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발렌타인 데이의 악몽

2013.01.26 22:32

clancy 조회 수:1453

발렌타인 데이의 악몽

clancy

그리스도교의 성인 발렌티노(Valentinus, 밸런타인은 영어발음)의 축일. 2월 14일. 3세기 후반에 순교한 같은 이름의 성인(축일도 동일)이 2명이 있으며, 또한 사적불명의 다른 수도사도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인물에 유래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늘날에는 영미를 중심으로 연인들이 카드(Valentine card)나 선물을 주고 받는 날로서 알려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여성쪽에서 사랑을 밝힐 수 있는 날로서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이 성행하고 있는데 이 습속의 기원은 고대 로마의 풍요기원제 루페르칼리아(Lupercalia)에 있다고도, 이 날부터 새가 교미를 시작한다는 서구의 민간전설에 의거한다고도 한다.

출처 : 종교학대사전

검색질을 해봐도 딱히 발렌타인 데이와 초콜릿을 연결하긴 힘들다. 그냥 갑툭튀한 풍습이란 거다. 자기들 연애하는 거, 그래서 행복하다는 거 자랑질하고 싶은 연인들이 아마도 처음 선물을 주고받기 시작했을 것이고. 제과회사 상술이 슬쩍 섞이면서 커플들이야 대충 날짜만 던져줘도 알아서 사쳐먹으니 블루오션을 개척하자 '고백' 고백인 것이야!를 외치며 초콜릿을 주며 고백하는 날 따위로 변형시킨 게 분명했다. 

그러니 커플들에겐 의무방어전 같은 기념일이고, 두근두근 짝사랑 키우는 여자애에겐 작전수행을 위한 D-day고 그거 받을 기대에 찬 놈팽이에겐 가부결정을 내릴 선택의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발렌타인 데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던 유치원 이래로 제발 달력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짜증나는 날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받아본 초콜릿은 유치원 선생이 '여러분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랍니다...'라며 나눠준 ABC 초콜릿이 전부였다. 만약 그 여선생인 굉장히 취향이 독특한 쇼타콘이었다면 모르겠으나 그건 누가봐도 아무런 의미 없는 초콜릿이었다. 처음엔 그런가보다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만 해도 호들갑스럽게 초콜릿 주고 받는 애들의 수는 반에서 절반도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해가 거듭될 수록 그 비율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졸업반 무렵엔 이 '초콜릿 전쟁'에서 소외된 인간은 나를 포한 세 명 뿐이었다. 한 명은 학교를 주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양아치 자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6학년이 되어서도 구구단을 다 외우지 못했떤 바보 광호였으니 말 다했지.

이 지랄맞은 초콜릿 주고받기는 일종의 계급 놀이었다. 그 최상위엔 '모두의 연인'이 있었다. 드라마 같은 데 흔히 나오는 신발장에 초콜릿 수북히 들어있는 인기남, 진골귀족. 그 다음이 연인들이었다. 이미 사귀는 사이기에 발렌타인데이엔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부농들. 다음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고만고만한 무리들. 연인은 없지만 흔히 말하는 썸녀가 있고 왠지 이번에 초콜릿과 함께 고백을 받을 가능성을 가진 무리들. 물론 이 기대가 실체적 진실이냐 허황된 공상이냐에 따라 계급은 다시 세분화 된다. 다음으로 애초에 그런 망상은 가지고 있진 않으나 그래도 의리 초콜릿 정도는 받을 상대가 있는 놈들이 있다. 보통은 교우관계가 좋거나 뭔가 얻어먹을 것이 있는 녀석들이고 이런 놈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연인이 생기곤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같은 존재가 있다. 누구에게도 초콜릿 따위 받을 이유도 가능성도 없고 오히려 발렌타인 데이 무렵에 괜히 눈빛이나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너 혹시 초콜릿 기대하는 거니?' 같은 비웃음이나 살 존재...

초중고를 건너 대학교까지 지나면서 그런 현실은 바뀌지 않았고 차츰 나는 그런 현실에 적응해갔다. 포기하면 편한 법이다. 대학을 올라가니 2월달 즈음엔 적당히 사람들 안 보고 살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었다. 군대에선 다같이 발렌타인 데이 따위 개나 줘버리라며 초코파이로 정을 나눌수 있었다. (군시절이야 말로 가장 평화롭고 은혜로우며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문제는 사회에 나와 취직을 하고 나서였다. 어쩌다보니 여자가 많은 회사에 취직한 덕에 사무실 근무인원 8명 중 남자라곤 나와 과장 둘 뿐이었다. 6명의 여직원 중 두 명은 기혼이었고 4명은 처녀였지만 당연하게도 나에게 초콜릿 따위는 커녕 다정한 눈길 한 번 온 적이 없었다. 하물며 의리 초콜릿이라도 돌릴 법 했지만 달랑 남자 둘인 사무실에 배불뚝이 박 과장은 농땡이가 전공이고 성희롱이 부전공인지라 저걸 주느니 아예 돌리지 말자란 분위기가 사무실엔 팽배했다. 

사단은 그 4명의 미혼들 중 하나를 내가 짝사랑한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초콜릿을 받을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 하나 받지 못하는 찌질이로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멍청한 짓인 줄 알면서도 일을 벌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 솔직하게 까자면 스스로 내 앞으로 초콜릿과 꽃다발을 배달시켰다. 묘령의 연인이 보낸 것 처럼. 왜 그랬는지 정확히 이유를 설명하긴 힘들다. 그렇게 하면 짝사랑하는 그녀가 질투의 시선이라도 보내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되는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발렌타인데이 당일 출장이 잡히고 말았다. 2명의 유부녀 직원 중 하나인 최 계장과 칠곡의 공장으로 검수와 재고확인을 나가야 했다. 최 계장은 대한민국 아줌마답게 입심이 좋았다. 보통 여자들은 나와 단둘이 남게되면 어색해하고 점차로 불쾌해하는 수순을 밟기 마련이지만 최 계장 같은 아줌마들은 예외였다. 전날 했던 드라마 줄거리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아이 이야기, 남편 이야기를 거쳐 부동산과 환율 그리고 코스닥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찰나 초콜릿 이야기가 나왔다. 말 그대로 갑툭튀였다.

