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섹시한 사람들이 있죠. 타고나길 그렇게 난 것처럼.

사랑하면 안 섹시했던 사람도 섹시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사랑하지 않아도 섹시한 사람, 있지요.

 

하지만 저는 누구나, 누군가에게는

숨막힐듯 섹시한 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음악같은 짜릿함일수도, 희미한 실루엣일수도, 송곳같은 디테일일수도.

 

2.

 

제게도 그런 기억이 몇 있어요.

사랑했던 건 아니고, 사랑할까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며,

단지 스쳐지나가는 사람이었거나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리 싫어해도-어떤 강렬한 순간은 잊혀지지 않고 있다가

모래밭에 숨어있던  유리조각처럼 따끔,하고 밟히곤 하더란 말입니다.

이상하죠. 이상해요.

 

우연히 어른 남자의 발바닥을 본 일이 있어요.

합기도였나... 를 했던 분이었는데 발차기를 할 때 옆선으로 쳐야한다며

푼수처럼 발을 휘둘러 보여주었는데 눈에 확 들어온게 희고 단단한 발바닥이었던 거예요.

 

변태 인증은 아니예요. 발 페티쉬 같은거 그 때도 지금도 없는데 이상하게 그 발바닥이, 흡. 충격이었나봐요.

아, 저렇게 차는 건가, 하고. 군살없이 날렵한 선으로.

제게 키스하려다 눈 앞에서 멈춘 적이 있는데 차마 발바닥을 내놓아라,고 할 수 없어서.

 

두 번째는 아는 분이 와인바를 오픈할 예정이던 어느 날

얼핏 들은 기억을 더듬어 터덜 터덜 찾아갔을 때

인테리어 때문에 한창 연장질에 피곤했을 그의 후배가 쇼파에 널부러져 자고 있던 뒷모습.

 

아직 정리가 덜 되어 목재 따위가 굴러다니는 가게에

어슴푸레하게 있었던 것이 사람이었구나 하는 짧은 인식과

달콤할 것 같은 땀 냄새, 들어보고 싶은 숨소리요.

모르는 사람이니 당연히, 외면하고 깜깜한 지하실로 내려갔지만.

 

다시 말하지만 변태 인증은 아니예요. 땀 냄새 같은거 전혀 좋아하지 않는걸요.

생각해보면 제가 목수라는 직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어서

굴러다니는 나무향이나 중후해 보이는 나뭇결이나 그 속에 사람이 나무처럼 늘어져 있었다는 것에

자극받지 않았을까 싶네요. 톳밥을 한 줌 쥐어 문질러보면 어떨까 그런 기분이요.

 

세번째는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아직 어릴때의 이야기인데

애인은 아닌데,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를 두고 어쩔 줄 몰라하던,

침대 정면에서 큰-의자에 몸을 묻고 망연히 쳐다보던 그의 자세예요.

 

길지않은 망설임이었지만 그렇게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목을 빼고 있었던가, 팔걸이에 손을 올렸던가, 허리는 꼿꼿했던가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표정에 아주 어정쩡했던 자세였던 걸로 기억해요.

 

저는 남에게 보여지고자 하는 욕망도 없고 뜸 들이며 괴로워하는 걸 즐기는 타입도 아니예요.

그런 변태는 아니니까요. 아니지만, 그 정적은 완벽하게 섹시한 긴장감이었어요.

 

네 번째는 귀예요, 하얗고 깨끗한 귓바퀴에 대한 이야기인데.

다 잊은 것 같은데 왜 귀만 기억에 남았을까요.

검은 머리카락과 빨간 목도리 사이에 하얀 귀 라는 느낌이 너무나도 단정했던 거예요.

 

너무도 평범한 소도시의 너무도 평범하게 흘러가는 강변에서 평범한 소년과 평범하게 만났는데

밤이어서 그랬는지 좀 으슥한 물가여서 그랬는지

강에 비친 가로등도 일렁일렁 하고 움직이지 않는 귓바퀴 같은 것이 이색적이기도 하더군요.

 

자꾸 말하는 것 같은데 변태는 아니..

사실은 함께 있는 내내 그는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고 저는 귀 밖에 볼 수가 없었던 거죠.

 

3.

 

모두 사랑하지 않았지만 섹시했던 순간이죠.

 

사랑했던 사람들의 섹시함에 대해서는 쓸 수가 없네요.

변태가 아니라고 말하다가 끝날 것 같아서요.

 

아무튼, 사랑하지 않아도 정말로 섹시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평범한 사람들끼리 평범한 하루를 보내다가 갑자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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