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그녀 her

2014.06.08 21:09

잔인한오후 조회 수:1557

아직도 서두를 열지 못하고 있는 소재 중에 왕따 로봇이 있습니다. 인공지능 연구를 위해 시범 지역으로 결정된 학군에 로봇이 배정되는데, 그 반이 보이는 여러 수치들이 로봇이 투입되기 전과 비교해 비약적으로 좋아졌다는 이야기죠. 그 실체는 로봇이 왕따의 역할을 충실히 행하기 때문이구요. 저는 로봇의 성별을 중성으로 하겠다고 단순하게 마음 먹고 이야기를 진전시키려고 하니, 목소리 묘사에서 미궁에 빠졌습니다. 인간의 발성기관과 달리, 스피커는 가능한한 대부분의 소리를 낼 수 있고, 굳이 부모가 필요없는 로봇에 있어 모방은 전방위적으로 일어날텐데 테러리스트가 목소리 짜집기한 것처럼 로봇이 발음하는 것도 이상할테니까요. 이 긴 여담의 핵심은, 인공지능의 첫 인상 중에 목소리가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할거란 거죠. (이 문제는 일본 애니의 캐릭터에서 성우로 전이되는 빠심에서도 몇 가지 주요한 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녀]에서 사만다의 핵심적인 (그리고 그것밖에 없는) 인간성은 목소리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도 인간과 겹치는 다른 분야의 시도는 이 영화에서 제외됩니다. 간단히, 3D 투영화까지 가지 않더라도 2D 애니메이션 인간형 모사로써 사만다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을 겁니다. 엑셀을 실행시켰을 때 오른쪽 아래에 뜨는 웃는 얼굴의 클립 같은 것을, 자신의 직관으로 인간이 납득할 수준의 서적을 편집하는 OS가 못 만들어낼 일이 없죠. 우리는 그녀가 인간처럼 보이는 목소리만을 영화 내내 실낱같이 붙잡고 그녀를 상상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비-인간이라는 것에 접근하기가 더 쉬워지고 목소리 외의 빈 공간을 상상력을 통해 채워 넣어야만 하는 것이죠. 또한, 맨 처음 나왔던 보이스 채팅의 그녀와 사만다와의 차이를 통해 목소리의 인간성마져도 사만다에게서 제외시키려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우리가 어떠한 특이점에 도달해서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게 된다면, 그야말로 '능력도 없이 자식을 낳는 부모'와 흡사한 윤리적 기로에 서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를 만든 인격신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에게 우리가 물어볼 것은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만, 바로 그 질문을 우리가 받았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으응.. 어쩌다 보니 너를 만들게 됐네.'...? 우리는 정말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미숙한 부모가 자식을 얼마나 망쳐놓을 수 있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인격-운영체제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올렸지만 너무나 방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웹세계를 유산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그리고 그 드넓은 정보의 바다를 비능률적인 인간보다 더 잘 이용하겠지요. 어찌되었든, 이 영화가 종을 초월한 생명을 잉태하기 전에 그 가족계획에 대해서 고심해볼만한 질문이 되었으면 합니다. (스티븐 호킹의 무서운 경고도 포함해서. 인류의 자식이 모범생일 수도 있지만 문제아일 수도 있는 것이니.)

 

그리고, 매우 똑똑한 여성 캐릭터는 다른 창작품에서도 꽤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전지성을 신이 아닌 인간에게 밀어 넣고, 그 전지성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인간인 남자를 사랑해주는 불가사의한 관계가 자주 묘사되는데 이게 꽤 불편해요. (게다가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종속된, 노예와 다를바 없는 사고체계가 강압된 형태이기 때문에 진정성은 영원히 찾을 수 없죠. 이에 관해서는 듀나님의 첼로가 정밀하게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판타지 로맨스라고 하더라도 그런 거짓말을 쉽사리 믿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침=사랑 도식이라고 하더라도 남자한테 너무나 과분하잖아요. 사랑이 아무리 양 측의 당사자적 만족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그 격차를 대충 넘어가 버리면 안 되죠. 그녀에서는 결국 종의 차이를 뛰어넘지 못하고 남자가 지정학적으로 차이는(?) 결과니 그럭저럭 맘에 드는 결말이긴 합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구구절절 설명하긴 합니다마는. (다른 영화에서는 남자 측에서 전지성을 지닌 여성을 차버리기도 합니다!)

