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역사를 못 합니다. 특히 국사와 근현대사는 믿을 수 없을만큼 저와 맞지 않았어요. 수험 때문에 국사를 피해갈 수 없었고, 그래서 국정 교과서을 6번 정도 통독하는 걸 기초로 다른 여러 시도를 했지만 제 뇌는 단호하게 사건의 시계열적 나열을 거부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숫자와 문자를 연결짓는 걸 도무지도 하질 못 했죠. 중학교 세계사 진도에서 뒷쳐져 영영 오스만 제국 이후로는 그 꼬리를 잡지 못하고 수업시간 종일 고통당한 결과가 아닐까 유추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저는 과거를 다중한 의미가 담긴 물방울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떼지어서 시공간을 날아다니는 형태로 보입니다. 물방울의 내용은 박정희일 수도 있고, 프랑스 혁명일 수도, 2차 세계대전일 수도 있지만 위치나 내용이 불분명할 경우가 많죠.


아주 느린 속도로 여러 서적을 통해 근현대사를 재정립하는 와중인데, 본걸 또 봐도 머리는 새롭게 받아들입니다. 어쨌거나 이 와중에 리영희의 <대화>는 제 근현대사 인식을 현실로 내려앉게 도와주더군요. 이 책은 전부 다 읽고 다시 이야기할 것인데, 슬기로운 해법을 이야기 하기 전에 이 책을 우연히 읽고 있었다는걸 빼먹고 넘어가기가 어려워서요. 단순히, 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를 상식처럼 읽는 세계와는 백광년 떨어지고, 리영희라는 이름을 정치평론가를 듀게에서 추천받으면서나 들어본 어린 세대입니다. 마치 한나 아렌트처럼, 그 이름을 들으면서 '아 그 사람(이 쓴 글)과 언젠가 맞닿드리겠구나'고 생각했죠. 어쨌거나, 무지하게 재미없는 <한국언론사>보다 훨씬 실감나는 언론사를 옆에서 속삭여주니 그렇게 재미날 수 없더군요. 책은, 중등 교육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청년기를 거쳐, 한참 여러 특종을 터트리는 와중에 독재로 신문 언론들이 다림질되는 중년기에 다다랐어요. 5.16과 5.18 사이에 그 부분을 읽고 있으니 참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흥이 들었습니다. 이 뒤로 여러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05년도에 마무리된 이 책은 노무현 까지일 것이고, 신기하게도 <슬기로운 해법>은 바로 그 이후의 에필로그와 같은 내용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더군요.


먼저, <슬기로운 해법>은 매우 재미있으니 보기를 권합니다. 다큐멘타리 영화는 이게 처음에다가 (햄버거를 먹는다던가, 기상이변을 지적한다던가, 미국 의료보험의 문제점을 토로한다던가 하는 유명한 다큐들도 본 적이 없죠) 군 시절에 <다큐멘타리 제작론>을 읽고 알지도 못하는 장르에 호감이 있었다는 걸 알려드립니다. 편향된 추천을 경고하는 거에요. <슬기로운 해법>은 다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표와 그래프가 아주 예쁘게 나와요. 그 하나 만으로도 전 충분히 만족스러웠죠. 표 부분만 따다 나열해도 훌륭한 언론 비판 삽화가 될 겁니다.


음, <슬기로운 해법>은 5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각각의 장이 예쁜 이름들이 붙어있었지만, 제 머리에는 1. 부동산 2. 노무현 3. 이명박 4. 광고 5. 삼성 으로 기억나네요. 본지 얼마 안됐지만 차례가 틀렸다는 직감이 듭니다. 4와 5가 바뀐거 같아요. 부동산의 경우, 선대인 경제 사무소에서 많이 들어본 내용들이 들어있죠. 부동산 시장에 관심있으신 분들이라면 꽤 익숙하게 들릴겁니다. 다만 신문이 거기에 영향력을 어떻게 주고 받는지를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는 것이죠. 그렇게 새로운 부분은 없었지만, "집 값이 오르면 오른다, 내리면 내린다며 화낸다"고 아주 오래전에 부동산 관련 이야기를 하며 댓글을 달았었는데 그 주역이 국민보다는 언론이었구나 하는 확증을 가지게 되었죠.


