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30 15:58
제 심리상담의 대 주제 내지 커다란 숙제는 감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일 거에요. 정신분할이란 개념이 제겐 있는데, 정신분열과는 다른거죠. 정신분열증은 각각의 인격 서로가 내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 없다고 알고 있고 아예 배타적이라고 하죠. (모호하게 생각하자면 그렇다는 거에요.) 정신분할이란 자의적으로 내면을 여러 속성으로 갈라 그를 인지해보려고 노력하는 거죠. 프로이드를 오용하는 방식으로 설명해보자면, 자신의 내면에 이드와 자아, 초자아를 그려보고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고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저는 융의 분할방식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그 쪽이 더 재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라캉의 경우에는 인격이라기보단 계를 분할하는 느낌인지라 무언가를 보기엔 좀 어렵죠. 요소들을 분류된 지역으로 보내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런 식의 생각도 있습니다. 먼저, 소설을 쓰는 사람들의 소설 내용은 전부 머릿 속에서 오는 거잖아요. 그걸 전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그 사람의 내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겠지만 (예를 들어 살인자를 쓰는 사람이 살인자, 같은건 안 되겠지만) 그 사람의 상상지평 내에서 서술은 했다고 가정할 수 있겠죠? 독자의 경우에도 글을 해독하면서 자신의 상상지평 내에 어떤 식으로든 필자의 기술을 재배치 가동시킬 것이고 그건 참 기묘한 일이란 생각을 합니다. 저는 글을 읽을 때 머릿속에 그림은 잘 안그리는 편이고, 낭독을 하는 편입니다. 솔직히 소설을 어떻게 읽는지 저도 의문이에요.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도 듣는거지 본다거나 그리는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가끔 자기도 모르게 몰입할 때는 보이기도 합니다만.)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 소리나는 대로 옮겨적어요. 어쩔 때는 소리 이전에 글부터 나갈 때도 있지만요.
그래도 그림도 가끔 그립니다. 자주 하는 건 정육면체를 머릿 속에서 회전시키는 거죠. 그러다가 두 쪽으로 나누고 인접한 면으로 두 개의 직육면체를 미끌어뜨려가 서로의 둘레를 한바퀴 돌립니다. 그 이후에는 8분면짜리 3차원 그래프 축을 그려서 축을 무한정 늘려가보기도 하구요. 그러면서 그런 상상들은 [어디에] 있는 건지 생각해봅니다. 예를 들어 [눈 앞에] 있지는 않다는 거죠.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내 시야의 전경에 거대한 물체가 위치한다고 덧씌우는 것과,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검은 공간에 정육면체를 회전시키는건 전혀 다른 행위죠. 흔히 영상에서 어떤 이가 상상을 할 때 나레이션으로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게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방식을 그대로 옮겼다고 믿는 편입니다. 왜 소리인가 하면, 위에서 봤듯 시야에 [상상을 덧씌우는] 것은 생존에 매우 위험했을수도 있고, [어딘가의] 상상의 물체를 응상하는 것도 상당히 얼을 빼는 일이라 위험할테니까요. 소리는 원래부터 중첩해서 한꺼번에 들리니까 공간을 제공하는게 그렇게 위험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과연 이어폰으로 듣는 소리는 우리에게 어디에 있다고 가정되고 듣는 것일까란 생각도 가끔 합니다. 골전된다고 까진 생각 안하지만, 발성의 양 거리를 측정해서 그 위치를 가정하는 뇌로서는 [머리 중심]에서 들려온다고 착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림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소리도 [어디서] 들리느냐는 의문이 남긴 합니다. 아무래도 얼굴에 많은 감각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개중에서도 눈이 가장 예민하기 때문에 발가락에서 들린다거나 등에서 들린다는 사람은 별로 없겠죠. 상상이 구상되는 위치가 어디인가, 또는 어디로 감각하고 있는가는 매우 흥미로는 부분입니다.
