이라는 순간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동창인 이은주씨를 공장에서 만나 이런 저런 세상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짝사랑하는 마음을 키워나가지만 천현우씨의 첫 봄바람은 아주 쉽게 끝납니다. 여러가지 현실적인 고난과 그 고난으로 생긴 자괴감 때문에요. 청년이 자신의 청년기를 가장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연애를 이렇게 접으면서, 천현우씨는 훨씬 더 퍽퍽한 청년기를 보내게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인셀'이라는 남자들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저자인 천현우씨는 끊임없이 자학을 하며 연애를 꿈도 못꾸는데, 거기에 다른 경제적, 사회적 반동을 꿈꿀 수조차 없는 상황에 놓인다면 그런 상황에서 과연 손쉬운 스트레스 해소를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면에서 수많은 여성혐오들은 결국 도덕의 문제만이 아니라 계급투쟁이 좌절된 결과로 비롯된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천현우씨는 이 책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못생긴 남자라고 묘사하니까요. (이 책에서 꽤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연들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여성들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연애란 단순한 성적 충동의 해소가 아니라 사회적 성장의 중요한 계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힘들게 학교를 다니고 일을 하고 산업공익요원으로 일을 하다가 천현우씨는 사기꾼에게 어머니가 모은 돈을 홀랑 털리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사람의 인생이 어쩜 이렇게도 기구한가 싶은데, 어쩌면 사회적 약자들이야말로 이런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간다는 점에서 단순히 개인의 불행으로만 여길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단호하게 돌파해나가는 천현우씨도 참 대단하도 싶은데,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기초수급을 받을 수 있게 된 사회적 혜택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다시한번 사회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런 정보나 혜택을 충분히 접하기 어려운 것이야말로 소외계층의 또 다른 비극이고 자신을 갈아나가는 삶의 연속이 되는 과정이기도 할 것입니다. 최저임금 노동+사회적 복지 일절 모름+그 과정에서 몸이 상하고 사회적으로 피폐하게 되는 과정은 천현우씨의 개인적인 고백만은 아니겠지요. 


그 와중에도 천현우씨는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는데 그게 바로 용접입니다. 얼핏 보면 위험해보이지만 그는 그 일을 낭만적으로 여깁니다. 이 책 말미에 나오는 청강대에서도 그 불꽃을 다루는 과정을 이야기하며 노동자의 자부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하는 일을 단순한 돈벌이나 형벌로만 여기지 않게 된 것은 그가 만난 말재주 좋은 포터 아저씨 덕분입니다. 그는 천현우씨에게 우리가 하는 일은 사실 멋진 일이라는 말을 하면서 노동자로서의 자기혐오에 빠져있던 천현우씨에게 작은 깨달음을 줍니다. 참 모순되어보이지만 어찌보면 양립가능한 것이 이 노동자의 프라이드가 아닐까요. 하는 일에서 의미를 느끼고, 아름다움도 찾으면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본교육과정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가 그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지, 그것은 따로 생각해야할 문제입니다. 현실적인 처우와 박봉은 노동자의 자긍심을 꺾어낼만큼 무자비하니까요.


'기술 배워야 돈번다'는, 이 유물론적이고 직관적인 말은 천현우씨의 삶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기사시험을 보고 천현우씨는 용접공이 되는데 성공하지만 천현우씨의 또 다른 숙제가 있으니 그것은 좋은 직장을 잘 고르는 겁니다. 왜냐하면, 용접공을 후려치는 곳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어쩌면 이 또한 20대 초기에 공장들을 다니면서 온갖 열악한 경우를 다 겪었었기 때문에 발휘하는 지혜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노동자에게 그렇지만, 이렇게 기술직 혹은 현장직을 전전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직장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저 돈 벌게 해줄테니 최저시급을 주든 적정일감이 어느 정도가 되든 무조건 일하라는 그런 곳들에서 천현우씨는 진저리를 칩니다. 그러다 간신히 자리를 잡은 곳에서 점점 용접 솜씨도 좋아지고 그곳에서 사람들과도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천현우씨가 자기 삶에 만족하고 끝일 리가 없죠. 퇴근하는 버스를 타면서 천현우씨는 자신의 모습과 '냄새'를 걱정합니다. [기생충]에서 그렇게나 말했던 냄새는 천현우씨의 삶에서 훨씬 더 서글픈 자기연민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러다가 천현우씨는 회사의 경리 초원씨와 독서를 계기로 가까워집니다. 이 부분은 뭔가 너무 간지럽게 써져서 제일 흥미로운 부분임에도 제일 건성으로 넘기게 되었는데요. 아마 노동자의 투쟁을 일관성있게 '고통스러운' 이야기로만 읽고 싶은 독자로서의 제 욕심을 좀 깨트려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책에서 묘사하는 천현우씨와 초원씨의 '썸'이 너무 서브컬쳐 장르물처럼 쓰여져서 오그라들기도 했습니다. 천현우씨의 책에서 초원씨는 뭔가 '흥칫뿡'하는 여고생처럼 그려지는데 이게 정확한건지도 싶고요. 어쩌면 천현우씨의 첫 썸의 기억은 그 동안 학습해온 서브컬쳐물 때문에 그렇게밖에 표현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초원씨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울로 떠납니다. 