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점 서유기 - 박원순.

2011.10.13 14:09

niner 조회 수:2956

세월을 지내놓고 보면 한때 몹시 탐닉했던 일들이 어느샌가 덧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1991년 여름부터 시작된 해외생활 2년 동안 나는 무슨 귀신이 들렸는지 책 수집광이 되어 지내와서 그때 모아온 책이나 자료를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왜 그토록 안달이 나 모으고자 했는지 스스로 이상할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야 가장 싼 것이 책이지만 서양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리 헌책이라도 무조건 싸구려가 아니고 책의 발행연도, 희귀성, 학술서와 문학책 등을 구분하여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그래서 정말 사고 싶은 책은 대체로 비싸서, 들었다 놓았다를 연거푸 몇 차례 하다가 겨우 몇 권 들고 나오는 정도였다. 그 탐닉은 나 자신의 다른 생활은 말한 것도 없고 가족들의 희생을 수반하였다. 제대로 어디 식당다운 식당엘 들러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이 데리고 가준 적밖에는. 한국에 돌아오니 양식을 많이 먹었을 테니 한식당에 가자고들 하였다. 그러나 서양에 살면서 언제 서양음식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으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버젓한 식당에 갈 돈이 있었으면 책을 몇 권 더 샀을 터였으니 말이다.

런던은 물가가 비싸 마음대로 책을 사기는 어려운 반면, 몇 세기 동안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수많은 책방이 즐비하여 더욱 가슴을 타게 만드는 도시였다. 새 책방은 너무도 비싸 몇 번 들러본 후에는 아예 단념하고 말았다. 내가 다녔던 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의 구내서점 '이코노미스트'에는 사회과학 계통의 헌책이 가난한 학생의 호주머니를 털곤 하였다. 법조타운인 '링컨 인(Lincoln Inn)' 주변에는 헌 법률서적을 파는 서점 몇 개가 진을 치고 있었다. 영국 법조사와 법률가에 얽힌 오래된 우편엽서 등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챠링 크로스(Charing Cross) 일대는 주제별로 잘 진열해 책방들이 손님을 끌고 있었다. 좁은 지하실까지 책으로 뒤범벅되어 있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더욱 책의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 들곤 하였다. 이 부근의 한 살인자 라는 책방은 괴기, 살인, 탐정소설만 파는 곳이었는데, 음산한 런던에 하나 정도는 있을 만한 곳이었다. 워터루 다리 밑의 노점상들은 뒤죽박죽의 책들이 널려 있으나 그만큼 값도 쌌다. 수레 위에 펼쳐진 책은 좋은 운을 타고났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머지는 땅에 널려진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신기한 책 한 권(그 책의 이름이 drift's guide라고 하였다)을 우연히 구하였다. 영국 전역의 헌책방과 이들의 '전공'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헌책방 소식을 담고 있는 그 책은 새것이어서 그것이 헌책이 될 때까지는 기다릴 수가 없어 거금 10파운드를 주고 눈물을 머금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서서히, 그러나 점잖음과 우아함을 유지하면서 침몰해가는 거함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침몰 일보 직전까지 실내악 연주를 계속했던 타이나틱호 같은 운명을 연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처럼, 책방 문화는 그 세계제국의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다양하고 깊이가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책방도 그 나라의 운명과 함께 쇠퇴일로를 겪는 모양이었다. 위 가이드 북에는 "영국의 중고 및 골동책방의 숫자와 질이 심각한 쇠퇴현상을 보이고 있다. 1987년 1천여개의 헌책방이 현재(1991년) 803개로 줄었다. 이대로 있다가 '귀한 책방(Rare Bookshop)'이 '귀한 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책방이 귀한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라고 익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LSE대학이나 인근의 SOAS(School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대학의 도서관도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었다. SOAS는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책들부터 최근 나오는 물가월보까지 한국의 책도 상당수 소장되어 있었다. 일제시기의 책들은 당시 영국 외교공관이나 외교관들의 소장을 내놓은 것이라고 들었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 누군가 가서 한번 정리해보아야 할 도서관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복사비가 워낙 비싸다는 점이다. 장당 10펜스(우리나라 돈으로 160원 가량)나 하여 도저히 안되어 나중에는 빌려나와 학생조합에서 복사를 하였다. 그래도 장당 4펜스였다. 런던대학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대학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IALS(Institute of Advanced Legal Studies)도 책을 제대로 갖추어 놓아 매우 편리하였다. 나보다 1년 먼저 교환교수로 LSE에 와 있던 안경환 교수님이 주로 이 도서관에 진을 치고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아일보에서 연재하고 있는 <법과 문학> 칼럼은 바로 그 도서관이 산실이었으리라.

