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삼국까페의 성명서가 올라오기 전에 쓴 글임을 밝힙니다.)

 

 

 

무얼 선동하느냐고요?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나꼼수를 까려드는 거냐고요? 아닙니다, 아니고요. 나꼼수 자체는 저에게 더 이상 따끈한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호기를 만나 ‘섹슈얼리티와 권력’이라는 주제에 대한 논의들은 더욱더 풍성하게 이어져나가야 않겠느냐! 하고 선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고 커밍아웃하게 되었군요. ㅎㅎ

 

저는 마돈나를 사랑하는 여성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이번 비키니 가슴 사진 시위는 불편했죠. 어떤 분들이 보시기엔 참으로 모순이 아닙니까? 저도 좀 캥기더라고요. 마돈나는 미국에서 ‘마돈나 학’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아이콘이죠. <마돈나의 이중적 의미>라는, 제가 이름만 알고 읽어보지는 못한 책도 있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마돈나를 사랑하는 여성주의자로서 공부 좀 해둘 걸 하고 후회가 되었습니다.ㅋ 그래서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습니다. ‘마돈나’랑 ‘페미니즘’ 이렇게 두 글자를 넣고 구글을 돌렸더니,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오더군요.

 

마돈나의 ‘버진’은 지금도 유효하다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4573&section=sc7

 

전문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만, 제가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인용해보겠습니다.

 

‘여성 이미지’로서의 마돈나는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성적인 ‘진실’(고정관념)을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칠 만큼 충실하게 연기해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은 성녀와 요부 중 어느 한 쪽에 반드시 속해야 한다는 수행원칙을 집착적으로 따르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욕망은 현실 질서에서 성적인 실천이 가져올 수 있는 갖가지 양상을 전시하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그녀는 남성의 시선에 굴복하는 척하면서 그 시선이 지닌 힘을 패러디하는 한편, 대중매체에 여성의 몸이 전시되는 것에 무조건 적대감을 보이는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신경을 건드린다.” (『포스트모던 신화 마돈나』 105쪽)

 

아이쿠! 이쯤에서 저는 제 자신이 ‘무조건적 적대감’을 보였던 “급진적 여성주의자”인 건가 하고 흠칫 하였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에겐 그렇게 보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겠죠. 제 스스로 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비밀입니다. 'ㅅ' ㅋㅋ

 

그런데 제가 이 기사에서 더 공감했던 부분은 이거였어요.

 

『호모 punk 이반』이라는 책에서, 앤 크벳코비치는 마돈나에 대해 ‘변화된 사회에서는 보는 것만이 권력이 아니라 ‘보여지기’도 권력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스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앤 크벳코비치도 인지했듯, 마돈나가 남성문화의 시각적/성적 대상이 되면서도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건 그녀의 우월한 사회적 위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소외된 인종, 계급, 성적취향이 자본에 의해 (예컨대 월드뮤직이나 퀴어영화처럼) 새로운 트랜드로 거듭나는 최근의 쟁점과 닿아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요.

누구나 그녀처럼 ‘보여지기의 권력’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힘없는 사람들이 권력의 눈앞에 마구잡이로 발가벗겨졌을 때 더 큰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고요. (지난 기사 중 “최신 여성 팝음악의 어떤 환상에 대하여”가 이 이야기와 관련됩니다.)

하지만 마돈나의 ‘버진’이 가진 특별한 영역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만들어진 개념이지만 분명한 현실효과를 지닌 그것은, 세계를 지각하는 독특한 방식이면서 팝 문화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마돈나는 한 방향에서만 정의되던 ‘버진’을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이 혼재하는 예술로 탈바꿈하여, 시각적인 음악에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였으니까요.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제게 마돈나는 이미 성공하여 안전해진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소위 ‘성적대상화’하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상품화하든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지켜볼 필요가 없어요. 게다가 마돈나는 ‘여성이라면 성적으로 조신해야 한다’는 스테레오타입을 깨트려주었다는 점에서는 분명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여전히 매체에 재현되는 여성들의 이미지에 민감해지는 것은 원해서 보여지고, 그래서 보여지기의 권력까지 획득한 여성들보다는 원치 않는데도 보여지고, 보여졌으나 권력 따윈 획득하지 못한 여성들이 많은 현실적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상품화가 여성들을 위한 권력 획득 방식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고 자리잡아가는 것이 여전히 어딘가 한쪽으로 기운 모양새의 해방이라고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방식이 기존의 사회가 가장 허용하기 쉬운 길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고, 그 자체가 새로운 스테레오타입으로서 권장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기사에서 관련 기사로 소개한 기사도 마저 링크해보겠습니다.