두 사람의 인연이 계속 될 것 같았지만 이 챕터에서 거의 마무리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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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현우씨는 이후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자신이 쉬는 시간에는 책을 읽었고 또 글도 틈틈이 썼었다고요. 어쩌면 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 불운하게 육체노동의 지옥에 떨어진 이야기라고 이 책에 계급적 해석을 할 수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꾸로, 지식 혹은 글이라는 것은 육체노동의 계급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라 해석해볼 여지도 있습니다. 천현우씨는 전문적인 글쓰기 수업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많이 읽는 다독가들은 많지만, 그 사람들이 전부 글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천현우씨는 글밥을 먹을 팔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재능이라는 것은 능력의 우위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일을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이끌림'을 뜻하기도 할 것입니다. 천현우씨에게 글이란 또 다른 불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여러가지 사회 이슈가 떠올랐습니다. 만일 도서관이 없었다면 천현우씨의 글의 근간을 이루는 다른 책들의 정보들은 천현우씨에게 제대로 유통될 수 있었을지. 도서관 관련 예산 삭감 이슈를 보면서 미래의 천현우씨들이 소멸되는 것은 아닐지. 꼭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책이 줄 수 있는 정서적 안정과 지적 탐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지 하는 것들이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이른바'교양'이라 칭하는 것이 계급론적 세계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증거인 것 같기도 합니다. 동시에 제가 전에 봤던 [광부화가들]이란 연극과도 좀 연결되는 지점인 것 같아서 흥미로웠습니다. 예술적 열망, 재능, 혹은 본능은 누구에게나 깃들어있고 그것은 오히려 계급적 구분과 무관하게 최대 다수에게 보편적으로 발굴되거나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천현우씨는 후에 청강대 축사에서 밝히길 자신이 글쓰기를 놓지 않은 덕분에 글근육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예술이 단순히 재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꼭 자기극기처럼 수련을 하면서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만을 뜻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근육은 쓰면 쓸 수록 발달합니다. 발달된 근육은 특정한 상황에만 어떤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우리 몸을 늘 지탱하고 움직임을 보조합니다. 글이란 것도 그런 반복적 작업이 어느 정도 자기자신을 끌어올려주진 않을까요. 일상 속에서의 반복, 이것이 어떤 면에서는 노동의 개념과 합치됩니다. 예술은 노동과의 반의 관계에 있거나 저급과 고급의 단계별로 나눠져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꾸준함을 요하고 그걸로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성질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노동을 노동으로만 치부하는 그 계급론적 시각에서 용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작가를 통해 노동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뒤집어서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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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담고 있는 창원의 여러가지 디테일함은 시각적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방 출신인 저에게 비서울인의 시각을 새로 제공해주었습니다. 책에서 넘쳐나는 여러가지 사투리들, 그리고 현장의 용어들... 삶은 도시 혹은 서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지방에서의 삶은 반드시 서울입성을 위한 준비과정만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화이트칼라가 되기 위해 지방을 탈출하는 것이 당연한 공식이 되어버린 21세기 한국에서, 이 책이 들려주는 지방 노동자의 삶은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주목해야할 것이 아닐까요. 정작 우리는 세계 속에서 빛나는 한국, 한국적인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서울제국주의적인 국가에서 지방의 삶을 보는 것에는 조금 인색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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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를 담고 있지만 가장 진하게 담긴 것은 노동자로서의 고통입니다. 그의 일화들은 수용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그것처럼 낭만이 빠져있고 생존의 아득한 고통이 담겨있습니다. 운좋게, 혹은 당연하게 어느 실내에서 컴퓨터를 두들기며 사는 우리들은 이렇게 차현우씨가 몸바쳐서 쓴 책으로 아주 안전하고 편안하게 그 삶을 만끽할 수 있겠죠. 이 책을 읽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노동자를 인간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지 최대한 리얼하게 상상해보는 것은 아닐까요. 어떤 노동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그러나 노동으로 자아를 세우고 지킬 수 있을만큼 한국의 노동시장은 행복한 곳은 아닙니다. 천현우씨가 글로 쌓아올린 이 철골에서 그의 삶이 튀겨댄 불꽃의 흔적들을 한번씩 살펴보는 것은 제가 여태껏 모르고 있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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