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 가족분께서 저와 결혼하실 때 즈음에 제 복지포인트로 지르신 디비디 셋트가 몇 개 있는데, 공통점은 모두 애니메이션이라는 것.

그리고 본인 또래가 10대를 보낼 시절에 유행했던 작품이었다는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봉신연의', '슬레이어즈 넥스트 & 트라이', '그와 그녀의 사정', '에반게리온'. 그리고 마지막이 지금 제가 깨작거리고 있는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입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국내 방송 후 게시판에 폭주했던 덕후들의 DVD 열망 글들에 낚여서 출시했으나 폭풍 덤핑의 전설을 남겼다는 일화가...;)


디스크는 다섯장이지만 에피소드는 3+3+3+2+1 이라는 괴상한 구성으로 인해 12편. 마지막 디스크엔 에피소드 하나에 스페셜 피쳐가 들어있긴 하나 몹시 스페셜하게 아무짝에도 쓰잘데기 없는 피쳐가 아주 조금 들어 있는 관계로 별 의미는 없구요. 한 에피소드의 길이도 매우 무난하고 평범한 22분 정도여서 맘 먹으면 하루에 다 달리는 것도 가능한 분량입니다. 전 3일에 나누어서 대충 깨작깨작 감상 완료.

아무튼 그래서 감상은...


'뭔데?'


...라는 거였습니다. -_-;;


일단 이야기가 무진장 불친절합니다.

매 회 주인공이 바뀌고 시간대가 오락가락하는 구성이야 드문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결정적으로 이 작품은 유명 소설 시리즈가 원작이고 그 원작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루는 게 아니라 앞 부분을 그냥 건너뛰고 중간부터 만들어 놓은 작품이거든요.

그러니 아주 기본적인 것 몇 가지 정도에 대해선 먼저 설명이 나와줄만도 한데 그딴 거 없이 그냥 무턱대고 막 나갑니다. 그러다보니 '도대체 이게 뭐지?' 싶었던 부분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설명이 되었을 땐 놀라움이나 신선함이 아니라 허탈감만 안겨주게 되는 역효과-_-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기팝의 정체가 밝혀지는 부분 같은 건 '이건 뭐 개그도 아니고' 라는 생각이...;


매 에피소드마다 주인공이 바뀌면서 이 에피소드와 저 에피소드와 그 에피소드가 사실은 같은 시간대에 벌어진 일이라서 서로의 이야기가 조금씩 겹친다든가... 하는 구성도 그 야심은 잘 알겠지만 그렇게 잘 구현된 편은 아닙니다. 이런 식의 구성은 막판에 이야기가 정교하게 짜맞춰지면서 감상하는 사람에게 뭔가 놀라운 떡밥을 던져 주던가 해야 의미가 있는 건데 그딴 거 없거든요. -_- 그냥 구성이 그렇게 되어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게다가 위에서 말했던 것과 같은 이유(시리즈의 일부분만 작품화)로, 끝까지 봐도 던져진 떡밥들과 이야기가 정리가 되질 않기 때문에 찝찝한 기분이 남구요.


그렇다면 그냥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재밌기라도 하면 또 괜찮겠는데, 시종일관 음험하고 암담한 '분위기' 조성에만 주력하는 작품인지라 액션에서든 드라마에서든 딱히 재밌다고 느낄만한 부분들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매력을 느끼고 좋아할 수 있겠는데 불행히도 저는 그러지를 못 했네요. -_-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다 보고 나서 난감한 기분에 웹을 뒤져서 작품의 역사, 존재 가치, 이런저런 구체적인 설정들과 등장 인물 설명 관련 글들을 좌라락 찾아 읽고 '아. 대략 이런 얘기구나...' 라는 걸 아주 대충은 이해하고 정리를 하고난 후의 느낌이 참 별로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정교하게 짜여진 이야기도 아니고. 세계관이나 설정에서도 딱히 참신하다 싶은 부분은 찾기 힘들고. 그냥 괴상하게 거창한 일본식 능력자 배틀물을 구성과 형식으로 부풀려 놓은 작품 같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근데 뭐 이건 제가 원작을 전혀 읽지 않았으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한데, (좀 미안한 비교지만) 숨겨진 의미 같은 거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보이는 줄거리만 봐도 충분히 재미있고, 또 생각할 거리도 찾아낼 수 있었던 '에반게리온' 같은 경우를 생각하면 그냥 배째라고 '이거 별로임' 이라고 말 해도 크게 미안하지는 않을 것 같더라구요. (물론 애니메이션 얘깁니다. 소설 말고.)


암튼 다 봤으니 진열 공간 확보를 위해서라도 처리를 하고 싶은데. 비닐 뜯지도 않은 신품 dvd가 지금도 구천 팔백 십원에 팔리고 있는 물건이라 참 난감합니다. 하하하;;



2.

위에서 신나게 까 놓긴 했지만 뭐.

