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참 많이 왔었지, 라는 노랫말처럼 그날도 비가 내렸어요. 칼퇴근에 목숨을 걸면서도 숫자 6에 정확히 겹치는 세 개의 시계바늘을 보고도 용수철처럼 튕겨나 연구소를 나가는 대신 나는 계속 꾸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일이 남기는 했지만 일 하기는 싫었고, 그나마 드물게 서로 눈치 봐가며 ‘같이 한 잔 할까?’ 싸인을 보내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있었다 한들 누굴 딱히 만나고 싶지도 않은 저녁. 집에 가기 싫은 저녁.

   

   그럴 때 여러분은 어디 가서 뭘 하시나요?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 딱 한 잔만 마시고 가고 싶은 제 소박한 소망은 지금껏 살면서 숱하게 정들고 또 이사를 다녔던 모든 동네에서 해결되는 운이 좋았습니다. 허름하고 좁은 술집에서 마티니나 진토닉을 한 두잔 마시고 아무와도 말 섞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가는 시간. 술잔만 응시하는 시간. 아무도 나를 건들지 않고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고 믿는) 그 정지된 시공간에 대한 절박함에 대해 그러나 나는 아무에게나 쉽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오래 전, 그렇게 병적으로 잠을 자도 늘 부족하기만 한 수면 때문에, 누구에게도 무엇으로부터도 방해 받지 않는 단 몇 시간의 완벽한 잠을 자기 위해 숱하게 망설이고 두려워 한 끝에 혼자서 허름한 호텔에 들어가 잠들어 본 적도 있다는 것을요. 그때는 담배를 맘껏 눈치 안 보고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해서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아무하고도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이 절박함에 대해 입을 열기란 대단한 각오를 해야 하는 부담이 따르니까요. 내 의도가 어떻든 남들 눈에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이상한 여자 취급을 감내한다거나 그런 행태에 대해 변명처럼 부연해야 하는 피곤함을 동반하는 게 당연하다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저런 날은 내게 가끔 옵니다. 없는 집 제삿날보다 더요.

   

   그 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빈 핸드폰만 잠깐 일별하다가 집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고 동네에 도착했습니다.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짧은 순간까지 발걸음은, 조그만 물웅덩이조차 피해서 돌아가 죽음까지의 시간을 연장한다는 사형수의 그것처럼, 어디든 가야하는데 그곳이 집이어서는 안 된다는 번민으로 방향을 잡지 못하다가 늘 나가는 출구와는 다른 출구로 향하게 됐어요. 서로 다른 방향에서 뚫려있는 치즈구멍 같이 생긴 게 또 지하역 출구 아니겠어요? 연결되어 있고 또 단절되어 있어 같지만 전혀 다른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하는. 눈을 감고도 오를 것 같은 5번 출구 말고 1번을 선택하는 것조차 일탈로 느껴질 만큼 일상은 무의미하고 무료하고 나는 점점 지쳐만 가고. 그냥 딱 한 잔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꺾은 걸음. 밖으로 나가니 과연, 사는 집 일대에선 보기 어렵던 네온간판들이 발하고 이제 막 시작한 저녁 장사들의 흥분으로 약간의 생기마저 돌았으니까요. 그러나 역시 혼자서 들어갈 만한 적당한 곳은 쉽게 찾아볼 수 없고, 혼자서 돼지갈비를 이삼인분이나 먹던 천연덕스러움도 그날은 자신이 없어서 자꾸만 두리번거렸습니다. 이렇게 길에서 헤매다가 그냥 집으로 가겠구나 싶었을 때, 전통주점 같기도 하고 퓨전 이자카야 같기도 한 곳을 발견해냅니다. 저 정도면 되지 않을까. 마음이야 늘 진한 원목의 마룻바닥이 깔린 아주 조그만 비스트로를 원하고 있지만,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모든 아지트들은 없어지거나 쓸데없이 커진 지 오래고 이 동네에선 도저히 기대할 수가 없는 걸 아니까요.