영국에서 프랑스로 여행할 때마다 프랑스의 서점과 도서관도 둘어보았다. 철근을 하나도 사용하지 안고 지었다는 퐁피두 센터는 대중적인 도서관으로 유명하엿다. 전문적 연구를 하는 교수에서부터 여행계획을 짜는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작은 주제별로 신문을 스크랩해놓아 이용하기 편리하였다. 파리대학의 여러 도서관은 이와 달리 엄격한 출입통제를 하고 있는 데다가 폐가식이어서 복사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과 함께 들어가 그 친구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을 빌리고 복사했던 기억이 난다.

1년 후 미국의 보스턴으로 옮겨가니 우선 물가가 싸서 좋았다. 영국의 반 밖에 되지 않아 무엇이든지 공짜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양도 많아 햄버거 하나 사먹고도 배를 불릴 수가 있었다. 미국의 풍요는 나에 대한 대우에서도 드러났다. 한 방에 여러 사람이 쓰기는 하였지만 객원연구원에 불과한 나에게도 책사잉 하나 배당되었다. 비밀번호를 하나 주더니 복사기에 그 번호를 누르면 마음대로 복사할 수 있고 공짜라고 하였다. 완전히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그날부터 바로 옆에 있는 법률도서관, 중앙도서과, 신학도서관 등을 다니며 하루에도 몇십 권씩 복사를 해댔다. 복사를 몇 시간만 계속하면 기관지가 고장날 정도로 몸에 해로운 중노동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낮에는 사람들이 오가니 아예 저녁에 출근하여 밤새 복사를 하고 오전 내내 잠을 자는 올빼미 생활을 했다. 1992년 보스톤의 겨울은 너무 추웠다. 눈태풍('블리자드')가 몰아쳐 아무도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은 낮에도 복사기는 내 차지였다. 그런 날이 자주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일기예보에 폭설이 내린다면 즐거워하곤 했다. 드디어 너무 많은 분량을 복사한다고 느꼈는지 법대 당국에서 1인당 월 2천 장까지만 공짜, 나머지는 장당 2센트는 내도록 조치하였다. 나 때문에 새로운 규칙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도 쌌다. 옌칭도서관에서는 일본 자료를 많이 복사할 수 있었다. <사찰요람>이라는 자료는 이미 옌칭 연구원으로 다녀간 정용욱 씨 등이 놓치지 않았을 것이고 나도 한 부 복사를 해 왔는데 나중에 보니 서울대학교 김모 교수가 최초로 발견한 것인 양 신문에 대서 특필되는 것을 보았다. 우리나라의 초대 문정관을 지냈던 그레고리 헨더슨 씨의 자료인 헨더슨 콜렉션은 아직 공개하지 않은 상태여서 책임자에게 사정하여 꺼내보고 중요한 것들을 복사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는 '국회프락치사건'에 대한 미발표 원고와 1949년도 범죄사건분석표 등의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하버드대학과 MIT 등 거대 대학이 들어서 있는 켐브리지는 또 다른 책방의 천국이라 할 만하였다. 'Bool Stores: Cambridge Guide'는 책방 지도였다. 'Revolution Books'라는 방은 그 이름이 주는 호기심에 들렀더니 과연 모택동과 그를 추종하는 페루의 'Shining Path'. 바에 관한 책들이 잔뜩 진열대를 채우고 있었다. 책값이 좀 싸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오는데 기부를 좀 하라고 하여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기부없이는 책방이 유지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침 문을 닫기 직전이었던 'Book Case'라는 책방을 안 이후로는 정말이지 싼 값에 책 사는 재미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주인에게는 좀 미안하였지만,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에 강연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강연료마저 몽땅 주변의 헌책방에 갖다바쳤다. 건성으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곳들이었다. 뉴욕의 콜롬비아대학의 도서관과 그 정문과 후문의 헌책방들도 발걸음을 멈추게 한 곳이었다.

