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브 디아즈는 쾌활하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 그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영화가 그렇게 긴 상영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은 없나요?”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런 것 따위는 걱정할 겨를이 없어요. 나는 영화를 볼 때 닥쳐올 시간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영화를 볼 거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제 영화를 보러 올 것입니다”

 

http://kmdb.or.kr/column/bestMovie_view.asp?page=1&choice_seqno=1&searchText=

[ 2014 사사(私史)로운 영화리스트 ]

 

영상자료원에서 지난 5월부터 라브 디아즈 감독 특별전을 하고 있습니다.

한달에 한편 꼴로 라브 디아즈 감독의 전작을 소개하는 기획전이에요.

지난주에 영상자료원에서 라브  디아즈 감독의 영화들을 봤습니다.

 

아 프리오리(From What Is Before, 2014) 338분

노르테:역사의 종말 (Norte, the End of History, 2013) 240분

 

이렇게 두 편이었고, 인터미션은 없었습니다.

영화 상영 후 라브 디아즈 감독이 참여하는 GV가 있었고

9일 일요일 상영후 가졌던 정성일 평론가와의 대담은, 대단했어요.

오죽하면 통역맡아주신 분이 말씀하시길

관객도, 감독도, 모더레이터도 하나같이 hard 하다고 했을까요.

세시간에 걸친 GV는 밤 10시를 훌쩍 넘겨서 마무리되었어요. 

정성일 평론가가 준비한 질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는데 말예요.

질문을 못하고 이대로 집에 돌아가게 되면, 미칠듯 후회할 것 같은 분,

딱 한 분에게만 기회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손을 번쩍 들고, 정성일 평론가에게 미처 못한 질문할 기회를 준 남자분, 

감사했습니다.  

 

라브 디아즈라는 이름을 가장 먼저 접한 건 작년 정성일 평론가의 리스트였어요.

정성일 평론가가 2014년 본 영화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영화 10편을 선정한 리스트가 있는데

라브 디아즈 감독의 <폭풍의 아이들 제 1권>도 랭크되어 있었죠.

정성일 평론가 리스트는 제 관심을 끌긴 하지만 어떤(대개) 영화들은 볼 방도가 없고, 저는 금새 잊어버렸어요.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라는 타이틀로 기획된 라브 디아즈 특별전 소식을 접하고는  

사실 밀어내려는 마음이 우세했던 것 같아요.  

여러모로, 근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요.

저는 영화를 볼 때 이 영화를 봐야하는 이유를 저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의지가 있거든요.

이유를 제대로 댈 수 없으면, 미뤄둬요.  

 

몇몇 좋아하는 영화나 감독을 헤아려 볼 수 있긴 해도

'아, 나는 시네필의 열정을 지닌 것 같지는 않다'고 줄곧 생각해왔어요.

어떨 때에는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보다

관객이 없는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을 찾아다닌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 취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

이를테면 어떤 일관성, 맥락을 가졌다고 인식한지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고인이 되신 올리베이라 옹의 회고전즈음 인 것 같네요. 작년)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글로 풀어내기에는 아직은 벅차게 느껴져서 계속 머릿속에서 영화만 돌려보고 있네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때 상영하기도 했으니

벨라 타르의 7시간 대작인 <사탄 탱고>는 본 분들이 계실거라고 생각해요. 

그때도 근력부족때문에 시도조차 못했었던 것 같아요.  

뭐 러닝타임 4시간정도는 드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여섯시간을 넘어서는 <아 프리오리>는 제가 상영관에서 본 가장 오랜 상영시간을 가진 영화에요.  

오랜시간 상영관에 앉아서 한 영화의 러닝타임을 견디는 것은 

신체적으로 적잖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허기, 요의, 허리와 목의 통증, 다리 저림 등등)

물론 정신적으로도 고된 일입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지,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지를 시험하는 것 같기도 해요.

영화의 맥락과 함의를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요.

라브 디아즈 감독은 살아가는 것 또한 그만큼 어려움이 있지 않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자신이 만든 영화가 관객의 삶에 개입한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하는 분이었어요.   

고작 두편 접했을 뿐이지만

'긴 상영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충실한 영화적 완성도를 견지하는 작품을 내놓는다'는

JIFF의 코멘트에 상당히 공감했습니다.

 

말미에 평론가이자 감독인 정성일씨가 상업영화와 작가주의 영화를 명쾌하게 정의했는데

그 표현에 담긴 공정함이 미묘하게 제겐 힘이 되었어요.

라브 디아즈 감독님도 '과연!' 끄덕끄덕 하시더군요.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면 상업영화이고

영화가 관객을 선택하면 작가주의, 예술 영화이다'

 

 

늘 제안의 속물근성, 허영심과 다투느라 만신창이가 된 내면이 일순 고요해졌습니다.

 앞으로는 제게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이것도 봐야할 것 같고, 저것도 봐줘야 할 것 같고

이것저것 많이 봐야 색인을 만들어둘 수 있을 것 같고, 좀 그랬거든요.  

당분간은 관객을 고르겠다고 마음먹은 자존감 높은 영화들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라브 디아즈 감독이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영화를 아직 한편도 못봤고,   

20세기 영화감독 대부분이 앙드레 바쟁의 제자라고 말할 정도로

감독님이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앙드레 바쟁이 쓴 '영화란 무엇인가'도 아직 안읽어봤고요.

농반진반, 라브 디아즈의 영화를 못봤으면, 모르고 죽었으면 참 안타까웠겠다- 싶어요.

물론 죽은 뒤에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을리가...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라브 디아즈 감독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발길을 돌려 나와서 뒤도 안돌아봤습니다.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달려들어서 입맞춤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통제하기 힘들것 같아서요.

이거슨..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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