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진보>를 끝냈습니다.

 

개혁되기 전 수녀원의 끔찍한 교육을 받으며 '사람'으로 망가져 버렸던 그녀는, 긴 긴 운명의 나선을 돌고 돌아 결국  '신앙인'으로 돌아갑니다. 비록 매주 교회에 나가거나 특정 신에게 기도를 드리거나 매일 명상을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 늘 침묵과 외로움 속에 신에 관한 글을 읽고 신학과, 종교와, 높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 공부하고 묵상하며 글을 쓰지요. 수녀원을 나와서도 수녀와 같이 살아가요.

 

음, 제가 왜 그녀에게 끌렸는지 알 것 같아요. 그녀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저도 비슷합니다. 기독교는 가문을 망치는 마귀라며 증오하시던 조부모님과 예수쟁이를 비꼬던 아버지와 그런 어른들 등쌀에 가고 싶은 교회를 못 가고 꾹 참아야 했던 어머니와는 달리 저는 어릴 때부터 저 혼자 교회에 다녔어요. 최초에는 어린이 주일학교 초코파이에 낚여서 간 것 같긴 하지만, 전 진지했어요. 믿으려고 믿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외롭고 무섭고 삶이 고통스러워서 누군가가 있었으면 했어요. 신이 있었으면 했어요. 하지만 도무지 안 믿어지더군요. 결국 머리가 커지고 '과학'과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던 와중, 교회와, 신과 작별했습니다. 그 후 인문사회쪽 교육을 다시 받으면서, 또 한국 거대 교회의 횡포를 보면서  '나오기 정말 잘했군-_-' 싶었지요.

 

하지만, 모태신앙도 아니었고 성실한 신자도 아니었던 저지만, 신과 작별을 한 것은 심적으로 큰 타격이었습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것이 우울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으니까요. 전 늘 신성함? 종교성? 영성?에 끌렸습니다. 영생을 얻겠다거나 하는 헛된 꿈은 애초에 꾼 적이 없지만, 그런 거룩함은 '지금 여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을 풍요롭게 해줄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교를 버리면서 그런 가능성을 잃어버린 거에요. 니체에 대해 얼핏 읽었을 때도 '이 사람도 신을 잃어버린 타격이 컸군...' 했는데, 아마 수많은 사람이 그럴 것 같습니다. 그 후 도킨스 빠질도 했다가 우울증이 더 심해지기도 하고 (머리로는 잘 받는데 몸이 안 받더군요-_- 도킨스처럼 유전자와 과학에 기대고, 이성적으로 종교에대해 냉철하게 생각하면서 살아보려고 했는데, 정말 안 되더라고요. 결국 포기..) 보통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멋진 스팩에 번듯한 직장에 좋은 가정을 꾸리며 잘 살고 싶다고, 그게 내 목표라고 세뇌하며 달리(는 척 하)다가 역시 우울증으로 수차례 픽픽 쓰러졌죠.  카렌 암스트롱이 책에서 그랬어요. '삶의 문이 내 앞에서 탕 닫혀버렸다.'  저는 제 게으름과 인간기피증 등 때문에 저 스스로 닫아버린 것 같지만..하여간 참 많이도 닫혔어요.

 