자료를 찾아보니 이게 무려 1997년에 출간되기 시작한 소설이 원작이더라구요. 게다가 이후에 숱한 라이트 노벨 작가들에게 아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고 하니 이천하고도 십삼년이 저물어가는 현 시점에서 스토리의 빈약함이나 구성의 부실함을 따지기는 확실히 좀 미안한 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드는 생각이, 사실 이 작품을 보고 난감해졌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제 나이-_-인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에피소드들 중 하나를 예로 들면, 어렸을 적 사업으로 바빴던 아버지의 무관심 때문에 삐뚤어져서 '세상에서 쓸모 없는 건 다 분해 시켜버리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 소년 얘기가 나옵니다.

뭐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너무너무 바빠서 관심을 전혀 기울여주지 않으면 섭섭할 수도 있죠. 삐딱해질 수도 있고. 근데 그렇다고해서 이상한 능력을 손에 넣고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살아 있는 사람을 막 분해시키고 다니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해가 안 가고 이입도 안 되고 그냥 찌질해만 보인다구요!!! 막판에 반성하고 뉘우치는 건 더 찌질해!!!!

그 외에도 뭐 좋아하는 남자애를 친구에게 빼앗겼다든가! 현실이 막막해서 한밤중에 미연시나 하며 사는 찌질한 청춘이라든가! 친구가 연쇄 살인범에게 살해당한 후 충격을 받았다든가! 뭐 답답하고 우울한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다들 '훗... 후후후훗... 이딴 놈의 세상, 부숴버리겠어.' 이러고 다닐 필욘 없잖습니까!!! 이해가 안 가!! 납득이 안 간다구!!! 오그라들고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어!!!!!!!


...라고 반응하다 보니 도저히 재밌게 볼 수가 없더라구요;

하지만 정말로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10대 청소년들이라면 이런 에피소드들에 깊이 감명을 받을 수도 있겠고. 감정 이입을 할 수도 있겠고. 뭐 그렇겠죠.

제 때(?) 보지 못 하고 다 늙어서 이 작품을 보게 된 제 잘못인 것으로 하고 감상을 마무리해야겠다... 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_-



+

사실 저도 중, 고등학생 땐 평범한 중2병 찌질이였던 적이 있었던 터라. (하하;)

저의 경우엔 흔히들 말하는 '중2병스러움'이 폭발하던 시기에 CLAMP 아줌마들을 영접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분 작품들도 허세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하늘, 땅, 전 세계를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러 놓고 우하하하거리던 악당의 범행(?) 동기가 실은 그냥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과의 약속이었다든가.

자연을 지키기 위해, 혹은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지구를 멸망시키려 든다든가... 뭐 이런 식이죠.

남들이 금기시 하는 행동을 막 저지르는 등장 인물을 보여주면서 '어때? 쿨하지 않아?'라고 외쳐대기를 즐기는 태도도 좀 그러하구요.


근데 이 분의 작품들 중 제가 가장 좋아했던 '동경 바빌론' 에피소드들 중에 이런 중2병스런 10대들을 비웃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가 누굴 깐다고? 라는 생각이. ㅋ)

'나는 평범하지 않다. 나는 특별해' 라고 외치는 중딩들이 도서관에서 찾은 주문-_-으로 신나게 남들을 저주해서 죽이고 다니는 사건이었는데. 막판에 사쿠라즈카라는 캐릭터가 해결사로 짜잔~ 하고 나타나서


(이렇게 생기셨습니다. 한 때 팬이었...;;)


트레이드 마크인 시니컬한 웃음과 함께 대략 이런 내용의 대사를 날립니다.

"맨날 특별, 특별 거리는데. 너희 같은 놈들은 매일 매일 평범한 모습으로 평범한 직장을 다니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대함을 알 수 없지롱. ㅋ"

그리고 그 직후 불쌍한 중2병 악당들은 바로 비참한 종말을...


말하자면 중2병을 더더욱 강력한 중2병으로 눌러 버리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겠는데.

정말 우습게 들리겠지만, 돌이켜 보면 실제로 제 어린 시절 한창 폭발하던 허세끼를 잠재우는데 꽤 큰 도움이 되었던 훌륭한 장면이었다고 하겠습니다. -_-;


그리고 뭐. 당시의 클램프 아줌마들보다 더 나이를 먹어 버린 지금에 와서 또 생각해보면 저게 그렇게 훌륭한 말일 수가 없어요.

특별히 잘난 것 없으면서도 특별히 망한 것도 없이 그냥 무난하게, 평범하게 우울하고 평범하게 즐겁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는 것.

그게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일 수가 없더라구요.


결론 같은 건 없구요.

그냥 끝입니다. <-


++ 최후의 덤으로


http://youtu.be/G9_KEMcRx9Y


사쿠라즈카, 클램프 얘길 적고 나니 자동으로 또 이게 떠올라서.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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