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 크림이 듬뿍 샌드되어 있는 당근케이크를 맛있게 먹다가 문득 어린시절이 떠올랐어요. 

어렸을 때 저에게 당근이란 시금치와 더불어 악마의 음식 양대산맥이었는데 지금은 무려 당근이 송송 박힌 케이크를 좋아라고 퍼먹고 있죠. 

그 무렵에는 당근과 시금치를 비롯한 각종 채소들에 왜 그렇게나 맹렬히 저항하며 혐오했는지 떠올려보다 어렸을 때 기피했던 음식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어요. 


당근을 먹어야 하는 상황은 잡채, 김밥, 카레 세 가지 음식 중 하나를 먹어야 하는 경우였죠.  

지금은 별다른 거부감이 없지만, 당시에는 안 그래도 맛없는 당근을 익혀서 먹는다는 것에 불만을 느꼈어요. 

위 세 가지 음식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음식은 김밥이었는데, 잡채와 카레 속 당근은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슬쩍 골라낼 수도 있었는데 

김밥 속 당근은 다른 재료들과 밀착해 있어 당근만 빼놓고 먹기가 힘들었어요. 

더구나 유유상종이라고 시금치와 당근이 서로의 옆자리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도무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해서 빼먹기가 힘들었어요. 

시금치를 제외하고 당근만 빼놓으려면 시금치가 눈에 밟히고, 그렇다고 미친 존재감의 당근을 그대로 두고 시금치만 빼돌리는 것도 쉽게 엄두가 안 났죠. 

그래서, 엄마가 김밥을 쌀 때면 졸린 눈을 애써 부릅뜨며 제발, 당근과 시금치를 가능한 적게 넣어주면 안 될까요..제발, 이런 불쌍한 표정을 지었죠. 

그래봤자, 엄마의 기준에서 김밥에는 무릇 당근과 시금치가 많이 들어가야 제맛이기 때문에 울적한 표정을 지어봤자 별 효과는 없었지만요. 


악마의 음식 양대산맥 시금치는 당근보다 난이도가 더 높았어요. 시금치는 당근보다 식탁에 쓸데없이 자주 오르는 반찬이었거든요. 

저희집 식구는 외할머니, 부모님, 4남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식탁에서 각자의 지정석이 있었어요. 

원래는 아빠의 자리만 지정되어 있었고 다른 사람의 자리는 그날그날 각자의 선택에 맡겼는데, 

어느 순간부터 저는 아빠의 오른편, 제 바로 윗형제인 오빠는 아빠의 왼편에 앉아야 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아빠가 가장 귀여워하는 막내딸이니까 권력자의 오른팔 자리에 앉는거구나 싶어 내심 흡족해했는데, 

돌이켜보면 권력구도와는 별 상관없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어린 오빠와 저를 아빠의 양옆에 두고 식사예절을 확인하며 훈육하기 위한 방침이었던 것 같아요. 


아빠는 제가 시금치를 싫어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금치가 올라오는 날이면 시금치를 집어 제 밥그릇에 친절히 얹어주었어요. 

그럴 때마다 전 속으로 제발, 제발 나에게 이러지 마요.. 심정이 되었지만, 멋모르고 아빠의 시금치를 대차게 거절했을 때 들었던 잔소리와 꾸중이 생각나서

되도록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묵묵히 시금치를 수용하는 시늉을 했죠. 

하지만 속으로는 이 놈의 원수 시금치를 어떻게 하면 재빠르게 처리할 수 있을까 열심히 궁리하면서, 

보란듯이 시금치 한 가닥을 떼어 과장된 숟가락질을 하며 입으로 가져간 후 억지로 씹어 삼키고 나머지 시금치 덩어리는 밥밑에 깔아두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밥 한 숟가락이 남았을 때 깔아두었던 시금치를 입에 넣은 후 되도록 천천히 몇 번 우물거리다가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났어요. 

잘 먹었다는 말은 생략하고, 고개만 건성으로 한 번 숙인 후 눈에 띄지 않는 보폭으로 화장실로 간 후 입안에 든 시금치 덩어리를 변기에 뱉어냈죠. 

간혹 시금치와 콩밥이 함께 나오는 날은 정말 운수없는 날인데, 당시에는 왜 멀쩡한 밥에 콩을 넣어 밥을 오염시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럴 때는 마지막 한 숟가락이 보통 때의 2배 이상 되기 때문에, 의심받지 않고 뒷처리를 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했죠. 


당근과 시금치의 양대산맥을 넘어, 지금 생각해봐도 왜 그렇게까지 싫어했을까 싶은 음식은 유부초밥이었어요. 