그러는 와중 종교학 수업들이나 종교 서적들, 또 나그함마디 문서 등 영지주의쪽 기독교 자료와 관련된 책들을 접하면서 내가 거부했던 것은 미국 복음주의, 문자중심주의로 돌아가는 우리나라 교회 교육이었지 기독교 자체는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면서 개신교에 대한 양가감정은 많이 수그러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명상을 접하면서 그 전까지는 멀게 느껴졌던 불교나 인도쪽 종교에도 친숙함을 느끼게 되었지요.  음, 아직도 기억납니다. 공공연하게 '무교'라고 떠들고 다녔음에도 절에 처음 들어가서 불상을 향해 절을 하던 그 순간 왠지 기독교신자가 불상에 절 할 때 느낄법한 어색하던 기분을 느꼈던 것. 불교를 책으로 접할 때는 심오하고 깊이 있고 분석적인 그 느낌이 너무 좋았는데 직접 절에 가서 의식에 참여해보니 느낌이 확 다르더군요. 개신교 예배에 움찔하는 것만큼이나 사찰 문화에 움찔... 하지만 불교 문화가 '몸'에 익숙해지고 난 후에는 전혀 문제없었어요. 역시 사람은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체험하며 알게 되는 것은 비교할 수 없더군요. 그렇게 제가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개신교 분들이 불교도나 불교 문화에 무의식적 의식적 적대감을 가지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상교육(-_-)을 받아서 그런 것도 있을테지만,  체질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면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아무리 지적이고 잘 교육받은 사람이라도 이런 체질적 거부감을 극복하긴 힘들 거에요. 이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직접 가서 경험해보는 것, 몸으로 느껴 보는 것. 그러면 몸이 알아서 적응할 겁니다. 그러니까 종교 간 대화를 많이 하면 할 수록 좋은거죠. 사찰밟기 이딴 거 말고.. (푸른 집의 누구도  '템플 스테이' 100일 정도 해 보면 좋을 텐데 -_-;;) 

 

그러니까...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고, 그래서 텅 빈 채 남아 있는 신의 자리에 새로운 영성을 채워넣어야 했던 겁니다.  '종교성, 영성'이 전혀  필요 없는 사람도 있지만, 전 아니거든요. 제게는 꼭 필요합니다. 영성은 제 삶의 큰 화두입니다. 또 다음과 같은 질문도, 삶의 큰 화두에요. 대체 삶을 잘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인간은 뭐지? 나는? 우리는 왜 이 땅에 왔을까. 제가 정말 행복해지려면 저런 근본적인 질문에 저 나름의 대답을 해야 합니다. 또 그 대답을 통해 제 삶을 변화시켜야 해요. 저 것들에 어설픈 대답이나마 시도 할 만한 과학 지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해답들은 머리는 만족시켜도 몸과 가슴은 만족시키지 못했어요.  결국 저 질문의 답은 철학이나 종교에서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믿음 체계를 실천하며 한 개인 삶의 변혁 시키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늘 종교의 전문분야였죠.

 

가장 간단한 것은 종교을 가지는 것. 하지만 찔끔찔끔 시도해 본 결과, 제도 종교에는 편입되는 게 지금의 저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적어도 지금은요. 그렇지만  종교를 '가지지' 않고도 삶 속에서 영성을, 종교성을 느끼는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관련 서적들을 즐겨 읽기 시작하면서 행복해했고 명상도 조금씩 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더 체계적인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사상 체계랄까..잘 정립된 세계관이랄까..뭐 이런 것이요. 그리고 새로운 삶의 태도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의 예를 보는 것. 이 경우에는 붓다, 예수, 마호메트 등 인간 안 같은 종교 천재들을 비롯한, 앞서 간 역사 속 수 많은 선배(?)들을 보는 것이죠.

 

아마, 그렇기에, 저는 <마음의 진보>에 손을 댔을겁니다. 그녀의 삶이 저에게 이렇게 큰 울림을 줄지도 모른 채...무의식적으로요. 하긴 삶은 늘 그 순간 가장 필요한 무언가를 가져다주기 마련이라고 어떤 영성 전통에서 주장했지요. 카렌 암스트롱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도 그런 경험들을 하죠. 그러면 일본 지진은 일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냐..화를 내며 묻고 싶지만,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겠죠. 그 악다구니와 끔찍함 속에서도 일본 사람들 중 어떤 누군가는 삶의 축복을 발견 하고 심적으로 고통을 극복하기 시작할 테니까요. 종교란 영성이란 늘 그렇게 모순적인 것..가끔은, 아니 아주 자주, 고통 속에서 피어나곤 하는 것. 부디 일본의 지진 사태가 좋아지기를 빌며..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그들의 마음이 치유되기를 빌며..

 

잡소리가 길었습니다.

