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4 21:12
0. 프로이트에 대한 거부
"우리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 프로이트는 증후를 치료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지만, 우리는 인생을 완전하게 살아가며 완전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사석에서의 위니캇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하는 데 거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서는 이러한 견해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것이 위니캇이 자신의 이론을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벗어난 것이라기보다 그것으로부터 발전되어 나온 것으로 제시하려는 전략이었다고 말합니다(Greenberg and Mitchell 1999, 329). 위니캇은 그의 저작에 멜라니 클라인의 개념들을 거부감 없이 사용할 정도로 클라인의 업적을 높이 샀습니다. 특히 그는 '우울적 자리' 개념의 도입을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도입했던 것만큼 높이 샀습니다.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성숙한 성인들은 전통을 파괴한 후, 재창조의 과정을 통해 오래되고 낡은 전통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 말은 그 자신의 정신분석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가 자신의 발달 이론을 세워가는 데에 있어서 어떻게 전통을 파괴한 후 재창조하는 지 한번 살펴볼까요?
1. 절대적 의존기
막 출생해서부터 수개월 정도까지의 시기입니다. 유아는 자신을 환경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나'도 없고 '나 아닌 것'도 없습니다. 모성적 환경은 유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만, 유아는 그런 어머니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위니캇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a baby.... A baby cannot exist alone, but is essentially part of a relationship."
위니캇은 절대적 의존기 동안 유아가 양육자에게 신호조차 보낼 수 없다고 봤습니다. 유아는 자신이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에 대한 신호를 보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돌보는 이는 유아가 소통의 의도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유아의 행동을 의사소통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차려 주지 않는 양육자를 가졌던 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 성인은 평소에는 잘 기능하다가도 연애를 할 때는 독특한 방식으로 '까다로운 상대'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연애 관계에 있어서 서로에 대한 호칭을 살펴보면 다양한 나라에서 유아 혹은 그것을 연상시키는 작은 것, 동그랗고 귀여운 것 등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미국의 'baby', 'babe', 'bae', 한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그리고 여전히 소수가 사용 중인 '애기', 중국에서 요즘 세대 들이 쓴다는 baby에 해당된다는 중국어 호칭, 아기들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프랑스의 ‘작은 양배추’(Petit chou), 포르투갈의 호박(Chuchuzinho), 등등 (김종백, 2013)) 저는 이것이 연인관계가 우리 정신의 일부를 영유아기로 퇴행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명제에 대한 강력한 증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까다로운 연애 상대는 상술한 절대적 의존기의 아기처럼 자신의 욕구나 요구에 대해 상대방에게 언어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실험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정신분석적으로 탐색했던 심리학자 Ayala Malach Pines(2005)는 이런 현상을 무의식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에, 이러한 최초의 근원적인 대상(=엄마)과의 관계에서 가졌었던 과거 장애물들을 다시 꺼내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제시하며,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상대방을 통해서 그 문제의 지점을 극복하려 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무의식은 (특히 연애와 사랑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흡사 그때는 틀렸더라도 지금은 맞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계속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곳에만 반복해서 큰 판돈을 거는 무모한 도박사 같습니다. 그래서 이 까다로운 연애 상대의 상대방은 위니캇이 묘사한 절대적 의존기의 양육자처럼 연인의 욕구나 요구를 아무런 단서 없이 파악해내야만 합니다. 그런 신묘한 능력이 부재하다면 결국 이 까다로운 상대에 의해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임상적인 예제로는, 엄마가 자신의 욕구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일기장에다가만 엄마 욕을 한 바가지 써대는 대학생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대학생의 어머니는 말을 하지 않는 이 대학생 자녀가 도저히 답답하고 견딜 수가 없어서 분석의뢰를 하게 됩니다.
