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517553.html



‘나는 왜 파업에 참여했나’ MBC 기자의 편지



<문화방송>(MBC) 노조가 김재철 사장 퇴진을 위한 파업에 들어간 지 5일로 1주일째를 맞았다. 보도국 기자들이 공정보도를 요구하며 제작 거부에 들어간 지는 12일째다. 사쪽은 파업 대체인력 채용을 공고하는 등 강경방침으로 맞서고 있다. 파업이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문화방송의 한 젊은 기자가 왜 제작 거부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시청자에게 고백하는 편지를 <한겨레>에 보내왔다. 인사상의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어, 익명으로 편지를 싣는다.



실망하거나, 혹은 기다리고 계실 당신께

너무 늦은 것일까요? ‘당신’이라는 살가운 이름으로 국민 여러분께 편지를 쓰기에, 지금의 엠비시는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대에서 실망으로, 실망에서 분노로. 무너진 엠비시를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이 어느새 참 많이 바뀌었단 걸 저희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까요.

뉴스 제작을 거부한 지 12일, 총파업에 돌입한 지 1주일이 지났습니다. 이제껏 뭘 하다 뒤늦게 일어섰냐는 질책을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처음엔 억울하기도 했지요. 이명박 정부 아래 지난 4년 동안 이번이 다섯 번째 파업이니까요. 나름대로 힘을 다해 싸웠고, 끝에는 매번 무참히 부서졌습니다. 해고와 징계를 받은 선배들도 있고, 강경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지금도 한직을 떠도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몇 달치 월급보다, 징계의 위협보다 방송이 망가지는 걸 내버려둘 수가 없어 분기를 삼키고 현업에 복귀했지만, 그때마다 방송은 더 심하게 망가져 갔습니다. ‘전격적 인사조처’가 수시로 이뤄지고, “아무개는 강경파라 민감한 자리에 둘 수 없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습니다.

기자가 쓴 기사 원본과 부장의 손을 거친 수정본을 각각 보존하는 건 방송뉴스 데스킹 절차의 기본이지만, ‘번거롭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정치부와 경제부 기사에선 일선 기자의 의도가 담긴 원본을 따로 남기지 않게 됐습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기사를 고쳤는지 들춰볼 수 없게 됐다는 뜻입니다. 시청률이 잘 나온다는 이유로 이른바 ‘생활밀착형’ 아이템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조중동이 쓴 기사를 받아쓰라는 취재 지시가 계속 내려오면서 엠비시 뉴스 안에서 비판적인 심층 기획과 발굴 기사는 자연히 줄어들었습니다. 하루하루 지시를 받아 기사를 ‘찍어내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기자들이 어떤 식으로 취재를 해 오든 결국 결과물은 윗선의 의도대로 짜맞춰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사 끄트머리 “엠비시 뉴스 아무갭니다”라는 한 문장을 차라리 빼버리고 싶은 적도 많았습니다.

 일선 취재기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대로 기사를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도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니까요.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한) 엠비시의 이른바 ‘좋았던 시절’에도 취재기자와 데스크가 기사를 놓고 충돌하는 일은 다반사였을 겁니다. 하지만 요즘 벌어지는 건 서로 치받는 ‘충돌’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내리꽂는 ‘추돌’에 가깝습니다. 지난해 6월 반값 등록금을 외치는 학생들 사이에, 지난해 12월 당신이 물대포를 무릅써가며 싸우시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 현장에, 저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도 ‘다른 기사가 많아 들어갈 자리가 없다’, ‘어제와 크게 달라진 것 없지 않으냐’며 기사가 반려되거나, <뉴스데스크>에서 아침뉴스로 밀려납니다. 지난해 10월 이명박 대통령 내곡동 사저 의혹처럼 차마 내칠 수 없는 큰 논란들은 ‘콤팩트하게’ 청와대와 여권 해명을 위주로 정리됐습니다.

보도국 내부에서 수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항의했지만, 일선 기자가 편집과 기사 배치에 관여할 자격은 없다며 묵살당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지 않을 기사를 쓰기 위해 현장에 나간 저희들에겐 당신의 날선 비판이 벼락처럼 쏟아졌습니다. “어차피 안 내보낼 거 아니냐”는 당신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조직 내부의 노력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나서야, 저희는 또다시 방송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김재철 사장을 비롯한 사쪽은 지금도 “불법 파업”이라며 저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보복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각오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청자와 연애하고 있다.” 처음 입사했을 때 들었던 어느 선배의 말을 기억합니다. 엠비시는 수신료를 받지 않는 공영방송이기에, 시청자와의 관계도 전적으로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맺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말이 국민의 신뢰와 애정을 잃었을 때 엠비시는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린다는 뜻을 함께 품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절절하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은 저희에게 실망하고 돌아선 당신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구차한 연애편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만큼은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가장 소중한 가치인 당신의 사랑을 놓치고 만 지금 저희에겐 더는 잃을 것도, 더는 물러설 자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켜봐 주세요. 엠비시가 제자리를 찾기 위한 투쟁의 증인이 되어 주세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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