 

바로 전  <마음의 진보> 관련 글은 1쪽~330쪽 (-_-)에 이르는 범위 안에 제가 줄을 쳐 놓거나 흥미있었던 부분만 발췌한겁니다. 하지만 오늘의 후반부...그녀가 '간질' 진단을 받고 알맞은 약을 처방 받고 스스로에 대해 안심하고 마음놓고 사회로 나가기 시작한 331쪽 부터 501쪽까지는, 특히 카렌 암스트롱이 종교적인 깨달음을 제대로 얻어가는 듯 싶은 마지막으로 가면 갈 수록 책의 양 페이지 거의 대부분에 줄이 쳐져 있고 난리가 난터라 책의 흐름을 압축하는 형식의  '발췌'는 거의 불가능 할 듯 합니다만..그래서 저에게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 해 볼께요.(엄청 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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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엄 머코비는] 예수가 당시 바리새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랍비 힐렐의 문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예수도 힐렐이 말한 황금률과 비슷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교도 몇 사람이 힐렐한테 와서, 자기들이 한 다리로 서 있는 동안 유대교의 가르침을 전부 암송해 보이면 자기네가 유대교로 개종하겠다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힐렐이 황새처럼 외다리로 서더니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너희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한테도 하지 말라. 이것이 유대교 경전 토라의 핵심이다.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할 뿐. 가서 배우라." ..........

 

나는 석연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힐렐이 말하는 황금률에 유대교의 가르침이 몽땅 들어있다고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하다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신앙은 어떻게 되지요? 신을 믿는 건 어떻게 되지요? 그 이교도들더러 무엇을 믿으라는 건가요?"

 

"어릴 때부터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요." 하이엄이 기독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대교에서는,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신학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처럼 정통이나 정설에 목을 매지 않아요. 누구나 복종해야 하는 복잡한 교리 따위는 없습니다. 교황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그런 선언도 하지 않아요. 아무도 유대인한테 이걸 믿으라 저걸 믿으라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상식 선에서 믿고 싶은 걸 믿으면 돼요."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믿음이 없는 종교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태어나서 철이 든 이후로 나의 신앙 생활은 공식 교리를 받아들이기 위한 안간힘의 연속이었다. 진실된 믿음이 없으면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앙은 출발점이었고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었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그 주춧돌이 흔들리니까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공식 교리가 없다고요?"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하나두요? 신에 대한 관념, 구원에 대한 관념, 이런 게 밑바탕에 깔리지 않은 종교가 가능한가요?"

 

"우리는 정설, 곧 바른 이론보다는 정행, 곧 바른 실행을 중시합니다."..."바른 믿음 보다는 바른 행동을 중시해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교리가 어떻고 하면서 수선을 피웁니다만, 생각을 어떻게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짜피 그건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시 같은 것에 불과한 거니까요. 우리 유대인은 무얼 믿느냐에는 개의치 않아요. 그저 할 뿐입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지 않고서 어떻게 신앙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단 말인가? 예수에 대한 공식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어떻게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생략...)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나는 살아오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성지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갔다. 나도 성지에 애착이 가기 시작했다.....

 

(...생략...)

 

...유대교는 그야말로 머리로 믿는 종교라기보다 실천을 통해 사는 종교였다...유대교는 일상 생활의 모든 활동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사였다. 순간 순간이 신과 만나는 기회였다. 유대인은 율법 하나를 준수할 때마다 신에게 다가서면서 일상 생활을 거룩하게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생략...)

 

....나는 십자군의 허무주의에 충격을 받았다. 십자군은 자기네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하네 손을 내밀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한테서 배우려는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의 공포와 원한을 다스릴 줄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죽이고 망가뜨리고 태우고 모독하고 부수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들의 도덕성을 무너뜨렸다. .... 십자군 이야기는 인간의 고통, 광신, 야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십자군은 희생자 증오를 낙으로 삼았다....나는..인간의 어두운 본성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는 가은 사람을 미워하면서 희열을 맛보는 존재였다...

 

...얼어붙었던 가슴이 조금씩 녹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나는 내 몸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뜻이었다..'약'...새로 얻은 감수성이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주변 어디에서나 십자군을 방불케 하는 공격성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꾸만 '다른 쪽'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작정했고 도대체 상대방이 왜 나와는 다른 소리를 하는지 이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요란한 확신은 특히 종교 문제에서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면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우리'만이 진리와 정의를 독점한 것처럼 구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생략...)