[그래비티] 스틸 이미지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를 가진 아기는 절대적 의존기에 욕구가 존재하는 순간 곧바로 충족되는 마술적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출산 전 3개월과 출산 후 수개월(Greenberg and Mitchell 1999, 308)까지의 기간 동안 생물학적으로, 진화론적으로 준비된 '일차적 모성 몰두(primary maternal preoccupation)'라는 광증에 가까운 기능을 산모가 수행하게 됨으로써 유아는 자신을 모든 존재의 전능한 중심으로 경험합니다. 유아가 소망하면 이뤄집니다. 그녀가 배고프고 젖을 원하면 젖이 나타납니다. 그녀는 젖을 창조했습니다. 만일 그녀가 춥고 기분이 언짢아져서 따뜻해지기를 원하면 곧 따뜻해집니다. 그녀는 자기 주변 세계의 온도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주변을 창조합니다. 어머니는 지체하지도 않고 조금도 빠뜨리지도 않고 그녀에게 세계를 가져다줍니다. 위니캇에 따르면, 그러한 어머니의 반응은 유아에게 그녀 자신의 소망이 욕망의 대상을 창조한다는 믿음 곧 환상의 순간을 제공합니다. 물론 위니캇은 이런 어머니의 완벽한 적응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만든 개념인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는 적절한 실패를 할 가능성까지도 내포하고 있고, 어머니의 필연적인 실패는 유아의 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어머니는 점차로 그녀에게 '세계를 가져다주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일찍이 태아에서 유아가 될 때 출산 과정을 통해 큰 고통을 겪었던 유아는 완벽하게 적응해주던 어머니가 점진적으로 실패함으로 인해서 또 매우 고통스럽지만 한 걸음 더 성장하게 됩니다. 자신이 욕망의 대상을 창조해낸다는 그전의 신념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이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유아가 건강한 어머니와 같이 있을 때 경험하고 체험하는 '전능감'은 성장을 위해서는 점진적으로 포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적응의 실패는 성공만큼이나 유아의 현실감 발달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위니캇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서 환경이 완벽해야 할 필요는 없다. 완벽함은 기계에 속한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유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그가 보통 얻는 것, 즉 누군가의 돌봄과 관심이다."
만약 어머니가 전혀 실패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거의 15년 전에 어느 연구소의 수업 시간에 들은 사례인데(당연히 들려주셨던 분도 각색하셨을 겁니다) 조금 각색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4대 독자가 있었고 그를 우쭈쭈하는 어머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우쭈쭈가 아니어서 위니캇이 얘기하는 점진적 실패는커녕 절대 실패하지 않는 적응을 절대적 의존기가 다 지나가도록 계속 아기에게 제공했던 것 같아요. 그는 커서 신학대학에 들어갔고 어떤 시점에 40일 작정 기도를 하고 나서 자신의 이름을 이를테면 '김예수', 이런 식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르고 그를 포함한 그에게 딸린 부인과 자식들은 모두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통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잘못된 유아기 돌봄에 의해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전능감을 포기하지 못한 이로 인한 비극이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유아기의 전능감이 포기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전능감의 경험이 적절하면 '자신감'이 되지만 너무 포기가 안 된 채로 성장하면 소위 '똥고집', '지적 오만'이 됩니다. 인간은 현실에 너무 매몰되지도 않아야, 또 전능감이 너무 지나치지도 않아야 창조성도 예술도 즐길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절대적 의존기에 대해 쓰며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상되는/적혀있던 사례들이 좀 많았네요. 저는 이런 내용들을 배우면서, 양육자의 역할을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에 대해서 수업 중에 흥미로운 대답을 들었는데 그것은 이런 내용들을 배우지 않아도 충분히 건강한 양육자는 알아서 잘 키운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신호를 보내지 않는 유아의 욕구를 '읽어야'하는 부분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아와의 '동일시'라는 기제를 통해서 이뤄지는 데 이런 '동일시' 능력의 획득은 양육자 자신이 절대적 의존기에 있었을 때 그의 부모로부터 받은 양육에 의해 획득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본인이 받은 양육의 질을 그대로 '물려받아' 자신이 돌봐야할 대상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죠. 한창 자신의 영유아기 경험이 별로였을 것이라 확신하던 저는 '그럼 난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겠군' 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앞서 위니캇이 성숙한 성인이라면 모름지기 전통을 파괴한 후 재창조해서 낡은 전통에 생명력을 부여한다고 하였는데, 그가 뭘 파괴하고 어떻게 재창조했는지를 조금 살펴볼까 합니다.
