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일곱살 아이의 삶이란

2012.09.26 23:02

로이배티 조회 수:2563

오늘 근처 사는 직장 동료분들과 오랜만에 모임이 있었습니다.

여자 분 셋과 저. 이렇게 넷이었는데, 그 중 한 분은 7세 아들과 3개월 된 딸을. 또 한 분은 2세 아들을. 나머지 한 분은 1세 아들이 딸린 관계로 그 중 한 명의 집에서 모여 보쌈 시켜 먹으며 수다를 떨... 예정이었는데. 당연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처음 30분 정도 흐르고 나니 대화는 온통 육아 이야기로 흘러가고 아기도 없는 유일한 남자인 전 좀 심심해지다가, 그나마도 조금 더 지나고 나니 각자 아기들 돌보느라 대화도 끊기고 막. (왜 모인 거냐!! ㅠㅜ) 그 와중에 2살 된 남자애가 저에게 꽂혀서 나름대로 바쁘고 빡센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만...


이 와중에 일곱살짜라 남자애가 갑자기 벽에 걸어 놓은 화이트 보드에 뭐가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을 그리길래 '뭐 그리니?'라고 물어봤습니다.


"여기 동그라미는 동생이구요. 여기 이건 터지는 거에요." 라는 대답이(...)


아무래도 자기보다 훨씬 작고 어린 아기들이 많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안 주니 서운했겠죠. 그래서 뭐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잠시 후엔 혼자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엎드려 스케치북에 뭘 열심히 막 그리고 있더라구요. 여전히 못 알아보겠길래 뭐냐고 다시 물어봤더니 동생 죽인다고. ㅠㅜ;;;


그러고나선 또 삐뚤빼뚤한 글자로 뭔가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이젠 물어보기도 무서워서 곁에 가서 들여다봤더니


"하하하하! 난 자네 동생을 죽일라고 왔다네!!!!"


헉.... orz


여기서 갑자기 직업병-_-이 발동해서 이 녀석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유야 뭐 위에서 상상한대로였구요. 

게다가 모임 초반에 어른들 관심 좀 끌어보려고 2살 남자애에게 다가가서 자기도 놀아줘보려 했었는데, 뭐 당연하잖아요. 오늘 처음 본 2살과 7살의 놀이 코드와 매너가 맞을 리가 있습니까.

2살이 짜증내고, 밀쳐내고, 때리고 했던 것 때문에 아주 단단히 맘이 상했더군요. 계속 '해치고 싶다', '죽이고 싶다'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뭐 애 키워본 적도 없는 제가 여기서 무슨 얘길 할 수 있었겠습니까만. 괜히 애잔해서 어떻게든 설명하고 위로를 해주고 싶어서 괜히 오기를 부려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_-;;

일단 '어른이란! 참고 또 참는 것이다!!! 그것이 어른의 로망!!!!' 라는 (말도 안 되는) 논지의 이야기를 최대한 부드럽고 쉽게 풀어서 설명해보려 했으나 결론은 '그래도 죽이고 싶어요.'

다음은 '입장 바꿔 생각해봐요~' 라는 류의 훈계를 얌전하게 풀어서 전달해 보았더니 무슨 말인지 이해는 잘 하는데... '그래도 죽이고 싶어요.' orz

그렇게 반복 도전-_-하다가 나중엔 어린이에겐 도저히 할 얘기가 아닌 '본인 보신 전략 차원에서 바라본 바람직한 2살과 7살의 관계란?' 류의 이야기까지 했으나 역시 결론은 그대로.


근데 웃기는 건.

이 녀석이 이 재미 없는 이야기를 굉장히 열심히 들으면서 중간중간 질문도 던지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결론은 변함 없지만요.


어쨌거나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서 결국 저도 포기.

마지막으로 (역시나 어처구니 없게도) 침대 위에 굴러다니던 커다란 스폰지 망치를 들고 역시나 매우 불건전한 이야기를 해 버렸습니다.

'꼭 그렇게 죽이고 싶으면, 이렇게 해 봐.' 라면서 엄청 사악한 표정 연기와 함께 망치로 침대를 마구마구 내려치며 '동생이 밉다!!! 우와아아아!!!!' 라고 외쳤...;

아니 뭐 일곱살짜리가 이런 걸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왜 이래야 하는 건지 이해도 못 하는 것 같고. 결정적으로 어린애 정서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괜한 짓 했다고 후회하는 순간에, 이 녀석이 깔깔대며 웃기 시작하는 겁니다.


뭐 웃기겠죠. 제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그래도 어쨌거나 신나게 웃더니 한 번 더 해 보랍니다. 그래서 세 번 더(신났다;) 해주고 시켜봤습니다. 신나서 잘 합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한 얘긴 하나도 알아듣지 못 한 것 같지만 기분은 좋게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_-;


그러고 붙들려선 녀석이 여기저기서 집어 오는 그림책들 같이 읽어주고. 줄거리에 대해 질의응답-_-시간을 가진 후 숙제하는 것 도와주고 확인해주고.

옆에 굴러다니던 장난감들로 그림책 내용을 괴상하게 재연하며 놀다 헤어져 집에 돌아왔습니다.

'잘 가!'라고 인사하더니 '근데 왜 벌써가? 다음 주에 또 와?'라고 묻는데 등골이 다 서늘했지요;



뭐 아주 상식적인 차원의 뻔한 얘깁니다만.

그 녀석은 누군가 자기가 독점하고 함께 놀 수 있는 어른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동생에게 빼앗기고 아빠는 직장 일이 바빠서 밤 늦게나 들어오고. (원랜 잘 놀아주시는데 요즘 좀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손님이라고 찾아왔는데 다들 줄줄이 아가 하나씩 붙들고 앉아 있으니 심통날만 하죠. 

언젠간 적응할 거라고 해도, 일곱살이면 좀 컸다고 하더라도 동생이 생긴진 이제 석달이니까요. 7년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린 애든 어른이든. 산다는 건 참 빡센 것 같아요. 

어른들 보기엔 구르기만 해도 칭찬 받고 구구단 따위(?)만 대충 비슷하게 읊어도 부모가 자랑스러워해주는 그 시절이 참 편하고 좋아 보일지라도. 그 땐 또 그 나름의 고민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엄청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들이요.


그래서 결론은 '너 이노마 화이팅!'이라는 응원의 마음과.

하지만 난 아주 오랫동안 너희 집에 놀러가지 않을 것이다... 라는 솔직한 심정(...)

그리고 김진표가 부릅니다.



사실 가사를 보면 본문의 7세 어린이 얘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정 반대에 가까운 노래입니다만;

그냥 제가 좋아하니까 올립니다. 으하하. 김진표 1집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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