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형태로 작성했어요. 글의 말미에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엔딩에 관한 언급이 있어요.)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가 타계한 지 2주가 넘었다. 많이 늦었지만 그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영화음악 작곡가이기 때문에 추모글을 올리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세르지오 레오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마르코 벨로키오, 엘리오 페트리, 쥬세페 토르나토레, 타비아니 형제, 다리오 아르젠토, 질로 폰테코르보 등 수많은 이탈리아의 대표 감독들과 작업을 한 이탈리아 영화의 역사 그 자체이며 이탈리아 이외에도 롤랑 조페, 테렌스 맬릭, 브라이언 드 팔마, 쿠엔틴 타란티노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주옥같은 명곡들을 발표했다. 그는 오스카 작곡상 부문에 여러번 노미네이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상을 하지 못하다가 2016년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으로 마침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엔니오 모리꼬네의 열혈팬이기도 한 타란티노가 그가 죽기 전에 작곡상 수상을 하게 해준 것이 팬으로서 그에게 큰 선물을 준 것 같고 참 다행인 듯싶다. 

모리꼬네의 음악은 우선 한번 들으면 결코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이루어진 서정적인 선율이 늘 압도적인 인상을 남기며 심금을 울린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그는 대중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많았던 작곡가인데 레오네와 함께 한 ‘달러’ 삼부작에서 <옛날 옛적 서부에서>, <석양의 갱들>에 이르기까지총 다섯 편의 서부극에서는 휘파람 소리, 총소리, 관악기 등 다양한 사운드를 동원해 실험성이 강한 작업을 하기도 했다. 특히 아마도 엔니오 모리꼬네의 최고의 성취라고 할 만한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모든 곡들은 영화의 장면들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 결과 한 편의 오페라나 교향곡을 방불케한다. 레오네의 서부극에서모리꼬네의 음악이 없었다면 과연 클라이맥스의 결투 장면들이 지금처럼 인상적일 수 있었을까.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리꼬네의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명곡이 너무 많아서 나열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모리꼬네이기에 나와 관련된 사연이 조금이라도 있거나 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모리꼬네의 곡들에 대해 언급하면 좋을 듯싶다. 어린 시절 토요명화에서 세르지오 레오네의 <속 황야의 무법자>를 보던 순간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밤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겁이 많은 나는 도둑이나 강도가 들어올까봐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귀가 예민한 나는 어느 순간 복도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를 들었고 가족 중의 누가 초인종을 누를 걸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초인종 소리는 들리지 않고 갑자기 누가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놀라고 겁에 질린 나는 조심 조심 현관문으로 접근해서 “누구세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어서 두려운 나머지 아직 잠그지 않았던 보조 자물쇠를 잠그고 현관에서 마루로 들어오는 문마저 잠궈버렸다. 다행히 이후로 아무 일도 없었고 가족들이 귀가해서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해프닝이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모리꼬네가 작곡한 <속 황야의 무법자>의 테마 음악은 유난히 또렷이 내 기억 속에 각인되었고 자주 그 음악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모리꼬네의 곡들 중에 대중들에게 별로 회자 되지는 않지만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OST는 파졸리니의 <테오레마>이다. 하길종 감독이 <화분>을 만들 때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이 영화는 한 신비로운 청년이 상류층 가정에 들어와 가족 일원 모두와 사랑을 나누고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청년이 떠나고 난 뒤 가족들은 모두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영화에서도 모리꼬네의 실험성이 돋보이지만 이 영화의 오프닝에서 흘러나오고 영화 속에서 여러번 반복되어 사용되는 재즈곡을 나는 특히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이 곡은 알고보니 테드 커슨(Ted Curson)의 ‘Tears for Dolphy’였다. 아직 정확한 사실을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모리꼬네가 원곡을 편곡해서 이 영화에서 사용한 듯싶다. 