되돌아와서 내면을 여러 갈래로 분할하고 인물화시켜 대화해봅니다. 이건 실질적인 대화라기보다는 각본을 짜는 것과 같아요. 약간의 경향성이 정해진 내부의 인물을 가정한 인터뷰 같은거죠. 또는 두 세명을 서로 대화를 시켜본다거나.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가 좀 그런게, 누가 들으면 [정신분열]로서 기겁하거나, [중2병]이란 이야기를 듣기 쉽상이란 말이죠. 제게는 그저 일종의 [방법론]이자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돌려서 안심되게 말하자면 [소설쓰기]와 별 다를바 없는 접근 방식인데 말입니다. 상황을 직관적으로 구체화시켜주는 좋은 방법론이 있을 때 그걸 외면할만한 능력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 사고도 좀 이상하리만큼 비타협적인 면이 있는데, 요새 부상하고 있는 감정도 그다지 정상적이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컨데 처음의 접근법은, 지금까지 말 못하고 억울하고 성장 못하면서 어디 틀어박힌 채로 지내왔으니까 이것 저것이 서툰 어린아이이지 않나 생각했는데 그런게 아니라 뭔가... 미치광이 같아요. 예전에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감각하지 않았으니까 제 정신세계의 기후와 같은 존재(폭풍이나 지진같은 자연재해이거나 날씨가 좋다거나 비가 오는 것처럼 내면적 안정)였는데 인물화되니까 다루기가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뭘 원하는지를 모르겠어요. 분노에 차있다가 화를 냈다가 울쩍했다가 어쩌면 갑자기 시덥잖은 생각들로 쿡쿡 웃다가. 한없이 우울해졌다가 재우면 자고. 과연 [성장]이라는걸 하는, 선형적인 존재의 확장이 가능한 존재인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원래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태인게 감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3년 이상을 꾸준히 있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처음으로 보내면서 새로운 것들을 접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담론에 자신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알게 되고 분명 그게 자신의 속성임에도 불구하고 클리셰적이라는 즉 지루하다는 느낌조차 드는거죠. 저의 경우 당사자주의자-일대일로 문제를 환원시키기는 편-이며 해체주의자-어떤 문제의 요소들을 보편성 있는 여러 세부 요소로 조각내는 편-이라서 가끔은 집단/대리인주의나 통합주의가 부럽기도 합니다. 바꿀수야 있지만 단순히 문제는 일관성-어쩌면 {남자들의} 자존심이라 불리우는 그부분- 때문이겠죠. 정신분할도 그러한데, 어쩌면 정신통합이라는 방향성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바깥으로 표현하고 남에게 삽입/인셉션시키는 것은 어쩌면 자아의 확장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래요, 남의 머리를 까볼 수는 없으니 확장이나 통합이 제대로 일어났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남과 같은 어떠한 논리나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건 (무슨 뜻인지도 아직 파악이 잘 안가는) 정신통합의 방법론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또 다시 돌아와서, 희로애락이라 정리되는, 즐겁고 화나고 슬프고 재미있는 감정들 중에서 현대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게 화가 나는게 아닐까 생각해요. 포비아가 정신병리학적 용어라기보다는 비난의 대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로써 사용되는 와중에서 화는 어떻게 해소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친목질까지 포함한다면, 온라인 상에서도 애정과 증오/혐오 양 쪽 다 수용적으로 해소되는 모델은 보이질 않습니다. 대략 대-논리의 시대이기 때문에 거대담론이나 옳고 그름이 간단히 정해지는 소담론에 비집고 들어가 애정과 증오가 과잉 해소되는 경향까지 보입니다. 과연 좋은 모델은 어딘가 존재할까요?
동성애 혐오 중에 [생리적으로 싫다]라는 말이 있었죠. 전 동성애 혐오를 이런 식으로 해체합니다. 사람들의 정태적인 외모를 봐서는 그 사람이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알 길이 없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는 애증 양 쪽이 보편적인 편향을 띄고 있을텐데 거기에 [동성애]라는 정보가 주어졌을 때 갑작스레 혐오감이 든다면, 그 정보에 어떤 부분이 혐오를 발산시키는 계기가 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는 거죠. 뭘 상상하는 걸까요, 감각적으로 싫지 않은데 [생리적]이란 말을 쓸 수는 없겠죠. 하지만 감각적인 정보에서 얻어지는 호불호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노란색이나 검은색 같은 색 종류를 애증하는 것에서부터, 외모 문제도 있겠죠. 외모 패러미터를 다면화한다 하더라도 각각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외모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고 그건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종류의 애증이죠. 그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게다가 그런 부분에서 정신통합을 원한다면? 타자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란 대답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비중이 전체/자아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는 걸테니까요.