 

최신 여성 팝음악의 어떤 환상에 대하여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4398&section=sc7

 

마찬가지로 제게 인상적이었고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겹겹의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으나 새로운 여성 이미지들은 유사한 이면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시각문화가 끈기 있게 내세우는 여성의 인간화는 여전히 ‘남성에게 매력적이어야만 하는 여성’을 교묘한 전략과 착각을 동원하여 묘사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에게 유포된 이와 같은 ‘최신’ 여성의 표피적인 지위와 권한이 지나치게 천편일률적이며, 그것이 반복되는 여성문제들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해 여성해방 신화를 비판하는 행위들이 고루하거나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치워버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중략)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말처럼, 어떤 면에서 현대 여성은 남성을 성가시게 하지 않을만큼만 독립을 배웠다. 남성에게 경제적, 심적으로 의존하여 생기는 짐을 덜어주려면 “내 인생은 내가 모두 책임질 것”이라고 선언해야 하고, 순결주의에 휘둘려 남성을 짐승으로 몰거나 책임지게 하지 않으려면 개방주의자(과연 무엇을 개방해야 하는지는 생각해 볼 부분이 많을 것이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남성의 시각에서 유쾌할 정도로는 여성스러워야 한다. 그리고 ‘진짜’(?) 페미니스트여서는 안 된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 자본주의 문화의 현재를 지탱하는 가장 큰 동력을 해방의 신화라고 본다.

 

개인주의는 사람들을 문제의 뿌리에 다가서게 하기보다는 낭만주의적으로 미래를 낙관하게 만든다. 한 백인 여성뮤지션이 락음악과 일탈을 싫어하는 숙녀 이미지의 다른 여성들을 비웃을 때처럼, 어떤 흑인 여성뮤지션이 옷에나 신경 쓰는 ‘한심한’ 여성 백인 거식증환자들을 당당하게 놀림감 삼을 때처럼, 우리는 독립적이지 못한 여성들을 혐오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가 동일하게 마주하는 남성중심성에 대한 비판은 그저 “날 만족시켜봐”, “나는 사랑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라는 식의 남성문화 모방으로 그칠 때가 많다. 여성도 자유롭게 요구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팝문화의 시각이나 해결점은 현실의 사회적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여성 팝문화는 보수주의를 조롱하고 자유분방함을 주창한다. 하지만 그러한 반란들은 실질적인 제도와 관계에 변화를 만들어 내거나 공동의 각성을 이끌어내기에는 모자람이 많다. 그것은 여전히 남성에 의한 여성상의 한계지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여성 이미지에 편협함과 정치적인 무력함을 한층 강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개인주의적 권리 획득의 노력은 권리를 갖지 못한 여성들을 계속해서 소외시키고, 그 결과 그들이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열등인자로 취급되는 상황을 역설적으로 증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이 많지만, 굳이 그걸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소모적이고 생산적이지 않은 논쟁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제가 ‘끈질기게 선동하는 여성주의자’를 자처한 것은 누구를 비난하거나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한 그리고 충돌하는 목소리가 놓인 사회적 맥락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음악 장르 중 하나인 힙합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일까 합니다. 힙합은 아직까지는 누가 뭐래도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음악이죠. 물론, 끊어지지 않고 명맥을 잇고 있는 멋진 여성 래퍼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정말 엄청나게 섹스어필하는 방향으로 컨셉을 잡아야 살아남습니다. Lil Kim이라든가 Foxy Brown 등으로 대표되는 여성래퍼들이 그렇지요. 이브 또한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음악적 자율성 때문에 조금은 다른 평가를 받는 듯 하고(참고 http://www.weiv.co.kr/review_view.html?code=album&num=839), 그나마 이 방향에서 멀리 가서도 살아남은 것이 Missy Elliot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힙합을 좋아하다가 가장 충격 받았던 일 중 하나는 Funkdafied라는 걸출한 곡을 불렀던 Da Brat 언니가 갑자기 섹시섹시 컨셉으로 방향 전환을 하여 나왔던 일이었습니다. 흑. 언니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하고 슬퍼했으나 그래야 커리어에 도움이 된다니 어쩌겠습니까. (Da Brat이 너무너무 그 컨셉으로 가고 싶어서 그랬는지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도구 삼아 권력을 획득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분명 의의가 있지만, 동시에 그것만이 여성이 주체로 인정받고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한정된 길이 되는 위험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을 포함하여 어떤 하나의 젠더로 고정될 수 없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고 권력을 획득하는 길이 더 넓고 다양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일종의 견제구를 던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저는 제가 ‘선동하는 여성주의자’ 소리를 듣더라도, 꼴페미에 가슴이 작아서 열등감을 가진 여자 소리를 듣더라도 계속해서 예민하게 촉을 세우고 시끄럽게 떠들며 살아갈 생각입니다. 쫄지마 씨바, 계속 말해도 돼!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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