별 매력없는 두부를 얇게 썰어 튀긴게 유부라는 것을 안 이상 호의적일 수 없었는데, 그런 곳에 애써 밥을 넣는다는게 괴이했어요. 

김밥에 비하면 유부초밥 따위는, 흥. 이런 심정이었는데 유부초밥을 무시하는 마음을 부채질하는 사건이 유치원 소풍날 일어났죠. 

유치원 소풍 전날 엄마의 몸이 그닥 좋지 않은 상황에서, 엄마는 재료준비가 번잡스러운 김밥대신 간단하게 소고기 유부초밥을 싸주기로 결정했죠. 

저는 그것도 모르고, 소풍날 이른 아침 지금쯤이면 엄마가 김밥을 말고 있겠지.. 두근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유부초밥을 발견했어요. 

순간, 기대했던 김밥들이 쌓여가는 풍경이 아닌, 누런 유부초밥들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껏 저는 소풍=김밥이라는 공식에 단 한 번도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기에, 유부초밥을 소풍도시락으로 싸가지고 간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은 모두 김밥을 가져올텐데, 나 혼자 유부초밥을 가져갔다 아이들이 나를 불쌍히 보면 어떻게 하지 싶어 눈물이 울컥 나더군요. 

엄마는 난 유부초밥 안 가져가, 싫어!! 라고 외치며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절 보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저는 그저 엄마가 야속하기만 했죠. 

어째서 나에게 김밥을 안 싸주는거야, 언니들도 오빠도 다 싸줬으면서 나의 소풍날은 유부초밥을 싸주는 걸까 싶어 그저 서러웠죠. 

가뜩이나 그 무렵은 가족들이 합세해서 제 2 한강교에서 절 주워왔다고 가끔씩 놀리던 즈음이어서,

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역시 난 주워온 자식인가봐.. 하며 더욱 완강히 유부초밥을 거부했어요. 


그러나, 다시 김밥을 만들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정말 유부초밥 때문에 소풍을 안 간다는 것은 더욱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어서 침울해하며 소풍을 갔죠. 

이른 아침부터 벌어진 유부초밥 사태에 나름의 동정심을 느꼈던 언니들이 최신 과자와 음료수를 재빨리 공수해온 덕택에요. 

소풍장소였던 식물원에 가서, 점심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싶던 저를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은 흘러 도시락을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 

차라리 갑자기 배탈이 나기를 바랐지만 지금과 달리 워낙 장이 튼튼한 아이였기에 그럴 기미도 안 보이더군요. 

아이들이 하나씩 도시락 뚜껑을 여는데, 저는 마지막까지 버팅기다가 마지못해 도시락을 열었어요. 

혹시, 누가 유부초밥을 보고 놀라면 어찌하나 싶었는데 아무도 김밥들 사이 유부초밥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어요. 

안도하며 유부초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어찌나 유부초밥이 꼴보기 싫던지 포크를 쥔 손을 머뭇거리고 있는데 한 아이가 다가왔어요. 

"그거 맛있겠다. 그거 뭐야? "

순간, 그 아이가 들고 있는 포크 사이로 한 줄기 희미한 광채가 보이는 듯 싶었어요. 

"이거 소고기 유부초밥. 먹어볼래? (제발 먹는다고 말해줘)"

아이는 망설임 없이 포크로 유부초밥을 찍어 한 입 베어물더니 뭔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어요. 

이 때다 싶어서 그 아이에게 거래를 제안했어요. "네 김밥 먹기 싫으면, 내꺼 먹을래?" 

순식간에 도시락 거래에 성공하고, 우리는 사이좋게 풀밭에 앉아 저는 그 아이의 김밥을 그 아이는 제 유부초밥을 먹었죠. 

그 아이의 김밥은, 우리 엄마의 총천연색 김밥에 비하면 색도 심심하고 맛도 좀 심심했지만 그래도 괜찮았어요. 

그 아이가 들고 있는 유부초밥통 사이로 주변의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며 하나씩 맛본 후, 맛있다는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서 좀 으쓱할법도 했는데

그냥 모른척 했어요. 그 유부초밥은 나와 상관없는 유부초밥인 듯. 

그 후로, 오랫동안 유부초밥을 무시했어요. 맛을 느끼기 이전에 이미 유부초밥은 예민한 아이었던 저에게 쓴맛으로 각인되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주말에 야구장 갈 때 자진해서 유부초밥을 만들어 갈 만큼 유부초밥을 좋아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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