2. 노무현은 음, 저는 노무현에 대한 호오가 없어요. 다만 사법 살해처럼 언론 살해를 목도한 기분이었어요. 어떤 개인이 공공연하게 살해되는 걸 목격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 개인이 "전 대통령"이라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직종의 은퇴자였으나 방도가 없었다는 것이 무섭더군요. 그렇다면 평범한 개인이 언론과 척을 쌓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이 들고, 그 자리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좀 더 오래 대항해 주었다면 좋겠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찰과 언론의 콤비플레이를 통해 그렇데 많은 의혹이 사실인 것처럼 정리되고 지금에서도 모 사이트에서 망자를 놀리는데 사용된다는게 정말 가슴 깊이 섬뜩합니다. (신문에서 오보를 내고 사실 정정까지 그것을 사실인양 사용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언론중재위원회의 정정 숫자의 증가로 언급되더군요. 각각의 숫자가 정확하진 않지만, 2012년에 1100건이 신청되었고 760건 정도가 정정보도 되었다고. 엄청난 오보의 국가 아닌가요.)


3. 이명박. 잃어버린 10년을 되돌리는데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뭘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국민의 호응을 잃은 것이 방송이라고 표적삼은 이명박은 낙하산 국장들을 각 방송국에 보냅니다. 그래서 각 방송국에서 반대하던 노조들이 짤리게 되죠. 알다시피 미디어법도 통과시켜 독과점 형태인 신문사가 방송사도 겸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채널 번호도 해택을 주고, 신생에서 벗어날 때까지 국가가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법을 짜죠. 언론 "장악"이란 말이 강해서 싫어하는데 이 단어로 설명이 다 되지 않나 싶더군요. 4개의 종편이 시작했을 때, 듀게에서는 상당히 비웃었죠. 2014년에도 평가를 대충 넘기고 더 시간을 얻게 된 종편 중 어디가 문을 닫기는 할까 궁금하군요. (울며 겨자먹기로 광고료를 내는 회사들과, 일정량의 세금이 종편에 계속 지원되고 있다는 사실이 참.) 그리고 제겐 jTBC의 <밀회>가 듀게에서 인기를 끄는게 많이 낯설었습니다. 저도 세월호 참사로 결국 jTBC 9시 뉴스를 보게 되었지만 10일 째였나, 15일 째였나 세월호 참사 보도가 끝나고 나서 살며시 끼어 넣어진 삼성이 애플에게 패소를 여러개, 승소를 하나 했고 승소로 얻게 되는 보상이 코딱지 만해도 승소 자체가 의의가 있다는 꼭지를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는 건 언급해야겠군요. 현 KBS의 여러 상황 등, 박근혜정부까지 올 필요도 없이 이명박 정부 때 국영방송들이 얼마나 변화했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4. 광고. 신문사들이 신문을 팔아서 돈을 벌지 않는다는건 공공연한 사실이죠. 신문사가 부동산에 상당량 지분이 있다는 이야기가 앞에서 나오긴 했지만, 한국의 대기업 자산 중 실질가치가 없는 부동산이 매우 높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죠. 큰 회사에서 많은 자금을 굳이 다른 곳에 투자하기보다 토지를 사 두는게 연간이율이 많이 나오기도 할테니까요. 가치하락이 일어나면 회사가치 중 어떤 부분이 순식간에 떨어지긴 하겠지만요. 4.와 5.가 섞여서 어디가 어디까진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런 이야기입니다. 삼성의 광고 비용이 한국에서 1위인데 (기억이 잘 안나지만 4000 ~ 7000억) 그게 각 신문사로 갈라지는 그래프를 그려봤을 때 특이점 두 군데가 있다는 거죠. 첫 째로는 09년 11월 한겨레와 경향의 광고 비용이 0으로 떨어져 오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조중동의 살짝 아래이긴 하지만 차이가 그렇게 크진 않았죠. 이런 목을 조르는 행위는 삼성 비자금 보도 때 시작되었다더군요. 둘 째로는 11년 7월 ~ 11월이었던 거 같은데, 이건희의 원포인트 사면 때까지 조중동에 대한 삼성의 광고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했단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히도 조중동에서는 이건희에 관련된 보도를 쏟아냈구요.