(1) 위니캇의 전통 파괴 1
프로이트와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은 삶 충동(eros)과 죽음 충동(thanatos)이라는 두 가지 충동을 인정하고 있고, 각각에서 리비도와 공격성이 나온다고 보았지만 위니캇은 그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특히 절대적 의존기에는 미분화된 상태로 합쳐져 있다고 봤습니다. 그는 '사랑-충동(love-impulse)' 안에 있는 타고난 공격성을 강조합니다. 아기가 심지어 자궁 속에서조차도 발로 찬다고 지적하면서요. 유아에게는 자신의 공격성이 타자를 해칠 수도 있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위니캇에게 있어서 '공격성'이란 '활동성'과 거의 동의어입니다. 정상적인 아이는 놀이에서처럼 어머니와의 무자비한 관계를 즐깁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가 놀이에서 그녀의 무자비성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어머니를 필요로 합니다. 이 때 아이의 무자비성은 실제로 그녀를 다치게 하고 지치게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 의존기의 아기의 공격성이 양육자를 향한다고 할지라도 그녀에게 보복하지 않는 양육자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유아가 충분히 자신의 공격성을 사용해보지 못한다거나, 양육자에게 보복을 당하거나 한다면 자신의 그러한 끓어오르는 충동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 나쁜 것, 위험한 것으로 무의식중에 새겨지게 되고, 이것은 성인이 되어서 오르가즘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불감증의 문제, 사정을 못 하는 범위까지를 아우르는 지루증의 문제, 조루증 등의 문제의 원인들 중 하나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합니다.
(2) 위니캇의 전통 파괴 2
위니캇의 절대적 의존기에 해당되는 시기는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 이론(구강기->항문기->남근기->잠재기->생식기) 상의 '구강기' 입니다. 위니캇은 고전적 정신분석(=프로이트 정신분석)의 발달이론이 자아 성장에 있어서 지나치게 '본능적' 요구들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느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 시기에 유아의 리비도(성 에너지)가 자신의 입에 집중되고 따라서 어머니의 젖을 빠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성적 쾌락의 충족이 중요하다고 했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시기에 고착(fixation)이 일어나서 그와 관련된 문제들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위니캇은 '욕구 충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그는 절대적 의존기의 어머니의 역할을 두 가지로 구분했는데 그것은 대상 어머니(object mother)와 환경 어머니(environmental mother)입니다. 대상 어머니는 아기의 식욕, 배변욕을 충족시켜 주는 등 본능적 요구들에 부합해 주는 어머니이고, 환경 어머니는 온도와 습도가 적절한 공기, 적절한 자극을 주는 소음의 수준, 압도적이지 않으면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빌 따위가 제공하기도 하는) 시각적 자극을 제공해주는 어머니입니다. (위니캇은 환경 어머니의 역할을 '안아주기(holding)'라는 개념으로 포괄합니다.) 위니캇에 따르면 대상 어머니는 본능적 욕구들을 충족시켜주고, 환경 어머니는 자아 욕구들을 충족시켜 줍니다. 그리고 위니캇은 프로이트가 본능적 욕구를 강조했던 것과 달리 환경 어머니가 충족시켜 주는 자아 욕구(ego needs)를 강조하면서 자아 욕구가 충족되는 한에서만 본능적 욕구의 충족이 인격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유아는 이 '환경'이 좋지 않다면,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는 순간에도 불안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위니캇은 결정적인 것은 단순히 먹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며, 욕구충족이 아니라 유아의 개인적인 특성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이라고 말합니다.
레퍼런스
김종백, 2013. 달달한 것만 모았다 – 연인의 호칭, 한인헤럴드, 2013년 6월 3일.
http://haninherald.com/xe/column1/242126
Greenberg, Jay R., Stephen R. Mitchell. 1999.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 이재훈 옮김.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Mendez, A., R. Fine. 1976. A short history of the British school of object relations and ego psychology. Bulletin of the Menninger Clinic 40: 357-382.