"경수씨는 초콜릿 줄 사람 없어?"

"아, 네... 뭐."

"어머, 올해 나이가 몇이었지. 서른.. 둘이던가? 뭐해 여자친구 빨리 안 만들고?"

"바쁘잖아요."

이렇게 사람 사정도 모르고 연애 이야기 꺼내는 상대가 나로선 제일 불편했다. 32년을 살면서 연애는 커녕 여자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아니 진심어린 친절 한 번 겪어보지 못한 남자에게 이런 주제는 정말 할 얘기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럼 진짜 애인 없는 거네? 어떻게 내가 다리 좀 놓아볼까?"

당황스럽다. 이 여자는 눈썰미가 없는 건가. 아니면 날 놀리는 건가. 나를 보라고, 소개를 해주게 생겼나. 괜히 나섰다가 나 같은 거 소개해줬다고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야.

"아니에요."

"에이, 이거 봐. 누구 있지? 아님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나."

"아니라니까요!"

난 살짝 짜증을 부리며 답했다.

"그래? 그럼 요번에 기대 좀 해도 되겠네."

"예?"

갑자기 뭔 소린가 싶어 의아해하는 나에게 최 계장이 속삭이듯 말하기 시작했다. 맙소사 달랑 둘이 탄 채 국도를 달리는 모닝 안에서 누가 우리 이야기를 엿듣는다고 이러는 건가.

"혜숙씨 있잖아. 동네 제과점에서 선물용 초콜릿 고르고 있더라고. 나한테 딱 걸린거지. 내가 누구 줄거냐고 이리저리 떠보는데 눈치가 아무래도 자기인거 같아."

맙소사... 이게 뭔 소린가. 혜숙씨라면 바로 앞서 말한 나의 짝사랑 그녀였다.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에 잠시 영혼이 붕 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돼, 정신차려! 너 운전중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선 최 계장을 슬쩍 흘겨봤다.

"그 얘기 진짜입니까?"

"어머, 정색하기는. 후후. 누나 말 믿어봐. 초콜릿을 딱 보는데 자기 생각이 나서, 그거 우리 사무실로 날아오는 거 아냐?라고 농담을 쳤는데 혜숙씨가 아니라면서 베시시 웃고 말더라고. 발렌타인 데이 용으로 나온 거라서 안에 장미모양 초콜릿도 들어있고 꽤 비싼 세트였는데 그런 걸 그냥 살리 없잖아?"

그 순간 나에게 배달시킨 초콜릿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영화를 빨리감기하듯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머리 속에서 그려졌다. 혜숙씨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줄 초콜릿을 확인한다. 마침 출장나간 내 빈자리를 보고선 퇴근길에 몰래 올려놓자는 생각을 한다. 그 순간 택배 아저씨가 사무실로 들어와 내 자리를 확인한다. 그리고 초콜릿과 꽃다발을 책상 위에 올려둔다. 생각나는 대로 지어낸 '은지'란 여자가 보낸 발렌타인 데이 선물. 세금포함 12만1천원짜리 선물을 보며 혜숙씨는 내가 임자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접은 채 초콜릿을 숨긴다. 젠장! 젠장!

난 거칠게 핸들을 꺽어 차를 돌렸다. 놀란 최 계장이 뭐하느냐며 소리쳤지만 내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택배보다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야 한다. 가속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이 들어갔고 규정속도 이상으론 단 한 번도 달려본 적 없던 모닝의 계기판 바늘은 100을 훌쩍 뛰어 넘었다. 그리고 커브를 도는 순간 허공에 차가 떴고 기억이 끊겼다.

"깼냐?"

머리가 둘로 쪼개지는 듯한 두통과 함께 눈을 뜨자 귓가에 박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친 놈, 그 좁은 국도에서 120으로 달리니 사고가 나지. 이만한 게 다행이야. 최 계장도 크게 다친 덴 없다고 그러고. 안전벨트가 진짜 사람을 살리긴 하네. 나도 오늘부터 꼬박꼬박 채우고 다녀야겠다. "

사고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따윈 없었다. 빌어먹을. 결국 사무실로 돌아가지 못했다. 내 생애 처음 받게 될 초콜릿도, 짝사랑 그녀와의 핑크빛 로맨스도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왜 죽을상은 하고 그래. 걱정 하지 말라니까. 한달 입원하면 깔끔하게 나을 거래. 출장갔다 난 사고라서 회사에서도 산재처리하고 위로금도 지급한다더라. 솔직히 이 정도면 로또맞은 거지. 물론 차는 박살이 나긴 했다만 솔직히 너 차 바꿀 생각하고 있었잖아. 자, 이거 먹고 힘 내 자식."

박 과장이 바닥에 놓인 봉투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나에게 건냈다.

"어, 이건?"

"예쁘지, 그거 비싼 거다. 이거 비밀인데. 내 '요거'가 발렌타인 데이라고 선물로 주더라."

음탕한 눈으로 새끼손가락을 까닥거리는 박 과장과 손에 들린 장미꽃 모양 초콜릿을 번갈아 보던 나는 결국 크게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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