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영화평론가의 SNS에서...

2019.06.22 18:58

어디로갈까 조회 수:2395

1. ... <기생충>에 관한 짧은 감상을 읽어봤습니다. (막내의 권유/고자질로. - -)
열몇 줄 정도의 분량으로 보나, 시니컬한 분위기로 보나, 그저그런 배설 용 낙서였어요. 아무튼 그 짧은 글에서 제 눈길을 잡은 건 이 문장이었습니다.
"진실을 밝히자면 대개의 영화평론가들은 구라라는 재능 외엔 별 재능이 없는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 지망자 출신들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요?  창작의 재능이 그렇듯 비평도 천분을 타고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천분이라는 말로 그 작업에 대한 설명의 시작과 끝이 이루어질 순 없는 거겠지만, 어느 분야든 평론가가 재능이 부족한 그쪽 예술 지망자 출신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창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 아는 것에 대해서는 비평가보다 낫지만,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비평가가 아닌 일반 감상자 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비평이란 정신의 균형을 갖추고 있거나, 적어도 균형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작업이죠. 그들은 모든 것의 바깥에 있는 사람입니다. 비교하여 평하자면 바깥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 '밖'에만 있는 사람이 '안'을 어떻게 잘 알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평론가란, 사는 듯도 하고 살지 않는 듯도 하고, 살면서도 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음?)

제 눈에 좋은 평론가의 움직임은 어딘가 건축적으로 보입니다. 그의 비평- 정신에서는 언제나 여러 개의 공간이 보이고, 그 공간들 안에서의 이동이 보입니다. 날카롭고 매서운 검수가 집을 무너뜨린다든지, 돌연 새로운 장을 만든다든지 하지 않고, 비평의 대상을 놓여질 자리에 합당하게 가져다 놓으며 총체적인 공간을 만든다는 느낌이 들어요.

덧: 저는 아직 <기생충>을 안 봤습니다. 언젠가부터 대부분의 영화를 온갖 평들을 다 섭렵한 뒤 (스포일러 따위 제겐 함정 아님.) 끝물에 느긋하게 보곤 합니다. 이상한 취향이죠? 시간 내기 어렵/귀찮은 게 가장 큰 이유인데, 이런 감상법의 장점이라면 남들이 못 본 1mm를 기어코 발견하게 된다는 것. - -

2. 그의 SNS에서 몇 페이지를 거슬러 내려갔더니, 문제작을 모방한 혐의가 있는 영화에 관한 언급들이 있더군요.
그걸 읽노라니, '탁월한 모작만이 원작의 열악함을 드러낸다'고 한 라 로슈푸코의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패러디에 대한 해석으로 생각해도 좋을 말이죠.
누군가 '나(의 작품)'를 모방했다 치죠. 그 모방된 결과물의 인상이 '나'에게 혐오감을 갖게 했다면, 결국 모방의 대상이었던 '나'는 혐오할 만한 작품을 만든 것이지 않을까요?  이 추론은 '누군가' 보다는 '나'에게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므로 '누군가'에 피해를 주는 악덕은 없습니다. 그저 가없는 부끄러움이 '나'의 몫으로 주어질 뿐.

2-1. <그럴싸한>모방과 <그럴듯한>모방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 용법으로는 <그럴싸한 모방>은 사기성이 있는 겉꾸밈이고, <그럴듯한 모방>은 개연성이 성립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그럴싸함'은 누군가의 모방에 의해 폭로되고, 나의 '그럴듯함'은 누가 모방해도 걸림이 없어요. 

2-2. 모방이란, 어떤 정황 속에서 이루어진 A라는 양식의 행위를 다른 정황으로 옮겨놓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정황 혹은 맥락이 달라졌을 뿐이라면, 모방은 A라는 행위를 다른 빛으로 조명한 것에 불과한 거죠. 따라서 조명을 달리 했을 때 A라는 행위의 열악함이 드러났다면, A는 모방에 의해 최악의 비평을 받은 셈이 됩니다. 그러나 그 열악함은 모방되기 이전의 A 속에 이미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비평 또한 '다른 빛 아래에서 모방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비평의 유일한 통로는 아닌데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식이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7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81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20
20 뭔가가 소중하고 아름다워야 존중받을 수 있는 건 아니죠 [17] 타락씨 2021.09.04 957
19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의 남자... 과연 그의 선택은? [10] 데메킨 2015.12.15 2015
18 드라마의 주인공이 예쁘고 잘생기지 않아서 [10] 해삼너구리 2015.07.01 3347
17 우리중에 댄서가 숨어있는 것 같아.. [12] 칼리토 2014.02.12 2421
16 스레딕, 괴담, 문제의 그들, 기독교, 관심병 [3] TooduRi 2013.05.28 2735
15 도대체 에바Q는 무엇일까요?(많이 스포) [5] 바보마녀 2013.04.27 2069
14 주말의 영화잡담 - 미스트 흑백버전, 플라이트 [3] 룽게 2013.03.03 1625
13 그 회사가 그럴 수 있는 이유 [2] 부기우기 2013.01.15 2526
12 국정에 이런 해결법도 있군요. [8] 닥호 2013.01.03 2250
11 [바낭] 3월에 이탈리아+프랑스 여행을 갑니다 / 박근혜 보좌관 사망 [9] 정마으문 2012.12.02 2564
10 그런데 단일화 후보는 안철수 후보가 될것 같습니다. [21] 가라 2012.11.14 4277
9 일 할 때 음악 들으시는 편인가요 ? [23] 작은가방 2012.11.13 1941
8 리즈의 LG 디스 [3] beer inside 2012.09.21 2002
7 얼라리요? [10] 이요 2012.03.29 2082
6 좋아하는 장기하와 얼굴들 노래 두 개 [1] @이선 2011.12.07 1087
5 SMP에 대한 잡담 [11] fysas 2011.10.20 2565
4 [바낭] 밑에 '여왕벌 앞에 서면 작아집니다'란 제목을 첨 봤을 때 [4] 사이비갈매기 2011.06.15 1765
3 현실에서 여러분은 필라인인가요 독라인인가요? [6] moonfish 2011.05.27 3034
2 악마의 앱 "오빠믿지" 개발자 만나보니... [10] 사과씨 2010.10.19 5401
1 새만금사업이 산으로 가나 봅니다. [5] soboo 2010.08.21 265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