Mitchell, Stephen A., Margaret J. Black. 프로이트 이후: 현대 정신분석학. 이재훈, 이해리 옮김.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Pines, Ayala Malach. 2005. Falling in Love: Why We Choose the Lovers We Choose. New York: Routledge
Summers, Frank. 2004. 대상관계이론과 정신병리학. 이재훈 옮김.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Wnnicott, D. W. 1963a. From dependence toward independence in the development of the individual. In The Maturational Processes and the Facilitating Environment. New York: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65, pp. 83-92.
--------------------. 1964. Further thoughts on babies as persons. In his The child, the family, and the outside world (pp. 85-92). Harmondsworth, England: Penguin Books. (Original work published 1947)
--------------------. 1965b. The Family and Individual Development. London: Tavistock.
2020.08.24 21:26
2020.08.24 22:20
'유아-엄마', '애인-애인' 둘 모두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모든 타인들이 배제되고 둘 만이 존재하는 세계라 연애할 때 유아기의 정서들이 불러일으켜 지는 것 같아요. 프로이트가 했던 말인지 다른 정신분석가가 한 말인지 헷갈리는데 문명사회에서 결혼제도가 '발명'된 이유도 '사회적 관계(세 명 이상의 관계)'를 살아가는 성인들에게 적어도 최소한, 제도적으로라도 이자적(dyadic)인 관계로 퇴행하는 것을 허용하기 위해서라고 하더라고요.
2020.08.24 22:44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에서는 이자관계가 주를 이루어 왔는데,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제3자가 어떻게 도입되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굳이 유아를 '그녀'라고 호칭하셨는데, 이건 유아가 이미 저 시기에 여성으로 성별화 되어있다는 의미에서 쓰신건가요?
2020.08.25 07:12
그러고보니 그러네요. 클라인 이론에서도 제3자(=아버지로 받아들이면 될까요?)가 글자 그대로 부분적으로만, 그것도 MELM님이 질문을 주셔서 댓글로만 다뤄졌고, 제가 듀게에서 다루고자 하는 위니캇의 범위 전체에서도 아마도 아버지가 나올 것 같지 않아요. 위니캇은 자신의 발달 이론 체계를 1. 절대적 의존기 2. 상대적 의존기 3.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 이렇게 셋으로 나눴는데, 3번에 대해서는 언급만 되고 있을 뿐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위니캇은 오이디푸스기에 해당하는 이 단계가 고전적 정신분석 이론의 틀 안에서 잘 개념화되고 이해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자신의 공헌이 필요한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Summers 2004, 204) 제가 '아버지'를 자꾸 누락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오이디푸스기 이전, 즉 전-오이디푸스(pre-Oedipal) 시기에 인간의 모든 정신병리의 뿌리가 있다고 보는 정신분석가들의 이론에 제가 크게 경도되어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흥미로운 지적이라 듀게에 글을 쓰고 있는 행위자로서의 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론 제가 지금 사용한 단어 '행위자'는 사전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라캉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행위자'의 개념부터가 제겐 너무 어렵습니다. 위니캇을 다룰 세 번째 글에서 유아가 생후 약 6개월부터의 시점에서 발달시키게 되는, 위니캇이 말하는 과학, 종교 및 문화의 기초가 되는 중간대상(이행대상)(transitional object) 혹은 중간현상(이행현상)(transitional phenomenon)에 대해 서술할 것인데 그것이 완벽하게 분화된 제 3자는 아니지만 3자성을 향해 가는 여정 중의 지표로서 제시 될 것 같습니다.
