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일기

2013.05.07 16:45

에아렌딜 조회 수:2590

왠지 투병일기라고 바꿔야 할 것 같아서 써 봅니다. 아니, 투병바낭...?


1.

그야말로 머릿속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며칠을 보내고 있습니다.

혼자 있으면 그나마 좀 낫습니다.

하지만 일하고 있다가 보면, 그냥 머리가 지끈지끈, 머리가 화이트 아웃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직장 환경상 전화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는데 듣고 있다가 보면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나중엔 누군가의 조금 큰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까지 머리를 징징 울리는 것 같고...



2.

그나마 6월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겠다고 했기 때문에 빨리 시간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쌓아둔 일이, 그리고 쌓이는 일이 너무 많아서 아마 제가 다 처리하고 갈 수도 없겠죠.

날이 가면 갈수록 사고처리능력은 떨어지고, 머리가 바보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비관적 사고는 점점 머리를 침식해 들어가서 이런 바보가 밥 먹고 살아갈만큼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 말로란 것도 퍽이나 볼만하겠단 생각에 이르고.

그럴 때면 비명을 지르고 싶어지죠.

울면서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죠.

광기에 물들어 달려가는 디오니소스의 광신자란 대목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딱 그 생각이 납니다.

차라리 광기에 몸을 맡길 수 있으면 행복할지도 모르겠군요.



3.

저는 자기 자신이 아주 선량하지는 않아도 나름 괜찮은 사람인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군요.

시간이 지나갈수록 드러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아주 추하고 끔찍했습니다.

착하게 굴려고 했던 행동이나 생각들은, 그저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런다고 누가 돌아봐주거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는 착한 척하지 않아도 되겠군,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4.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지만 또 한 가지 지병이 있다면.

누군가와 일정 이상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내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타인도 내게 지나치게 무관심한 타인도 버겁습니다. 

그냥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아가려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이 원 안으로는 누구도 들어오지 마. 이 원 밖으로는 멀어지지 마.

모순된 심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고독에 익숙해지려 마음 먹었지만 그것도 잘 안 됩니다.

이래저래 사면초가로군요.



5. 

일본 병원은 엄청나게 친절합니다.

아니, 일본 사람 자체가 한국인들에 비해 좀 친절해 보이긴 하는데...

저는 지금껏 촌사람으로 지방에 쭉 살아서 그런지, 내가 먹는 약 하나하나가 무슨 약효가 있으며 어떤 작용을 하고 어떤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지, 일일이 설명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세세히 설명을 받았을 때는 참 감동했습니다.


사소한 것이 곧잘 사람을 감동시키곤 합니다.

작은 미소, 작은 배려, 작은 손길.

그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데 가끔은 그것조차도 없어서 울고 싶거나, 그런 것을 내게 주는 사람에게 무작정 매달려 울고 싶군요.

작은 마음을 받았던 것이 너무도 기뻤기 때문에... 가끔은 내가 악인이란 걸 잊고 또 착하게 구는 척 하고 싶어지곤 하지요...

그냥 영업용 스마일일지도 모른다고 알면서도... 외롭기 때문에 아주 작은 것에도 매달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왜 이렇게 잘 안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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