아마도 대중들이 가장 사랑하는 모리꼬네의 곡은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 OST일 것이다. 토토와 영사 기사 알프레도의 아름다운 우정을 통해 ‘영화’에 헌사를 바치는 이 작품의 OST는 한번 들으면 결코 잊혀지지 않으며 <시네마 천국>뿐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사랑하게 만든다. 영화에 미쳐 살아온 나인만큼 나도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된 데에는 모리꼬네의 음악이 큰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나는 이 영화를 MBC에서 처음 본 이래 오랫동안 극장에서는 보지 못하다가 작년인가 드디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극중 시네마 천국 극장에서 한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 대사를 다 따라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장면에서 내가 울 줄은 나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스크린으로 마주한 너무나 유명한 엔딩 장면. 그 장면에서 모리꼬네의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울컥하는 심정이 되었고 토토와 같은 마음으로 검열로 인해 삭제된 수많은 영화들의 키스 장면들을 보았다. 그 장면을 보면서 너무도 아름다워서 슬프기까지 한 모리꼬네의 곡의 선율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나는 토토와 혼연일체가 된 듯했다. 그때의 행복감과 벅찬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최근에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봉준호의 <기생충>에 삽입되어 크게 화제가 되었던 지안니 모란디의 ‘In ginocchio da te’가 엔니오 모리꼬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In ginocchio da te’는 알고 보니 에토레 마리아 피자로티(Ettore Maria Fizzarotti)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에 삽입된 곡이었고 그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게 바로 모리꼬네였다. 이 영화에서 지안니 모란디는 주연으로 직접 출연해서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추정되는 장면에서 ‘In ginocchio da te’를 부르고 여주인공과 사랑을 이룬다. 이 영화는 당시 히트를 쳤는지 이듬해 지안니 모란디와 여주인공이 또다시 캐스팅되어 후속편이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서 모리꼬네의 곡은 어떨지 무척 궁금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르지오 레오네의 걸작 <옛날 옛적 서부에서>를 얘기할 때가 되었다. 영화 사상 최고의 서부극 중의 한 편인 이 영화는 존 포드의 걸작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 영향을 받았고 <리버티 밸런스를...>와 유사한 서부에 바치는 장엄한 엘레지이다. 레오네는 <옛날 옛적 서부에서>와 포드의 서부극과의 연관성을 숨기지 않으려는 듯 포드 영화의 단골 배우들인 우디 스트로드와 헨리 폰다를 이 영화에 출연시켰다.(우디 스트로드는 <리버티 밸런스를쏜 사나이>에서 존 웨인의 부하 폼피역으로 출연했다.) 철로가 놓이면서 서부가 점점 문명화되고 그로 인해 무법 상황에서 시대를 풍미했던 서부의 총잡이들이 사라져가는 시대의 전환기를 그리는 이 영화는 한 시대의 종언을 보여주는만큼 관객으로 하여금 애잔하고 슬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의 모리꼬네의 음악은 옛 서부가 사라져가는 풍경이 전해주는 멜랑콜리와 문명의 도래로 인한 새로운 희망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잘 전달하는 데 성공하여 관객에게 결코 잊지 못할 여운을 남긴다. 특히 이 영화의 테마곡은 정말 압권이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무언가가 눈 앞에서 사라져 전설이나 신화가 되어버리는 느낌을 받는데 그 상실감이 절절하게 느껴져 울컥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곡에서 여성의 목소리로 사라진 옛 서부가 불려져 나오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스크린에서 잠시 옛 서부가 부활한 뒤 이내 다시 영화와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슬픈 예감 또한 갖게 만든다. 

이 테마곡이 나오는 가운데 <옛날 옛적 서부에서>에서의 불후의 명장면이 연출된다. 바로 이 영화의 엔딩에서 질(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이 하모니카(찰스 브론슨)와 작별하는 장면이다. 하모니카가 마을을 건설하고 있는 인부들을 보면서 질에게 말한다. “아름다운 도시가 될 거에요, 스위트워터.(Gonna be a beautiful town, Sweetwater.)” 그러자 질이 하모니카에게 말한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면 좋겠어요.(I hope you’ll comeback someday.)” 그러자 하모니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문 밖으로 나가면서 조용히 말한다. “언젠가.(Someday.)” 담백하게 연출된 이 짧은 대화 장면은 그야말로 심금을 울린다. 이 장면은 단순히 한 인물과 작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와 작별하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모니카는 ‘언젠가’라고 답했지만 그는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도 그가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질과 하모니카가 거짓 희망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장면이 너무 슬픈 것이다. 하모니카는 형의 복수에 성공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프랭크(헨리 폰다)를 죽인 것은 그 스스로 그가 존재했던 시대를 끝내버린 것이기도 하다. 프랭크가 없이는 하모니카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하모니카에게 남아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와 동일한 주제를 반복한다. <옛날 옛적 서부에서>에서의 하모니카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의 톰 도니폰(존 웨인)은 동일 선상에 놓여있는 인물인 것이다. 모리꼬네의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문명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시대에서 주역으로 살아갈 질과 옛 서부를 상징하는 인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하모니카가 서로 눈빛과 시선으로 미묘한 감정을 주고 받는 얼굴 클로즈업 쇼트들은 가히 시네마틱함의 절정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게 <옛날 옛적 서부에서>는 전설이 되었다.

오래 전에 엔니오 모리꼬네 내한 공연에 갔었다. 그때 현장에서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테마곡과 <시네마 천국>의 곡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까이에서 모리꼬네를 실제로 볼 수 있어서 감격적이었다. 그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나니 그때 공연에 갔었던 게 참 다행이었던 듯싶다. 늘 그가 그리울 것 같다. 

엔니오 모리꼬네 작곡가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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