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버린 나의 일기에 대하여

2011.12.05 16:03

이울진달 조회 수:1711

0.

 

휴대폰 발신번호표시제한 서비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팸, 보이스피싱, 스토킹, 고백이랄 수 없는(누구인지 알 수 없으니) 감정배출,

동의받지 않은 전도, 범죄자의 협박전화시 신분은폐..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성이야 나름의 순기능이 있다고 쳐도

휴대폰의 이 서비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적 순기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보이는데

제가 모르는 순기능이 있나요.

 

왜 발신자에게 저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인지.. 

뭔가 번호가 고정돼 있으면 스팸신고라도 하겠는데,

1004, 555555 이런 식으로 바꿔 보내는 데는 아무 소용 없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발신번호제한서비스만이 아니라,

전화나 문자를 하면 해당 전화기 번호가 고정돼서 나왔으면 좋겠어요.

 

발신번호표시제한 서비스가 존재하는 한

발신번호표시 서비스는 완벽해질 수 없다고 투덜대 봅니다.

 

애초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공포스럽거나 무례하지 않은가 말이죠.

그걸 또 편리하게 도와줘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1.

 

아래 10년치 일기장 글 보고 생각났는데

일기를 정말 日記로 꾸준히 쓰시는 분 계신가요.

 

저는 요즘 (쓰지도 않는) 일기의 개념이 헷갈려요.

 

물론 난중일기 같은 공식적인 기록/일지에 가까운 일기가 있었고

안네의 일기 같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도 있겠지만

언제나 '일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문방구에서 본 자물쇠 달린 예쁜 노트 같은 거예요.

 

아무나 열어볼 수 없는, 나만 열어볼 수 있는 노트는

어린 나이에 마냥 멋져보이는 하드커버라서 더욱 멋진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언제나 산 지 열흘이 채 못되어 열쇠를 잃어버리고,

결국 저를 포함해 누구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버려지곤 했네요.

 

머리가 좀 굵어진 이후로는-정확히는 엄마에 대한 불만을 잔뜩 풀어놨다가 된통 혼난 이후로-

혼자서 암호 같은 것을 만들어서 끄적거리곤 했는데

대한민국의 청소년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보니 제가 만든 암호를 제가 잊어버리는 불상사 발생.

 

암호를 정리해서 일기장 앞면에 붙여놨더니 근성의 어머니가 해독하시는 기염을 토하고 첫사랑에 대해 놀리시어

역시 이 방법도 안되겠구나 하며 의기소침해있던 어느날 친구가 저에게 위로랍시고 던진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원래 일기란 누가 봐주길 바라면서 쓰는 거 아니야?'

 

지금 생각해보면 이 친구는 이미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 등등의 트렌드를 미리 읽었던 게 아닐까 싶네요.

어릴땐 꼭꼭 숨기지 못해 안달이었던 일기를, 공개적으로 쓰고, 새 글이 떴다고 알림 표시도 해주고

지인들이 찾아와 '참 잘 했어요' 따위의 도장까지 찍어주니.

 

허세 가득한 글도 많지만 그래도 저는

싸이월드의 다이어리 기능 같은 건 나누자면 일종의 '교환일기'로

혼자 쓰는 나만의 일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비공개 폴더가 진짜 일기에 가까운거겠죠.

 

2.

 

생각해보면 일기에도 정말 다양한 종류가 있죠.

 

독서일기를 쓰는 분들은, 제 주위엔 없지만 온라인에서 보면 간혹 계신 것 같고

어릴때는 주제에 따라 '관찰일기' 라든가 '꿈 일기' 같은 것도 만든 기억이 나네요.

표지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건 절대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확인할 수 없는 변명을..

 

한동안 저도 미니홈피를 많이 했을 때는 비공개폴더에 일기를 썼는데

시간 지나도 찾아보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싸이월드 서비스를 이용 안하니 안 쓰게 되더군요.

 

군대 간 남자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점철돼

흡사 닭껍질로 포장된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종이 일기는

어느 날 교통사고라도 당해 죽게 되었을때 유품을 정리할 사람들에게 절대 보여줄 수 없어,

죽어서도 비웃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찢어서 버렸고요.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같은 것을 써 보고 싶지만

내공 없는 제가 쓰면 아류의 아류의 아류 정도가 될텐데 

그게 바로 싸이월드 허세글 오프라인 버젼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만 두었어요.

 

매일 일기 검사를 받을 때는

선생님이 백여시라며 도장 다섯개씩 찍어주고 그랬는데 다 어디갔는지.

 

이제는 도장 찍어줄 사람도 없고 막상 일기랍시고 쓸 내용도 없네요.

뭐 대단한 일상을 보내는 것도 아닌데 사색도 필력도 없는 바, 기록까지 남기자니

거창하게만 느껴져요.

 

3.

 

신년이 다가온다며, 다이어리 같은 것을 이것 저것 보고있자니

어쩌면 이렇게 예쁜 노트가 많은지..쓰지 못할 걸 알아 선뜻 사기도 어렵지만

일기 쓰는 습관이 있었다면 아마 샀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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