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엔 운동도 가야하고 시간도 맞지 않아 TV시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주말에 몰아서 드라마 3편 보는 게 내 유일한 테레비라이프입니다. 가뜩이나 시청률도 낮고 주변에 보는 사람은 언제나 나 혼자인 드라마지만 저녁 8시부터 밤11시까지 꼼짝 않고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sbs드라마를 봅니다. 그 중 신기생뎐. 혹시라도 작가의 옛날의 대사빨이 남았을까 일말의 기대를 하면서 보고 있노라면 역시나 한심한 드라마. 이 작가의 드라마에 대한 얘기야 워낙 많지만 그동안 내가 봐왔고 보고 있는 드라마를 총망라하니, 결론은 세 가지 축인데 오늘은 그 중 한 가지만 씁니다.

    

   데뷔작이 뭐였는지는 몰라도 내가 가장 먼저 접한 건 겹사돈을 이슈화하고 김지수를 일등며느릿감으로 등극시킨 ‘보고 또 보고’입니다. 김지수나 정보석 또는 허준호와 이순재 등등 당시의 캐스팅이 연기력에서 빠지는 사람도 없었고, 요즘 말마따나 깨알 같은 재미와 에피소드를 선사해 줘 방영시간대엔 거리가 텅 빌 정도는 아니라도 시청률이 제법 높았습니다. 간호사로 근무하는 은주(김지수)와 작가지망생이었던 금주(윤해영) 자매 그리고 지금은 타계한 박용하 삼남매를 축으로 하는 서민가정, 반대로 ‘방배동 사모님’ 으로 등장하는 박원숙과(그전까지는 서민이미지였다가 이 드라마로 일약 사모님으로 신분상승) 그의 딸 성현아(요즘말로 시크한 차도녀), 이순재와 김민재 부부의 검사 아들 정보석과 무용수로 나오던 허준호. 이렇게 3가족의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간호사인 은주는 독립심도 강하고 제 앞가림도 잘하는 평범한 서민 가정의 야무진 둘째딸로 작가지망생인 언니와 유순한 남동생과 함께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또래의 여자애들처럼 한창 멋내고 꾸미고 싶지만 백화점 매대나 보세가게에서 옷을 사 입는 형편의 알뜰함에 만족하면서도 엄친딸인 성현아의 럭셔리함과 고급스러움을 동경하기도 하는 평범한 젊은 직장여성이죠. 원래 은주의 엄마 감창숙과 박원숙이 아웅다웅하면서도 잘 지내는 친구사이였던가 하는데 그런 엄마들 밑에서 처지(?)가 다른 동갑의 딸 또는 젊은 여자들의 미묘한 신경전이나 심리묘사들도 잔재미가 있고 실감이 났어요. 은주가 좀 더 내숭떠는 식으로 감췄다면 언니인 금주는 부잣집딸인 성현아가 입은 옷이며, 수영장에서 본 몸매나 피부에 대한 부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사를 치기도 하죠.

  

   이때 성현아의 상대역으로 정보석이 나오는데, 방배동 재벌집딸과 명망있는 법조인의 결합은 이미 떼논당상처럼 당연하게 결합될 판이었어요. 그러나 있는집딸 행세에 재섮을 떨던 성현아와 맞장 한 판 뜨고 친해진 은주가 정보석에게 대시하죠. 성현아와 친해지기 전부터 호감이 있었다가 가까워지고 난 후에 성현아의 짝으로 내정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물론, 시어머니인 김민재의 극심한 반대와 성현아의 배신감으로 인한 따귀세례쯤 거뜬히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 이때부터 은주는 그 전부터 틈틈이 쌓아온 요리실력과 온갖 살림의 지혜를 다 동원하며 시할머니인 사미자와 함께 목욕을 가는 둥 시어머니조차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꿰차고 들어 집안의 예쁜이로 자리매김합니다. 그 이쁜이가 뭘 어떻게 여우짓을 해서 사랑받았는지는 좀 있다가 구체적으로 쓰지요. 이 드라마는 당시에 자매가 형제와 순서가 바뀌게 결혼하는 겹사돈으로 화제가 됐지만 오늘 내가 하려던 얘기는 그게 아니니 패스. 어쨌든 이 드라마는 지금의 임성한 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든 재미와 공감이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지극히 평범한 서민출신의 여자가, 뼈대 있는 집안에서 ‘곱게 자라’ 능력도 출중히 갖춘 세련된 남자를 자기 남자로 만들기 위해 어떤 전략을 구사하는가, 의 효시로 보이지만 그것을 콤플렉스로 의심하기보다는 나름의 설득력을 갖춘 개연성을 부여합니다.