저는 신체는 하나 뿐이라 물리공간 내에서 정동태적인 행동을 단 하나밖에 할 수 없다는 것에도 흥미가 있습니다. 내면의 상상이 병렬적이거나 이중사고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행동으로서 해석되지 않는 물리적 부분에서는 단 하나의 동작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해야 할 것이며 머리 속에서는 내각제나 대통령제 기타 의사결정적 방법론들이 판을 치게 될 겁니다. 국가나 집단도 외적 존재들에 대한 행동을 단 하나밖에 못하기 때문에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며, 좌우의 정권이 번갈아 집권하는 국가들은 마치 정신분열증이 걸린 것마냥 보이기도 하죠. 신체는 하나 뿐이니까요. 어쨌거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내면에서의 대화는 중요합니다. 그것은 다면의 상황을 용납하고 수용할 수 있는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공간이니까요.
다시 감정에서, 지금까지는 함께 안전하게 증오하고 함께 안전하게 애정하는 사회였, 는지도 벌써 한참 되었죠. 그런데 그 꽤 된 시간동안 아무도 좋은 모델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안이 없으면 우회로를 뚫게 되고 본래보다 더 비정상적인 경로로 감정이 흐르게 되죠. 그래요, 그래도 애정은 인간을 향하지 않는한 여러 통로가 존재합니다. 자본주의는 그걸 열심히 구축해왔죠. 인간을 향해도 좋습니다, 과잉만 되지 않는다면요. 그렇다면 증/혐오는 어떻게 하죠? (그렇기에 자신을 증오하는게 안전하다 생각하는 이들과 과거와 마찬가지로 함께 안전하게 증오하는 방식 이렇게 두 가지로 우회되고 있다 생각합니다.)
+ 아, 그리고 심리상담 전까지 저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상태나 남에 대한 감정을 아주 또렷하게 인지하는지 알았어요. 내가 기쁘구나, 내가 우울하구나, 내가 저사람 사랑하는구나, 정말 미워하는구나, 그런 식으로 전광판에 글자 나오듯, 배가 고프거나 아픔을 느끼듯 아는지 알았더니 언제나 그렇진 않고 감각적으로 자신의 몸 상태로 유추하여 판단하는 경우도 꽤 있었더군요. 어떤 사람과 헤어지고 난 다음에 여러 가지의 감각을 유추하는 식 등으로요. 꽤 새로웠습니다.
2014.07.30 16:48
2014.07.30 16:49
제 경우 화가 나는 걸 컨트롤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상대방이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상상하는 거예요. 2-3살된 아이가 계단을 빨리 못 올라가고 있을 때 왜 빨리 못 올라가느냐고 화내고 다그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 아이의 다리가 짧고 몸을 능숙하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요. 그 아이가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걸 알기 때문이죠.
어른의 경우에도 그 사람이 일부러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상상하면 훨씬 너그러워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운전할 때 갑자기 확 끼어드는 차를 보면, 저 사람은 운전학원에서 야금야금 부드럽게 끼어드는 방법을 못 배웠구나, 혹은 약속시간에 늦어서 무리하나 보다, 혹은 저렇게 끼어들지 않으면 양보하지 않는 곳에서 운전해 왔구나 하고 생각하면 별로 화가 나지 않고요.
화를 내는 건 지금 현재 나의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 때문인데,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된 그의 사정, 혹은 그의 과거를 상상하다 보면 쉽게 화를 내지는 않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 그가 보여주는 모습에 내가 볼 수 없는, 그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었을 온갖 삶의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내가 잠깐 화를 내어 그를 고칠 수 있을 거라는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고요.
2014.07.30 16:57
이해의 폭이 부속이 아닌 독립적으로 점점 넓어진다면
컴퓨터칩 같이 넓어진건 잊지 않고 안줄어든다면
오래 산다고 그렇게 되는게 아닌거 같아요.