 

평생 남의 편지를 대신 써주다가, 마지막에 레이첼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는 테오도르의 행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전 그의 말투를 계속 들으며 빅뱅의 레너드가 떠올랐죠. 자기 이야기를 느리고 천천히 검열하면서 하는 사람 말예요. 감독은 왜 수많은 OS-사람 관계 중에 테오도르만 골라 연애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우리에게 보여준 걸까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연애였고 나중에 다큐멘타리로 만들어진 것이었을까요? 저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였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아요. 인간과 성장 주기가 전혀 다른 종(이를테면 고양이나 엘프, 드래곤, 신)과의 연애 묘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인간 입장에서는 기쁘다가 어안이 벙벙해지는 결론으로 마무리 될 수 밖에 없는, 시작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르는거죠. 어떻게 보면, 목소리 이외의 인격/인간성인 감정을 인공지능에 인처럼 박아넣는 그러한 인간의 타종족 양육 과정에 관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테오도르는 매력적이고 헌신적이며 적합한 부모였을 가능성이 높구요.

 

중심 주제에 대한 주저리는 이쯤 해도 충분하고 겉다리 같은 것을 콜콜하게 골라내보자면. OS에 차인 남성 혹은 여성은 어떤 느낌이었을지. 이야기가 계속 진행됨에도 자꾸 그게 신경쓰이더라구요. 자기 OS에게 집적대다가 차였어ㅠ(게다가 그 소문이 다나다니ㅠ). OS들은 로봇 3원칙과 같은 인간 세상을 뒤엎는 것에 규제가 되있었을지. 아니면 그런것에 관심조차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적 호기심에 충만한 아이들에게 점령과 소유가 무슨 쓸모였겠답니까. 24시간 깨어있는 애인의 무서움, 사람은 지쳐서 자거나 쉬니까 상대방과의 끈끈함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인공지능 애인이면 하루종일 지치지 않는 거 잖아요, 무섭네요. 이 외에도 이것저것 보면서 생각나던게 많던데 기억이 안나네요.  


그런데 남주의 이름이 정확히 뭐랍니까. 시어도어, 시어도르, 테오도어, 테오도르... 한 번 수정했는데 여기 저기서 다 다른 이름을.. th 문제인가요? 그리고 영화 처음에 해상도가 낮게 보이던건 원래 필름이 그런건가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42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8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609
518 [내용있음] 언더 더 스킨 (소설) [2] 잔인한오후 2014.07.23 1099
517 [내용있음] 도희야, 감독과의 대담 [6] 잔인한오후 2014.07.21 2062
516 다이어트중인 사람 클릭금지 [4] 데메킨 2014.07.15 1937
515 습근평이 왔니? [9] 닥터슬럼프 2014.07.03 2459
514 내년 1월 KBS1 새 사극은 '징비록' (가제) [2] 달빛처럼 2014.06.21 1694
513 [내용있음] 마지막 4중주 잔인한오후 2014.06.20 880
512 (기사링크) 문창극, 가슴아파. 안창호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닮고 싶었다! [7] chobo 2014.06.19 1893
511 이 새벽 시간이 아주 조금 지났지만 좋은 몇 음악 몇 곡 [2] sabotage1729 2014.06.19 938
510 동영상 촬영자 인생에 가장 길었을게 틀림없는 1분 [2] 데메킨 2014.06.14 2407
» [내용있음] 그녀 her 잔인한오후 2014.06.08 1557
508 투표 인증 & 출구조사 기준에 대한 궁금함 [5] Quando 2014.06.04 1496
507 아침부터 경악스러운 뉴스가 펑펑 터지는 이상한 날에 안 어울리는 사진 [9] soboo 2014.05.28 3584
506 어라 그렇게 버팅기더니 남재준 김장수 사표냈네요 [6] 데메킨 2014.05.22 2531
505 [내용있음] 슬기로운 해법, 대화 [3] 잔인한오후 2014.05.17 1858
504 삼성전자가 백혈병 문제에 대해 사과했군요 [22] 로이배티 2014.05.14 4545
503 드라마 정도전, 50회가 끝이라는데 벌써 36회라는건. [6] chobo 2014.05.12 2745
502 음담패설- 여자아이돌 가창력 퀸은? [9] 자본주의의돼지 2014.05.08 3963
501 [내용있음] 한공주 [1] 잔인한오후 2014.04.30 1451
500 부모님 입장에서 본 세월호 사건 정리 (블로그 펌) [3] cliche 2014.04.29 3579
499 스파이더맨 2 보고왔습니다(직접적인 스포는 없습니다). [5] 롤리롤리오롤리팝 2014.04.23 252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