 

   두 번째로 본 것이, 우리의 ‘아리용~’, ‘인어아가씨’입니다. 보고 또 보고가 그 시간대에 방영하기 좋은 일일드라마로 딱이었다면, 이 작품은 조금 더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하며 참혹한 복수극으로 시청자들에게 스릴과 서스펜스를 선사하지요……? 여주인공(장서희)가 드라마작가로 나오고, 박근형, 정영숙, 한혜숙, 우희진 그리고 우리의 김성민이 주왕이로 나오는 드라마입니다. 역시 작가의 페르소나 같은 아리영은 못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야무지고 당차고 마음 깊숙히 자신과 엄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서늘하게 칼날을 가는 여주인공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죠. 보고 또 보고의 은주가 친근감 있는 옆집 언니나 누나 같은 캐릭터였다면 아리영은 그보다 훨씬 더 독하고 비기어린 인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또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 됩니다. 전작의 정보석이 조금은 판에 박힌 잘난 남자라서 의심이 덜했다면 이 드라마에 나오는 김성민은 진짜 임 작가의 남성 취향을 제대로 간파하게 만드는 인물이죠. 물론 모든 드라마에 잘난 남주들은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재벌이거나 아니면 반항하는 재벌3세거나 아니면 알고 보니 재벌이었다거나 그도 아니면 곧 재벌이 될 운명이라거나……. 뭐 고단하고 평범한 많은 대한민국 여자들의 환상은 그것으로 족합니다만, 예리하고 까다로운 일부 시청자의 눈엔 그 정도로는 감흥이 오질 않지요. 돈은 공기와 같은 기본이고, 그보다는 가문이나 가풍 또는 품위 같은 거, 한 마디로 여타의 드라마 남주들처럼 돈은 많은데 개날라리인 주인공이어서는 안 되는. 임작가의 드라마 남주인공은 돈과 배경 기본 다 갖추고, 인물도 좋고, 몸도 좋고, 인성도 좋고, 지성도 빼어난데다 마지막 화룡점정인 ‘곱게 자란 티’ 가 나야한다는 겁니다. 이 작가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지점이라는 것을 이 드라마 보고 확실히 깨달았어요. 이주왕은 영식까진 아니라도 좋은 집안의 자제로 주요일간지의 기자로 재직하는 건실하고 잘생긴데다 반듯하기까지 한 남자입니다. 어찌어찌 우희진과 맺어질 상황이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 듯하다가, 드럼이면 드럼,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음식이면 음식, 못하는 게 없는 마성의 아리영에게 끌리게 되지요. 처음에 복수심으로 이복 여동생의 남자를 빼앗겠다는 계획이었던 아리영 역시 주왕이의 반듯하고 있는 집에서 곱게만 자란 귀족도련님의 풍모에 자꾸 빠져들게 되고…… 이후엔 뭐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블라블라.

    

   이 두 편 보고 작가의 귀족도련님 콤플렉스 의심증 70%였던 제게, 정점을 찍어준 드라마는 ‘하늘이시여’입니다. 드라마에서 왕모와 자경이가 결혼하던 날, 실제로 저는 외국으로 출국하는 날이어서 이후의 줄거리는 인터넷 뉴스로밖엔 보지 못했지만 탄식이 나왔어요. 어쩜 이다지도 한결같단 말인가. 이후에 이 작가가 나이차 꽤 많이 나는 PD랑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검색해보니 실제 결혼 상대는 드라마의 남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던데요. 어쩜 하나같이 자신이 쓰는 드라마의 남자주인공은 있는 집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스타일인지, 그런 남자를 보면서 자괴감에 빠지고 멀쩡한 자기 자신을 부족하다 느끼며 쪼그라드는 긴 생머리에 청순이 지나쳐 청승맞은 얼굴을 한 마른 몸매의 어딘지 2% 촌스러운 여주인공들이 여지없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현동마님, 보석비빔밥 같은 후속작들은 갈수록 안드로메다라는 평가를 들을 때마다, 저는 가장 먼저 남주와 여주의 스타일부터 검색했는데 신인치고는 상당히 노숙한 외모의 청승맞은 얼굴을 한 여주와 어딘지 턱선이 강하고 하악이 발달한 듯한 남주가 쌍을 이루더군요.