/2010년 이후에 쓰여진, 주로 성별이 여성인 분석가들의 논문이나 아티클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어떤 기분 좋은 생경함이 한 가지 있는데요. 그건 그 논문들에서 가상의 분석가와 피분석자 쌍을 기본적으로 분석가를 she/her로, 내담자를 he/him으로 상정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와 비슷한 효과를 제 글에서 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특별히 성별화한 건 아니고, 위니캇이 다루는 전 오이디푸스기의 내용은 엄마-남아 서사에 한정되지 않기에 엄마-여아 서사로 놓고봐도 아무 문제가 없고, 또 가상의 유아의 지정성별이 여성일 확률도 동등하게 1/2이니까, 한번 여아로 상정해볼까? 하는 의도였어요.
2020.08.25 11:22
제가 사회학을 공부하고, 라깡파 정신분석 글들을 읽어오다보니 사회-법-언어-아버지-상징계 이 계열에 계속 초점을 맞추게 되네요.
라깡에 따르면, 제3의 외부 효과 없이는 아이-어머니의 온전하고 자족적인 이자관계가 해체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정신병(아버지의 이름이 아예 도입되지 못한 경우), 혹은 강박증(아버지의 이름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경우)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라... 다만, 후기로 갈수록 라깡은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들'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이 프로이트 시대의, 혹은 프로이트가 구하려고 했던 절대적이고 유일한 아버지의 위상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일종의 가상들에 불가하다고 보긴 했습니다만, 중요한 건, 절대적인 아버지가 없어지면 우리가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유사-아버지들이 필요하고 또 등장한다는 점에서 어쨌거나 제3자는 필요하다는 거죠. 물론 그것은 더 이상 예전의 '사회' 같은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리고 성별화 문제의 경우, 라깡의 주장에 따르면 상징적 거세(제3자의 도입) 이후에야 성별화 된 존재가 출현하기에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위니콧이나 클라인의 관점에서는 성별화가 딱히 발생하는 시점이 존재한다기보다는 그것을 태생적 혹은 생물학적인 것으로 보는 것으로 이해되는군요.
2020.08.25 14:22
라캉학파 정신분석에서 정신증과 강박증의 원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사뭇 흥미롭네요. 주로 전-오이디푸스기에 초점을 둔 대상관계 이론들에서도 어떤 제 3의 요소가 도입되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사회-법-언어-아버지-상징계 이 계열을 인식이라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초는 '상징'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동의하실텐데, 클라인의 유아가 우울적 자리(4~6개월~24개월)를 성공적으로 겪어냈을 때 얻어지는 것이 '상징 형성(symbol formation)'의 능력입니다. 우울적 자리 시기 내에 클라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가 들어가고 그 삼각형은 나, 엄마의 젖가슴, 아버지의 페니스로 이뤄져있으므로 제 3자가 도입되어서 '상징 형성'의 능력을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비슷한 시기에 위니캇의 유아는 전능한 세계(엄마와의 이자관계)에 속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객관적 세계(삼자 이상의 세계, 현실)에 속하지도 않는 완충역할을 하는 중간경험을 하게 됩니다.
위니캇의 경우는 전-오이디푸스기에 집중하느라 아기가 언제 여자가 되는지 혹은 남자가 되는지 고민할 필요가 혹은 기회가 없었던 것ㅡ프로이트라는 막강한 아버지 대상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확립해뒀기에ㅡ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거세불안을 탐구하면서 남겨뒀던 궁금증ㅡ"거세가 이미 일어난 상황에서 거세 불안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적절치 못하다ㅡ에서 출발해 끈덕지게 문제를 탐구해나갑니다. 제가 라캉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성별화를 충분히 잘 이해한 것인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클라인은 최초의 여아와 남아의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을 우울적 자리가 절정일 때(생후 약 6개월) 일어나는 '클라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여아가 남아와 달리 아버지의 페니스를 어머니가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서 어머니와 경쟁하게 되는 시점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그의 저서 [아동 정신분석]에서 '초기 불안상황'에서 여아와 남아의 차이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언급합니다.
2020.08.25 14:41
동성커플이 기르는 아이는 어떻게 되나요. 어머니라는 호칭은 양육자에 대한 명칭일 뿐이 되나요? 성별 구분이 명확한 몇몇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오랜동안 비슷한 의문이 있네요.
2020.08.25 18:44
2020.08.26 09:08
답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