마지막으로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의건희 개인을 위한 신문 편집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약 17개의 신문에서 삼성에 관련된 보도만을 잘라서 A4에 옮겨 복사하는걸 쓸모 없는 잡티를 제거하기 위해 한 10번 정도 한 결과물을 하나로 묶어 '이건희 (혹은 삼성) 신문'(실제로 나온 단어는 아닙니다)을 만들어 전달한다는 거죠. 음, 저는 그런 신문을 받아서 매일 같이 보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삼성을 생각한다>란 책에 삼성 일가에게 가져다 주는 언론 보도가 상당한 편집을 거쳐 입맛에 맞게 조절된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죠. 방송도 아주 잘 편집되서 살살 녹는 걸 만든다였던가, 읽은지 너무 오래되서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요. 내가 엄청난 재벌의 총수가 되면 그런 것도 할 수 있구나 싶더군요. 그런 '개인기업신문'을 가진다는 건 자신과 기업을 일체로 생각한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마무리로 오로지 삼성만이 언론인 상을 준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5000만원 정도 되는 상금과 함께 교육 기회를 준다고 하던가. 벌써 17회더군요. 거슬러보면 95년 정도부터 시작했겠죠. 그리고 교차편집되는 것은 (삼성?) 노조가 독과점 언론 때문에 전혀 언급도 없이 잊혀져가고, 기자 회견을 한다고 했더니 연행되었다는 이야기였죠. (이에 관한 듀나님의 트윗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머리 속에 맴돌았습니다. "후반에 나오는 삼성언론상 시상식장 장면에서는 '부역자들'이라는 말밖에 안 떠오르더군요." 부역자들, 요새 보는 과거사 청산 책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단어죠.)


-. 창작물을 감상하면서 감정을 표출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6개월에서 1년 정도 전부터 다른 건 몰라도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되었어요. (아직도 절 웃기는 영화는 정말이지 별로 없습니다. 영화보고 재치에 웃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군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생리현상처럼 제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지도를 그린 것 마냥 어쩔 줄 몰랐죠. 아직도 잘 적응은 안 되지만 모종의 감수성이 제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치부하게 되었습니다. 제 친구에게 말했더니 '감상적이 되었군'이라 하더군요. 음, 감상적이라, 적절한 형용이에요.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영화가 끝나고 눈물이 마구 흐르는데, 이번에는 그게 무슨 이유 때문인지가 명징했기 때문이에요. 그건 거대한 정보 시장에서 우리가 개인으로 버려졌다는, 고아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오는 몸서리였죠. 저는 어떤 자료를 보고 꽂히거나 의구심이 들면 그게 어떤 맥락인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정보들을 교차 취합해서 전체를 그려보려 노력하는데, 왜 그런 노력을 하기 이전에 그에 걸맞는 언론 보도가 없느냐에 대한 질문이, 바로, '너는 고아야'라는 대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언론은 중립이 아닙니다."로 고백되는 사실검증의 기능을 완전히 잃은 언론 사이에서 하루에도 엄청나게 많은 (쓰레기와 함께)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리영희라는 언론인의 과거사와 대비되면서 나는 그가 부재하는 시대에 살고 있구나 하며 참 서러워졌습니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사실검증 정보를 얻으려면,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먹는", 즉 어른이 되야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죠. 자기 구좌를 가지고 지원하는 대안 언론 같은 거 말이에요.


그런 언론 시장적인 입장에서, 저는 체리 피커의 위치였는데, 일간지는 아니더라도 주간지는 사 볼 수 있으면 사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자기가 응원하는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는 것처럼 말이죠. 다시 한 번, 대중 전체가 공감하는 통합의 언론이란 이제는 나오지 않을거라 생각하니, 그 분할의 시대가 상당히 개인적인 제게도 차가워서 싫어졌습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이상적인 과거가 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죠.


+. 저는 지연된 정보가 의미를 가지는 시대라 생각합니다. 예컨데 일간지는 저물고, 주간지도 조금 힘들고, 월간지와 계간지가 힘을 얻는 시대요. 신문사에서 내는 월간지는 조중동은 전부 있지만 한겨례나 경향 등의 진보 측에 월간지가 있는걸 확인하진 못 했고 없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 관점에서 일간지의 하락 뒤에 월간지가 힘을 얻는지를 다큐에서 다뤘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렇다면 최종 보스 삼성으로 귀착되는 흐름이 흐트러졌을까란 생각이 들긴 합니다. 여성 잡지도 그렇고. 한국에서는 현재, 사실보다는 사실로 보이는 것의 두께가 승리의 근거가 되는데 정치에서 그 대부분은 조중동의 월간지에서 나오는 것 같더군요. 다만, 개인적인 추측이니 사실과 전혀 다를 수도 있겠죠. 월간지는 팔리는 시장을 확실하게 전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요. (종이 출판물과 디지털 출판물 중 월간지는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인 형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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