 

...[잘 나가던 방송 프로그램 제작이 이유도 모른채 엎어지고 방송국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외면함...] 또 내 앞에서 문이 닫힌 것이다. 늘 당해온 일이었다....

 

전에는 무슨 문제가 터져도 거기에 온전히 반응하지 않았다....시인 키츠가 '음산한 12월의 밤'의 '느낌이 없는 그 느낌'이라고 묘사한 그 얼어붙은 듯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의사들 덕분에 신경이 더는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이번에는 내가 느끼는 분노와 좌절과 환멸을 온전히 느꼈다....나는 너무 화가 났다...친구들은 보기가 안 좋았던지 너무 그러지 말라고 뜯어말렸지만 사실은 그만큼 내가 좋아졌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고통과 비애를 경험하는 능력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므로 이제는 영혼의 탐구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의 역사를 써 보는 것은 어떨까...

 

<신의 역사>를 쓰겠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우연히 떠오른 것이었지만 그때부터 내 삶은 확 달라졌다....영혼은 무엇이 최선인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어쨌든 그 망할 놈의 신한테 넘어가서 수녀원에 들어갔고, 그 얼어죽을 완벽주의 때문에 나 자신한테 넌더리를 치게 되었고, 신의 무관심 때문에 나는 퇴짜를 맞았다는, 가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 신이 누구한테 필요하다는 건가? 이제 신과는 인연을 끊었다고, 그래서 훨씬 더 행복해졌다고, 벌써 몇 번이나 떠들고 다녔떤가. 그렇지만, 내가 그토록 고통스럽게 긁어모았던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내 무의식 어딘가에서는 비록 내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과 나 사이에는 아직도 깨끗이 정리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 나는 신앙을 괴물로 여겼지만 무심결에 종교에 여전히 끌리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무심결에' 구원으로 한 걸음 다가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외로운 길...신에 관한 책을 쓰리고 마음을 굳혔을 때...20년 동안 나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려고 이 일도 해보고 저 일도 해보았지만 번번이 쓴잔을 마셨다. 그것은 주류 사회로 들어가려고 더는 아둥바둥하지 말라는 소리인지도 몰랐다. 나를 자꾸만 평균에서 벗어난 곳으로, 조직 밖으로 몰아내는 편견과 맞써 싸울 생각일랑 하지 말고 한번 그것과 같이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볼 때가 온 것도 같았다.

 

위대한 신화를 보면 남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번번이 길을 잃는다. 영웅은 낡은 세상과 낡은 길을 버리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지도도 없고 뚜렷한 발자취도 없는 미지의 어둠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남의 괴물과 싸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괴물과 싸우고 자기의 미궁을 탐색하고 자기의 시련을 감내해야만 자기 삶에서 빠져 있었던 것을 결국 찾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거듭나야만 자기가 두고 온 세상에 무언가 쓸모 있는 것을 안겨줄 수 있다...

 

 (...생략...)

 

....<성배를 찾아서>라는 프랑스의 오래 된 문헌을 보면 성배를 찾으려는 사람은 '스스로 점찍은 곳, 가장 어둡고 길도 나 있지 않은 곳'으로 해서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성배를 찾아 나선 기사들은 숲에서 외로운 탐구에 나섰다. 성배를 찾는 기사가 당도하려는 곳은 예루살렘이라는 지상이ㅡ 도시가 아니라 사라스라는 이 세상에는 없는 천상의 도시다...

