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바낭] 지금 사는 곳에 대하여

2013.06.22 04:36

팔락쉬 조회 수:2300

언젠가 댓글로도 달았던 적이 있지만 동대문구 전농동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동네가 워낙 낙후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성매매업소가 남아 있어 유명한 동네지요.


어울리지 않는 첫 취직을 하고 출퇴근길이 마뜩잖아 아는 사람 통해 구한 방이었어요. 바닥 장판이나 도배도 새로 되어 있지 않고, 일자형으로 밀집한 주거지역의 쪽문을 열어야만 겨우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어요. 올라가는 동안 2층 할머니가 늙은 손자와 말다툼하는 소리가 늘 들렸죠.


보통 옥탑방이라고 부를 법도 한데, 억지로 한층 더 쌓아 만들어놓은 듯한 상태라서 벽도 얇고 바람이 지나는 통로가 있었습니다. 문도 완전히 닫히지 않았고요. 화장실 안쪽 창문으로 홍등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기상천외한 공간이었어요.


우천시에는 천장 위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는 장마를 그곳에서 보냈는데, 지금도 잠잘 때 빗소리가 최고의 자장가라 생각해요. 불 끄고 누웠을 때 바로 머리 위에서 뚝 끊기는 듯하던 그 빗소리가 그립네요. 근처 철길로는 화물 열차가 지나다녔는데 어쩐 일인지 항상 새벽에 한두 번 요란한 소리를 냈어요. 이것도 이야기가 담긴 자장가처럼 들렸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지만 전혀 상상도 못했던 동네였어요. 마치 팔구십년대 홍콩영화에나 나오던 슬럼지구처럼 북적였지요.

늦은 시간 귀가할 때면 어김없이 아주머니들이 불러세웠는데 이어폰을 꽂고 노래라도 듣지 않으면 더 붙잡을 것 같아서 빠른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직장에서 회식을 하다 필름이 끊기고, 어찌어찌 사는 곳까지는 도착했지만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디 횟집에서 처음 보는 남녀와 술을 마시고 있던 적도 있어요.


문제는 저는 이들과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우리가 친구가 되었으며, 남자는 저에게 애인이라며 여성을 소개하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왜 상경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연락이 와서 내가 취해서 자신이 빌린 차에 뛰어들어 흠집이 났다며 돈을 보태달라는데 미치겠더라고요. 그리고 그즈음 성매매 여성 한 명이 집 근처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떴어요. 우연히 경동시장 안쪽을 멍하니 걷다가 하필이면 유명한 개골목을 지나게 되었던 적도 있지요. 피하려고 애를 썼지만 갇혀 있던 개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고, 겨우 빠져나와 한동안 괴로워했던 적도 있어요. 


그래서 벗어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조금 멀더라도 본가에서 출퇴근하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어요.


생각해보니, 대학에 들어가 처음 자취하게 된 동네도 만만치 않은 곳이었어요. 1층 원룸에 살았는데 같은 건물에 워낙 과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일종의 공동체처럼 꼭대기층에 모여 서로 반찬 하나씩 가져와 저녁을 먹곤 했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고 연애를 하고 얻어맞고(?) 춤을 추고 잠도 자고요. 그런데 제 방에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쥐 한마리가 같이 살았습니다.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살았어요. 자다가 발가락을 깨무려고 시도할 때도 있었고, 집을 비웠다 돌아오면 샴푸며 개인 용품들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비누를 갉아먹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쥐에게 미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친근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우린 서로 아이 컨택 한번 못해보고 방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군대 때문에요.


쥐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를 다람쥐로 극복하기는 개뿔 거짓말입니다.


지금 사는 곳에는 방 바로 앞에 숲이 있어요. 정말로 넓은 숲입니다. 그곳은 낮은 울타리 하나 쳐져 있을 뿐 언제라도 뛰어넘을 수 있어보여요. 

오늘도 새벽에 귀가해 제 방이 있는 마을 끄트머리로 향하면서 그 숲을 바라봤어요. 수령 수백년 이상 되는 나무들이 가득 가지를 뻗은 숲이다보니 어두운 형체만으로도 이파리들이 많이 우거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숲 안쪽에서 제가 사는 곳을 바라봤던 적도 있어요. 역시나 가볍게 담 하나만 넘으면 제 방으로 갈 수 있겠더군요. 그러다보니 조금이라도 취해서 집에 돌아오는 밤이면 자꾸만 담을 넘어 숲 속으로 향하고 싶어집니다. 담 바로 앞에는 가로등이 하나 우뚝 서 있는데 센서가 작동해서 가까이 가면 노오란 불이 켜집니다. 그러면 아차 싶어서 곧 발길을 돌리죠.


그냥 오늘은 이 숲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제 방 앞에는 숲이 있다는 사실.

혼자 사는 동안 가능한한 여기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처럼 쉬는 날이니 가볍게 숲길을 산책해야겠어요. 그리고 새로 산 자전거가 망가져서 수리를 다녀올까 합니다. 


생각이 많아지게 된 것은 사실 이 노래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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