 

     나는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금방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앉을 자리를 찾아요. 다행히 나 말곤 손님도 없는 시각 저녁 여섯시 사십오분. 하지만 역시 또 다른 사소한 장벽은 혼자 시켜먹기 어려운 안주들의 양과 가격이겠죠. 그래도 새우깡만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 그 중 양이 적고 가벼운 안주를 저녁 삼아 시키고 소주도 한 병 주문합니다. 메뉴판을 거둬가면서 힐끗거리는 주인의 표정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하면서요. 그러나 생각 없이 시킨 김치알밥은 의외로 너무 맛이 있었고 소주는 차고 달았습니다. 말할 상대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으니 연신 홀짝거리면서 소주 반 병을 비우는 사이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다들 나 같은 마음은 아닌지 삼삼오오 들어옵니다.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적당한 구석자리에서 혼자 술 먹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웃거나 힐끔거립니다. 역시 신경쓰지 않기로 합니다.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에게 전화통화를 시도한다거나 문자를 보내는 건, 컴퓨터를 수리하러 왔을 뿐인 A/S기사 앞에서 있지도 않은 태권도유단자 오빠를 들먹이는 것처럼 초보나 하는 짓이죠.

 

    삼분의 이쯤 술병이 비워질 때는 이미 가게 안이 제법 활기가 넘치고 막잔을 앞두고 있을 쯤엔 시끌벅적합니다. 언제나 선택이란 둘 중의 하나 아니겠어요? 한 병 더 시킬까 말까. 막잔을 넘기며 삼초쯤 고민하고 주인을 부릅니다. 한 병 더요. 어느새 내 테이블 옆까지 들어찬 사람들이 약간의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는 것쯤 신경 안 쓴다 해도, 불시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여 그에 따른 행동강령을 준비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또 하나의 안주인 것이, 혼자 술 먹는 자의 운명이죠. 그래서 마음은 늘 외로운 사냥꾼처럼 작고 어둡고 술잔만 내놓고 자꾸만 자리를 비우는 주인장 때문에 오히려 추가주문 하기가 까다로운 조그만 비스트로인 겁니다. 말도 시키지 않고 집적거리지도 않고 힐끗거리지도 않고 술만 주고 그리고 결정적으론 저를 기억하지도 않았던, 살던 곳마다 나를 위한 것처럼 기막히게 존재하던 그 조그마한 곳들이 이 동네에만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빙빙 맴돌다가 그냥 집으로 가고 또 가끔은 보쌈집에서 혼자 음식을 시켜먹고, 몇 번은 혼자서 두 시간 동안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들어갈 땐 쉽고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나올 땐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볼까봐, 나는 상대를 못 봤는데 멀찌감치서 상대만 나를 알아볼까봐 초조해하면서. 언젠가 퇴근길에 직접 목도했던 중년의 손에 이끌려 낑낑소리를 내며 모텔로 따라 들어가던 젊은 처자도 나보단 당당하던데, 나는 내가 원하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혼자만의 시공간을 위해 썩 맘에 들지도 않는 술집이나 식당에서 내 돈을 쓰고도 눈치를 보며 빌빌거릴 때,

 

    내가 진짜 나이 먹었구나 절감했습니다. 내가 외로운 건 상관없지만 내 초라한 외로움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안절부절 하는 이 지독한 외로움에 대해서요.

     

   그날 소주 두 병을 혼자서 가뿐하게 마시고 멀쩡하게 계산을 마치고 출입문을 나설 때, 때마침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던 어떤 남자와 가게를 나가려던 내가 출입문의 밀당으로 잠시 마주쳤어요. 그전부터 다른 테이블에서 흘끔거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에 비친 네온간판 만큼이나 불타오르고 번들거리던 눈빛을 일별했을 때 조금 절망했어요. 어른이 되어 누릴 수 있는 몇 가지 자유와 당당한 자연스러움의 하나라고 여겼을 뿐인 그 소소한 일상의 행태가 얼마나 왜곡되고 호도될 수도 있는지, 그래서 그 남자가 날 어떻게 한 건 아니지만. 세상은 여전히 편견과 통념에 사로잡혀 있고 이따금 열에서 한 발자국만 비껴나도 이탈하고 도태되는 거대한 매스게임이라는 것을요.  그 후로 저는 절대로 이 동네에서 혼자 술 마시지 않습니다. 오늘처럼 집에 가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은 날, 드물게 운동마저 내키지 않지만 그냥 집으로 갈 거라구요.

   

   나는 곧 이 동네를 떠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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