 

......수녀원에 들어갔을 때 나는 퍼시벌 같은 원탁의 기사들처럼 성배를 찾는 신비로운 모험에 나섰다고 생각했지만 나만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남의 꽁무니만 쫓아다녔다. 스스로 길을 헤쳐 나간 것이 아니라 자꾸만 겉돈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주어진 삶의 길과 사고방식에 순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진정한 삶과는 거리가 먼 황무지로 나 앉아 있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녀원에서 나온 다음에도 '이 사람의 재주'를 탐내고 '저 사람의 그릇'을 부러워하며 나하고는 맞지 않는 목표에 여전히 매달렸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너무 확실하게 박혀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황무지에서 길을 헤맨 것이다....남들과 비슷해지고 싶었다.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남부럽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교수도 교사도 번지르르한 방송인 생활도 내 체질에는 다 맞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은 하나같이 안 좋게 끝났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보람을 안겨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아니었다. 이제는 내 손으로 점찍은 곳으로 해서, 닦여진 길도 없는 곳으로 해서, 숲으로 들어가 내 힘으로 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하지만...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그놈의 굴레' 때문에 또다시 밖으로 밀려났구나 싶었고 멀어져 가는 세상이 아쉬워서 자꾸만 돌아다보았다. 다시 모퉁이를 돌아서는 줄은 까맣게 몰랐고 '회심'을 겪으리라는 생각도 못했다.....그때 나한테 일어난 변화를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몰랐다. 10년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하이엄 머코비...신앙은 실천이지 믿음이 아니다...종교는 도덕의 미학이요 윤리의 연금술이다. 사람은 어떤 식으로 행동하면 달라지기 마련이다. 신화라든가 종교가 참다운 까닭은 그것이 어떤 형이상학적 과학적 혹은 역사적 실재에 부합해서가 아니라 생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신화와 종교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다고 가르치지만 그런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 끌어와서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진리는 드러나지 않는다.....영웅 신화의 역할은 행동으로 나서도록 사람을 자극하는 데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영웅을 일깨우는 데 있다.....

 

....나는 구도라는 것이 '진리'라든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얼마나 알차게 사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인간적 인격체나 천국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온전히 사람답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마호메트, 붓다, 예수의 원형은 모두 충만한 인간성의 상징이다...옛날에 내가 한 수도 생활은 나를 오그라뜨렸지만 참다운 신앙은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믿었다....

 

 (...생략...)

 

어떤 종교든지 아픔을 맨 위에 놓는다. 아픔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올바르게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까닭은 스스로의 아픔을 부정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아픔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기 때문이다. ... 모든 종교는 공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공감을 통해서 남의 아픔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황금률...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낸 다음 남들한테도 비슷한 괴로움을 안기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이었다....1989년 나의 마음은 아픔에 유난히 민감해졌다...자기의 아픔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의 그 심정을 나는 너무나 잘 알았다......하지만..모자랐다....공감하는 버릇이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아야 했다.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실천하지 않는 공감은 한낱 감상주의에 그치고 말지 나를 바꾸어 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생략...)

 

...[샐먼 루시디가 도피생활 와중 모든 서방세계의 '지식인'들, '문학, 예술 종사자들'은 이슬람에 맹폭격을 가했고, 이슬람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픈 저자는 <마호메트> 책을 쓴다...] ...나는 마호메트의 이야기에서 참다운 열정을 보았다...암울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았다. 중요한 종교를 세운 사람치고 마호메트만큼 많은 족적을 남긴 사람도 드물다. ...그는 껄껄 웃기도 했고 손자를 어깨에 태우고 다니기도 했고 친구의 죽음 앞에서 흐느껴 울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들을 도탄에서 구하려고 온몸으로 애쓰고 발버둥친 사람이었다. 그는 회의에 빠진 것도 있었고 상심한 적도 있었고 절망과 공포를 느낀 순간도 있었다. 종교는 숭고한 통찰의 순간에 나오기도 하지만 절망과 공포와 위기감에서도 나온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생략...)

 

..자아를 편집해서 쳐내는 것은 종교적 체험을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었다....모든 위대한 종교는 탐욕에 뿌리를 둔 공포와 아집에 젖어 있는 이기심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누누이 역설한다. 위대한 영혼의 스승들은 나를 버릴 때 정말로 내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다양한 종교 전통을 공부하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자아에서 벗어나려는 일관된 노력이 엑스타시 곧 몰아의 경지로 이끈다는 것이다...나를 버릴 때 비로소 평소의 경험을 뛰어넘는 다른 가능성에 눈뜨면서 가장 창조적으로 살 수 있다...종교사를 보면 탐욕과 이기심(인간의 타고난 본능)을 누르면서 사는 비결을 터득한 사람일수록 초월의 체험에 쉽게 이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략...)