1993년 5월 학기가 끝나고 워싱톤의 미국시민권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에 근무하기 위하여 이사를 하였다. 이삿짐은 하버드대 또는 보스턴대에 다니고 있던 학생들(이들은 한국사와 한국사회를 공부하는 써클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음)이 하루종일 도와주어 꾸렸다. 그 짐들은 뉴욕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운송회사로 넘기고 우리는 렌트카를 빌려 밥통과 이불 등 간단한 생활도구만 실어 떠났다. 관공서가 가득 찬 이 도시에는 모두가 넥타이를 메고 다녀 할 수 없이 와이셔츠라도 입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습지를 메워 만든 도시라서 그런지 에어콘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조그마한 스튜디오에서 집사람과 나는 꽤 더위 참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러나 사무실은 마침 미의회 의사당 바로 뒤편이어서 의회도서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미국 대법원을 걸어다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단체의 본부는 뉴욕에 있었지만 워싱턴 사무소는 주로 의회에 대한 법안 로비활동을 주로 수행하고 있었다. 또한 부설기관으로 '국가안보센터'가 있어 CIA에 대한 온갖 종류의 소송과 연구를 벌이는 곳이었다. 이 단체가 수행한 소송과 연구 및 캠페인의 자료도 소중한 것이었다.

연방대법원 판사 청문회 관련자료는 한국에 돌아와서 시작된 우리나라 대법원 판사 임명을 둘러싸고 유용한 자료로 써먹었다. 차츰 책사냥의 범위를 넓혀가 처음에는 책방이 밀집된 듀퐁 써클 부근을 뒤지다가 나중에는 조지타운대학 주변까지 진출하였다. 깔끔한 헌책방이 몇 군데 있었다. 어떤 책방의 주인과는 친해져서 책 몇 권 산 것뿐인데 운반해주겠다는 핑계로 우리 아파타까지 놀고 가곤 하였다. 워싱턴 교회 버지니아에 있는 'Second Story Bookstore'라는 책방의 발견은 더할 바 없는 행복이었다. 책방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창고였다. 그곳에서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르는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거기에 닿기 위해서 전철을 타고가다가 비엔나라는 역에서 다시 택시를 타야 하므로 40여 분 만에 닿는 곳이었는데, 가는 길을 온통 조바심을 내곤 하였다.

의회도서관은 세상의 모든 책들이 모여있는 것 같은 곳이었다. 파피루스에서부터 레이져 자료까지 고대와 최첨단이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제퍼선 빌딩 중앙 홀에서 신청한 책이 자동 벨트에 실려나와 좌석에까지 몇십 분 만에 배달되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하였다. 특히 제임스 빌딩 안의 법률도서관에서 나와 집사람은 하루에도 십수 권 분량의 복사를 하였다. 내가 책과 논문을 찾아주면 집사람은 복사를 계속하였다. 냉방이 잘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느 날엔가는 집사람이 아예 졸도를 하여 의회도서관의 보건소 신세를 진 적도 있었다. 법률도서관의 조성윤 박사님은 우리 부부를 기특히 보고 여러 편의를 봐주셨다. 일본 전범재판에 관여한 검판기록을 보게 했으며 또한 독일 전문 사서를 통하여 유태인에 대한 보상자료를 제공해주기도 하였다. 어느날 법률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있는데 옆 서고에서 한국말 소리가, 그것도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강신옥 의원이었다. 모두 해외시찰을 빙자하여 간단한 공무가 끝난 다음 곧바로 관광을 떠났는데 강의원만은 도서관으로 와서 '도청방지법'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 있다고 하였다. 국회의원이 저 정도 열성은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펜실바니아 가에 있던 국립문서보관소와 슈트란드 문서보관소에는 일본의 전후 처리문제와 한국 관련 자료가 마이크로 필름에 담겨 있거나 원자료로 보관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미리 와 있던 연구소의 오유석 연구원의 도움을 받았다. 방선주 선생도 몇 차례 만났다. 일부는 마이크로 필름 채로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리크로 필름도 되어 있지 않은 여러 자료들을 복사하려니 감독하는 흑인여자가 얼마나 지독하게 간섭을 하는지 참으로 울화가 치미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책상에 한 파일 이상을 내놓지 못하게 한다든지 또는 복사도 일정 매수 이상을 한번에 못하게 하는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들어 간섭, 제지하기가 일쑤였다. 또 그 보관소 건물을 출입할 때 얼마나 까다롭게 구는지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닌 비사지만 유학생 한 명은 그 보관소에 있던 자료 원본을 몇 개 갖고 나왔다고 무용담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원래 우리나라 자료였던 것을 허락없이 가져간 것이니 우리가 다시 가져왔다고 하여 절도라는 죄의식을 가질 것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북한지역에서 미군이 정쟁중 가져온 이른바 '노획문서'가운데 대미군 선무방송에 종사하다가 처형당한 어떤 여의의 이야기를 보다가 끝을 내지 못하고 반환하였을 때는 언제 다시 올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미기도 하였다. '이때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도면만을 몇 달 동안 찾고 있던 '후쿠시마'라는 일본인 수를 만났다. 안식년 중이었던 이 교수는 '마츠시로' 주변에서 살았고, 그 부친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고백하였는데 그같은 열중의 내면에는 그보다 더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 그 많은 문서더미 가운데서 결국 '마츠시로' 지하구조의 설계도면 하나를 찾는 데 성공하여 나도 축하해주었다. 마치 황금 광맥을 찾아내기 직전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끝내 나머지 자료들을 내가 마지막 나가는 날까지도 찾지 못하였다. 여기서 점심시간이 되면 자동판매기 컵라면 하나로 떼우거나 12시 정각에 왔다가 10분 동안만 딱 팔고 돌아가는 식당차에서 요기를 하는 재미가 또한 적지않았다.