2014.07.30 17:07
underground_ 우리는 무생물에게도 화를 내잖아요. 해일로 사람이 죽고, 지진으로 누군가 피해를 입는다면 그 자체에도 감정을 가질 수 있죠. 결정론적 세계관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둘 수는 있겠지만, 변화마저도 체념하게 돼 우울해지지 않나요. 화의 무의미함이 화를 해소해주진 못할텐데요. 감정이 의미 때문에 생겨나는게 아닐테니까요. 예시들은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의 대상들인데 대화 창구가 열려있을 때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자신의 표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최소한도로 배치되어 있을때 말이에요. 정말 사고가 감정을 해체할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2014.07.30 17:20
제 경우 한 사람을 점점 더 미워하게 되는 건 제가 그 사람을 바꾸려고 노력할 때였어요. 제가 누군가의 생각을, 행동을 바꾸려고 시간과 노력을 들일수록, 그런데 그가 바뀌지 않는 모습을 계속 목격할수록 증오심이 깊어지죠. ^^ 처음 그의 생각과 행동이 맘에 안 들었을 때보다 훨씬 격렬한 분노가 생겨요.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스스로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쉽게 미워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들이 바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 생각에 사람은 그렇게 자유로운 존재가 아닌 것 같아요. 갖고 태어난 유전자에서, 그를 길러준 부모와 자란 환경에서, 자신이 겪어온 협소한 경험과 쌓아온 지식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그 모든 자유롭지 못한 사슬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세월의 무게로 굳어진 것이고요.
저는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의 과거를 해체하여 그의 미래를 바꾸는 건 엄청나게 무지무지하게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2014.07.30 17:29
무생물에 대한 분노는 저는 별로 안 느껴봐서 잘 모르겠는데요. ^^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 혹은 신이나 운명에 대한 분노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원래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어서 세상이나 자연이나 사람에게 그리 큰 기대가 없다보니 별로 실망이나 분노도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음.. 잘 모르겠네요.
사고가 감정을 해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화를 내는 이유는 상대방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상상이 안 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그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면 (혹은 그런 이유를 상상할 수 있게 되면) 화가 풀리는 것 같던데요??
2014.07.30 17:44
물어보신 게 여러가지였는데 제가 놓친 게 많다 보니 댓글을 너무 많이 달게 되네요. ^^
저를 화나게 한 상대와의 대화가 가능한 경우에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아요. 물론 그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를 더 잘 이해하게 되어 화가 풀리면 다행이고요, 그렇지 않을 경우라도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조차 사실 잘 모르지 않나요? 음... 저는 제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사실 잘 몰라요. ^^ 물론 누가 물어보면 제 나름대로 추리를 해서 이유를 만들어 보겠지만 그게 맞는다는 보장은 없죠. 물론 이유가 뚜렷이 보일 때도 있겠지만요.
그래서 그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그 자신이 하는 얘기들도 항상 정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의 의식에 떠오르는 생각들이겠지요. 물론 그의 행동에 대한 저의 상상과 추리도 당연히 틀리기 쉬울 테고요. 저는 그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선의의 해석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해서 그렇게 할 뿐이에요. ^^
2014.07.30 17:31
정신분할로 들여다보는 방법 흥미롭게 들리네요. 그러다 정신분열인지 뭔지도 모를 상황으로 더욱 번질까봐 겁나기도 합니다; 라캉은 이해가 되는데 융의 분할방식이라 하시면 흔히 생각하는 집단무의식 말고 뭔가 다른 게 있나요? 구체적 제시 부탁드려도 될까요?
소설을 읽으면 저는, 아마 대부분이 영상화가 자동적으로 된다고 생각하는데, 잔인한 오후님은 주로 서술 자체만으로 받아들이신다니 생소하네요. 소설이 원작인 영화를 봤을 때 자신의 상상과의 괴리감 때문에 실망이다! 하는 호불호 평가가 나오는 게 다반사니까요.
어두운 기분에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상상을 하게 되면 가위에 눌리거나 귀신이미지에 시달려서 힘든 편인데, 명상을 하다가 도형 같은 게 만들어지면서 카타르시스에 휩싸일 때 있어요. 갑자기 4차원 세계에 빠진 듯 하달까요. 말씀하신 내면의 분할을 인물로 통해서 하려는 사람들은 소설류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화가나 영상제작, 소리의 영감을 따르는 사람은 음악을 만드는 등으로 가시화 작업을 해나가는 거겠죠. 미친 사람이 아닌 예술가로.
정신 통합이라 하시니 여러가지 의미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현실 속 균형감각, 자연스럽게 세뇌된 집단심리... 등등
집단화와 증오는 동물 세계의 어쩔 수 없는 현상이고 명백히 사라지게 할 대안은 없다고 봅니다. 인간은 집요히 그 사태의 크기와 지리와 대상들을 달리 하며 살아나가니까요. 단 하나의 행동들이 폭력과 전쟁을 불러 일으킨다고 해도 불사하는 인간의 선택에 매일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단 하나의 행동이라는 것이 인간이 칭송하는 이성과 그에 바탕한 인류 공존의식이 아닌 대단히 감정적이고 이기적 욕망에 치우친 우발적인 선택들이라는 것에 더욱.