 

...[이슬람의 전통 보시-자카트] ..온정을 자꾸만 베풀다 보면 그런 습성이 몸에 배기 마련이었고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도 사회도 바뀌어 나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았다. ..가슴이 움직이는 대로 살면서 남들이 아쉬워하는 것을 알아서 챙겨줄 때 사람은 영혼을 지닌 존재로 태어난다...반복되는 행동을 통해 새로운 자각에 이를 수 있다. 결국 핵심은 믿음의 체계가 아니라 실천 과정이라는 것이다. 마호메트가 설계한 신앙 생활은 사람을 자꾸 행동하게 만들어 그 사람을 영원히 바꾸어놓으려 했다...

 

 (...생략...)

 

..다시 <신의 역사>로...2,3일 동안 아무하고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낼 때도 있었다....외롭게 살기가 괴로워 몸부림도 쳤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펼쳐진 고요함이 긍정적 기운으로 바뀌더니 내 곁을 지키면서 부드러운 천처럼 나를 달래주고 어루만져주었다. 침묵은 듣기 좋은 콧노래를 은은하게 부르면서 내가 씨름하던 생각들을 쥐하는 듯했다....나중에는 거의 침묵을 귀로 듣는 경지....책에 적힌 단어들이 내면의 자아로 직접 말을 걸기 시작했다......머리로만이 아니라...나의 갈망과 당혹에 곧바로 말을 걸렀다.......그 안에 깊숙한 곳에 고요히 머물러 있는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의미에 귀기울이는 요령을 배웠다. 침묵은 나의 스승이 되었다.....

 

....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침묵을 중요하게 여긴다. 진리는 그저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신경질이나 근심으로 짜증을 부리지 않는 침묵은 내 마음결의 일부가 될 수 있고 그것은 조금씩 내 안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생략...)

 

..종교는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구나 그제서야 깨달았다....나는 아마추어였지만...어짜피 자기가 좋아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 아닌가. 나는 고독한 나날을 말 없이 나의 주제에만 몰두하면서 보냈다. 매일 아침 어서 빨리 책상으로 달려가서 책을 펼치고 펜을 쥐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애인과 밀회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 밤에는 침대에 누워서 그날 하루 배운 내용을 뿌듯하게 음미했다. ...내가 연구하던 신학자나 신비론자의 마음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은 초월과 외경, 경이의 순간을 잠깐씩 체험할 때가 있었다.... 어린 수녀의 몸으로 그렇게 오래도록 기도를 하면서 맛보고 싶었던 환희를 나는 공부를 하면서 찾아냈다.......

 

 (...생략...)

 

신학도 사실은 예술의 한 형식...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말할 수 없는 것을 덮치는 것'......[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세 종교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결론이 비슷했다는 것은 세 종교가 인생을 제대로 짚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했다...

 

 (...생략...)

 

..공감은 동정이나 연민과는 다르다. 공감은 같이 느끼는 것이다.....사도 바울로는 그것을 세상을 더 높은 데서 넓게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비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생략...)

 

...그렇지만 성난 독자의 항변이 귀에 들리는 듯 하다. 진리라는게 도대체 뭔가? 저자는 신이 있다고 믿는 건가 없다고 믿는 건가? 성경에서 말하는 신이 있다고 믿기나 하는건가? 개인적으로 신을 경배하기는 하는건가?....예술, 공감, 어쩌고..지엽 말단.. 결국.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이것이 중요한 종교적 물음이 아닌가?