마침내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할 때가 되었다. 뉴욕에서 열리는 미국변호사협회 총회에 초청받아 2주간 뉴욕에 머물게 되었다. 어느 목사님의 배려로 '롱 아일랜드' 쪽의 교회에 여장을 푼 다음날부터 나는 맨하탄 구석구석의 책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뉴욕에서 그리고 아마도 세상에서 큰 헌책방이라는 '스트랜드'는 책이 많은 것은 좋은데 주제별이 아니라 알파베트 순으로 되어 있어 오히려 불편하여 곧 포기하고 말았다.

거대한 체인망을 구성하고 있는 '반즈 앤드 노블즈'에는 50센트짜리, 1불짜리, 5불짜리 등으로 나뉘어져 있어 주머니 사정에 맞게 고를 수 있어 경제적이었다. '그린위치'쪽에는 책과 함께 차와 그림엽서도 함께 파는 분이기 있는 책방들도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이 전역에서는 필요없는 가재도구를 내다파는 경우가 많았다. 헌책에 관한 '북페어'가 쉴새없이 열려 전문서적상 또는 개인 애호가들이 나와 책을 사고팔았다. 때로는 중복도서나 필요없게 된 책들을 '도서관에서 일괄 판매하는 경우도 있엇다. 이런 곳에서 횡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버드 옌칭 연구소에 1년간 연구원으로 와 있던 미즈노 교수는 언젠가 게시판에 쓰인 책 판매안내문을 보고 연락하였더니 중국 전공교수가 틈음이 모은 한국 관련 영문책자를 일괄 '분양'하겠다고 하여 싼값에 그것을 다 샀다고 자랑하였다. 옆에서 축하했지만 속으로는 그 행운이 나에게 오지 않았던 것에 언짢았다.

1993년 8월 15일, 정확히 2년 만에 다시 김포공항을 밟았다. 얼마 후 짐이 도착하였다는 기별을 받고 집사람이 세관을 나갔다. 이미 바빠진 내가 나갈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 하버드대학의 병원에 근무하다가 귀국하던 고등학교 동창인 의사가 누구에게 선물을 준다면서 나에게 골프채 한 세트를 이삿짐 속에 함께 넣어 옮겨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집사람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어 그 골프채 세트에 당연히 세금이 부과될 줄로 알았는데 끌러도 끌러도 책과 자료만 나오니 세관도 탄복을 하였는지 그냥 가라고 하였단다. 워싱턴에서 짐을 싸주던 이삿짐센터의 직원들은 한국사람들은 왜 이리 책을 많이 사는가 하고 불평을 하였다. 책짐이 무거웠던 것이다. 그 직원들의 말로는 어떤 목사님도, 어떤 교수도 이렇게 책이 많았다는 것이다. 책 이삿짐이 많은 것은 나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모두 개인적으로 도서관을 차리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의 현실이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을 나중에 공공도서관에서 다 기부받아 우리도 그토록 시간과 돈을 들이며 책 구하시러 다닐 필요가 없는 날이 와야 할 것이다.

그 책과 자료를 모두 풀어놓고 제대로 어디 꽂을 데도 없어 마구 쌓아놓으니 집안 식구들에게 천대만 받는다. 집사람면 "저게 누구 피를 말린 것인데 왜 저렇게 샇아두기만 하느는가"라고 핀잔을 준다. 그러나 책들을 좀 읽고 글도 좀 써야겠다는 생각만 할 뿌인지 그럴 여유가 없게 되었다. "가끔 언젠가는..." 책 읽고 글쓰는 일만큼 절박한 일이 없는 날이 오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 역사문제연구소 회보 27호 (1994, 12월)
- 박원순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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