팔레스타인에 대해 열심히 알아보고 주위에 알린다 한들 이곳 한국의 미친 현실도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끝도 보이지 않는 가관이죠.
2014.07.30 18:47
과거의 "함께 안전하게 증오하고 안전하게 애정하"는 것은 신앙이나 이념이 지배적인 사회인가요?
2014.07.30 18:55
2014.07.30 20:03
저는 그냥 제가 화를 컨트롤하는 방법을 말씀드렸을 뿐이고요 ^^ 그게 옳다거나 다른 분들이 저처럼 하셔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다른 분들은 화가 날 때 각자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시면 되죠.
저도 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선의(라기보다는 자비?)의 해석만 하다가 삶이 고달파지면 그때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요. ^^
목적론과 인과론에 대해서는 솔직히 질문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어요.
엘리트 주의에 대해서는... 어른의 생각과 행동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제 생각이 어떻게 엘리트 주의로 연결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저도 열심히 생각해 보고 댓글 드릴게요.
(그런데 날도 더운데 별로 논쟁하고 싶지 않은데요. ^^ 귀찮지 않으신가요? 저는 그냥 도망갈까 생각 중이에요.)
2014.07.30 23:23
underground_ 음, 물음표로 문장을 끝내는 걸 다시 읽어보니 격한 질문처럼 읽혔겠어요. 저는 거의 마침표로 끝내는 느낌의 물음표를 생각했는데. 귀찮거나 도망갈 마음이 들도록 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떤걸 시도하는 이유는, 변화에 대한 가능성인데 그걸 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르는 문제라서 그럴꺼에요. 상대를 판단할 수 있는 인식은 타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에 엘리트주의란 말이 나온 거구요. 어쨌든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인지 유추하는 것은 자신에게 그 만큼의 능력이 있다는걸 전제하는 것일테니까 말이에요. 어쩌면 정말 집착일지도 모르겠네요, 하면 하고 안하면 안하는 것인 제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낮추는건 없애는 것과 비슷해져서 대화를 안하게 될테니까요. 어쨌던가, underground님의 화를 해소하는 방법은 잘 들었습니다. 막 불만이 있다거나 그런 말투가 아니었어요.
2014.07.31 00:33
화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에요. ^^ 화 푸는 방법 섣불리 조언했다가 괜히 화만 돋웠나 보다 생각하고 도망가려고 했어요. ^^ 제가 시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이나 '분석'이 아니고요 '상상'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는 제 상상이 실제로 맞을 확률은 상당히 낮을 거예요. (그러니 타자보다 우위는 무슨!!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가 무슨 수로 알겠어요.) 그냥 다른 사람 미워하기 싫으니 제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죠. 어차피 진실을 찾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사람의 행동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게 의외로 많다'는 것도 그냥 그렇게 '전제'하면 다른 사람에게 훨씬 너그러워지니까 일단 그렇게 생각해 보자는 얘기지 이게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이 세상 사람 다 만나본 것도 아니고 그들의 행동을 다 관찰해 본 것도 아닌데 어찌 알겠어요.)
제 자신이 쉽게 변하지 못하는 존재인 것 같고, 제 주위에도 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저또한 제 한정된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보니 대충 그런 가설을 세우고 맘 편하게 사는 거죠. ^^
아, 아까 이 댓글 쓰다 하나 빼먹었는데요, 다른 사람이 쉽게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과 대화를 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 나는 저런 사람이라는 전제 위에서 각자가 현실적으로 양보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아가는 그런 대화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서로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려는 설득까지는 어렵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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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읽는데로 댓글 쓸걸 생각했는데 다 읽으니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위에서 부터 찾아봅니다.
저도 작가의 의도를 무시합니다.
작가의 상상의 지평이면 나도 그너머로
작가도 원할꺼에요.
아까 양자에 대해 다큐를 보는데 이런게 있더군요.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아니라 사실은 행동이 먼저인데 뇌가 그렇게 느끼는거 뿐이라고.
이해라는 것은 뛰는 양자와 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