 

글쎄...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존경받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신학자와 신비주의자 중에는 신은 객관적 사실도 아니고 또 다른 실체도 아니며 원자처럼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그 존재를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놀랍게도 있었다. 그중 상당수는 신은 차라리 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우리가 보통 접하는 현실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삼위일체설만 하더라도 신을 단순한 인격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었다. 우리가 신이라고 말하는 현실은 초월적이다... 신에 대한 모든 발언은 두 가지 요소를 가져야 한다는 그리스 정교회 입장은 그래서 수긍이 간다. 첫째, 그것은 역설적이어야 한다...둘째, 부정하는 방식으로 긍정해야 한다. ... 그저 한없는 외경심을 느끼면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

 

캔트웰 스미스...신에 대한 관념은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 그렇지 않다고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신에 대한 일련의 지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신앙인 것처럼 여기는 전통은 겨우 18세기에나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읽어 가면서 정말 얼마나 위안을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신앙은 결국 인생이 아무리 비극적으로 보여도 거기에는 궁극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치워 나가는 것이었다. 뛰어난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것도 결국은 그런 신념이었다.

 

믿는다는 뜻을 가진 영어 believe의 고어는 beleven인데, 이것은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믿는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credo는 '나의 심장을 바친다'는 코르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 나를 던진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신을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번에도 모든 종교가 예외 없이 그런 답을 주었다. 어떤 종교적 관념, 교리, 영적 체험, 봉헌 의식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판가름하는 유일한 잣대는 그것이 실제로 공감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을 알고 나서부터 내가 더 따뜻하고 마음이 넓어져서 사랑을 베푸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면 그렇게 만든 신학은 훌륭한 신학이다. [달라이라마 역시, 종교간 비교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요. 자신의 신앙이 자신을 더 따뜻하고 좋은 사람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최고의 종교라고요.] ...

 

...신의 이름으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를 죽인 십자군은 자기와 비슷하게 만들어낸 신성에다 자기의 공포와 혐오를 덧부여서 마치 신의 절대적 승인을 받은 것처럼 증오심을 포장한 데 불과했다. 인격화된 신은 이런 식의 우상숭배로 치닫기 쉽다. 그래서 지혜로운 유대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는 신을 하나의 인격으로 생각하는 데서 출발할 수는 있겠지만 신은 모든 인간 범주를 넘어서므로 인격도 역시 초월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내가 신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 좋은 영혼의 스승들은 신이 나한테 내려와주기를 무작정 기다리지 말고 예술의 초월성을 느낄 수 있는 미의식을 갈고 닦듯이 나 자신의 신성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충고했을 것이다. ... [서양의] 합리주의 이성...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 처럼 보였고 서양인은 마치 신이 논증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신화학과 신비주의 같은 직관에 의존하는 영역은 불신을 받았다. 나 자신도 그랬지만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 많은 종교적 문제를 낳은 원인이었다.......

 

.....자비와 사회 정의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특히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강조...아브라함한테서 갈라져 나온 세 종교 어디어세든 근본주의 세력은 이들이 지키려는 전통 자체를 왜곡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감이라는 절실하고 중요한 요구를 망각하고 호전적 요소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생략...)

 

공감이라는 주제...[특히]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붓다의 짧은 전기를 쓰면서 부터였다...붓다가 가르친 대로 공감을 연마하다 보면 자꾸만 나에 집착하는 올가미에서 '마음이 풀려나는' 효과를 얻는다. 불경에서는 깨달음의 가장 높은 경지인 열반이라고 부른다. 일신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이런 공감은 우리를 곧바로 신이 자리하는 곳으로 데려간다. ... 공감은 제대로 된 종교에서는 수행에서 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자아는 삶의 중심에서 내려오고 그 자리에서 남들이 들어앉는다. 그래서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이기심의 껍질이 허물어진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시야가 더욱 트이면서 법열을 느낀다. ..."자비심이 위아래로 옆으로 끝없이 온 누리에 퍼지게 하소서. 미움과 증오심 없이 한없는 선심이 온 세상으로 마음껏 뻗어나가게 하소서' [숫타니파타 118] 우리는 시야를 좁히는 개인적 호오의 감정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넘어서게 된다..