   

    그리고 요즘 한창 방영중인 신기생뎐. 진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초반의 어설픔이야 신인들 때문이라 치더라도 도대체가, 간지라고는 1g도 안 나는 재벌집 세트에, 하다못해 옷이라도 잘 입고 나와서 눈요기라도 시켜줄 만한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이도저도 아니라면 기생에 대한 전문적인 취재로 하다못해 무슨 배경지식 하나라도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오화란 대표가 사란이에게 기생의 꽃길과 가시밭길에 대해 일러주는 대목도 참 오글거리지요. 물론 춘앵무(정식 명칭은 춘앵전으로 알고 있습니다만)라든가 강선영류의 태평무 비슷한(?) 춤이 나오면서 나름 고급한 기생(?)의 수준을 보여주려 한 것 같은데……솔직히 말해 내가 춰도 그보단 잘 추겠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출생의 비밀과 비극을 간직한 사란이가 다모에게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말하는 그 대목들, 기생 데뷔 후 다시 만난 다모에게 자신의 구질구질한 출생사를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으면서 “밥 먹기 전에 말하길 잘했지? 미리 말했으면 밥맛 떨어졌을 거야.” 라든가, “나 자기한테 너무 미안해, 나 너무 부족하고 모자란 부끄러운 출신(성분)이야” 같은 대사에서 진짜 이 작가의 콤플렉스는 저것인가 싶을 정도로 심각한 생각이 들더이다. 대개의 모든 드라마에 출신성분 다른 남녀가 연인으로 엮이지만 저런 식의 대사를 치는 주인공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불균형한 출신성분을 극복하고 귀족도련님의 사랑을 꾸준히 얻기 위해 이 작가의 여주인공들은 부단히 노력합니다. 어떻게 무슨 노력을 하는지는 다음에 쓰지요, 헥헥.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41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6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84
133 [바낭] 뻘짤-나꼼수에서 수영복 멘트가 나왔을때 제가 생각했"던" 센스있는 사진 [9] Planetes 2012.01.30 10075
132 이상한 프로포즈 문화가 불편합니다 [59] commelina 2014.04.13 8506
131 이쯤에서 다시 보는 레즈비언 부부 아들의 의회 연설 [9] 13인의아해 2012.09.21 7704
130 [19금] 자두맛 사탕님께 제 경험담을... [8] 1분에 14타 2010.07.19 7272
129 [매복사랑니 발치 후기] 휴가까지 냈건만, 이리 아무렇지도 않을 줄이야-_;;;;;; [11] Paul. 2011.03.25 6896
128 남초사이트의 이중적 태도 [40] 와구미 2010.11.17 6056
127 [소개팅바낭]소개팅 후 애프터는 어떻게 받는 건가요? [22] 잠익3 2012.05.07 5767
126 교정 교열 알바 해보신 분들, 보통 얼마 정도 받나요? [7] Paul. 2011.03.16 5186
125 안녕하세요 문정혁 입니다 [5] 가끔영화 2010.10.31 5125
124 자세히 보면 3초 만에 빵 터지는 사진 [19] 걍태공 2011.12.07 5110
123 [매우짧은바낭] 박재범이 싫습니다. [13] 로이배티 2011.08.20 4920
122 독신주의자가 연애를 하는 건 정녕 민폐란 말입니까. [17] Paul. 2011.10.04 4861
121 "아이들이 무섭고 교사할 맛 안나"… 명예퇴직 신청 급증? [40] catgotmy 2011.12.18 4749
120 뒷북 - 이혼가정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 [10] soboo 2010.11.22 4681
119 [19금] 그냥 [18] 1분에 14타 2011.05.18 4650
118 오늘 '원어데이'는 장사할 생각이 없는 듯 [4] 닥터슬럼프 2011.09.02 4623
117 7번국도님 결혼 게시물을 보고 뒷목 잡으면서 바낭. [17] 가라 2010.10.05 4526
» 그 작가의 드라마를 이루는 세 개의 축-1. 곱게 자란 귀족도련님 콤플렉스 [14] Koudelka 2011.06.28 4345
115 [기사]안철수 "차라리 무소속 대통령이…" [45] 妄言戰士욜라세다 2012.10.10 4325
114 자자..잠깐만요. 메릴 스트립, 줄리아 로버츠가 모녀로 출연하는 신작에, 합류할 지 모르는 배우들이 ㄷㄷ [8] 프레데릭 2010.10.05 422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