 

작고한 유대인 학자 아브라함 조슈아 허벨...우리가 자아의 박대기 저편에서 나를 놓을 때 우리는 신과 함께 자리한다....황금률에서도 짜증나는 종료, 우리와 전쟁을 벌이는 나라에 대해서 무언가 안 좋은 말을 하거나 안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말을 듣거나 그런 일을 당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를 생각하고 자제하라고 가르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나의 아집을 지키기 위해 남을 해치고 망치고 싶어하는 무서운 이기심을 넘어서게 된다. 하루하루를 매시간을 그런 식으로 살아가면 '저기' 인격신이 과연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놓고 지나치게 걱정을 할 시간도 없을 것이고 끝없는 법열을 느낄 것이다. 나 자신과 나의 이기심과 탐욕을 부단히 넘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공감이야말로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의 버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략...)

 

침묵과 고독은 껍질을 벗겨낸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세상의 아픔에 짓눌리지 않도록 우리가 쌓아올린 비정함이라는 보호막을 무너뜨린다. 껍질이 벗겨지면 늘 즐겁지만은 않다. 아니, 사실은 사회적 책임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점점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아픔은 공감할 줄 아는 영혼을 지닌 사람이 치러야 하는 작은 희생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렇게 남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데서 나는 기쁨도 맛보았다. 미처 그것까지는 예쌍하지 못했다. 내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남의 가슴으로 들어가는 버릇을 들이다 보니까 나만의 프리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때 느끼는 '무아지경'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은 말할 수 없이 자유를 느꼈다. 결국 문제는 자아인 것이다. 새벽 3시에 눈을 떠서 '왜 나한테 이런 불행이 닥치나? 왜 나는 다른 사람이 가진 걸 못 누리나? 왜 나는 사랑도 못 받고 인정도 못 받나?' 나는 이런 고민에 젖을 때가 아직도 많았는데, 이런 고통의 중심에는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붓다도 말했지만 이런 자아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벗어날 때 나는 더욱 커지고 높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 모든 위대한 종교의 내밀한 생리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슴과 머리를 닫지 않을 때만 제 구실을 하는 듯하다....

 

 (...생략...)

 

...가장 위대한 영혼의 스승들은 신은 또 다른 존재가 아니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무라고 강조했다는 사실을 입이 닳도록 설명했다......모든 위대한 종교에서는 신성은 '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내재한다고 강조한다.. 9.11은 신성의 어두운 발현이다....원수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이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헤아리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어쩌면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계시는 없음과 비어 있음을 몸으로 겪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와서 우리는 종교적 확신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정직한 모색과 회의를 하고 참회를 하고 좌표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거룩함을 찾아 나서야 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뛰어난 신학자와 스승은 결국 저 너머에 있는 것은 '무'라고 망설임 없이 인정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신에 대해서 그들이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붓다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죽은 다음에 붓다의 형이상학적 지위가 어떻게 되는지 답변하기를 거부했고 공자도 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지만 모든 위대한 종교 전통에서 핵이 되는 것은 나한테 남아 있는 유일한 것, 곧 나를 잘 써먹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이다. 우리의 임무는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것이다. 그것을 못하는 종교는 쓸모가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필요한 것은 믿음도 아니고 확신도 아니다. 나의 적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이 거룩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또 거기에 부응하여 행동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생략...)

 

 

...조지프 캠벨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지복의 길을 걸어야 한다"  설령 유행에 한참 뒤지고 건질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이더라도 나를 사로잡고 나의 넋을 빼앗는 일을 찾아내서 거기에 열과 성을 바쳐야 한다. ..'몸이 따르는 일을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나의 '지복'은 신학 공부였다. 다른 사람의 지복은 법일 수도 정치일 수도 결혼일 수도 연애일 수도 자녀 양육일 수도 있다. 그런 지복을 끝까지 따르다 보면 나중에는 인생의 알맹이와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단서를 우리는 지복에서 발견한다....

 

...나는 한 바퀴를 돌았다. 엘리엇이 쓴 <재의 수요일>에 나오는 계단을 나는 좁은 나선형 계단으로 상상한다. 나는 그런 계단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더 넓고 근사한 계단에 올라타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초라한 나의 계단통으로 돌아갔을 때 그 전에는 미처 몰랐던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 나는 혼자서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내 몸도 덩달아 돌고 내가 발 디딘 곳은 좁지만 그래도 빛을 향해서 올라가기를 나는 바란다.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마음의 진보 - The Spiral Staircase> 2004.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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