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텔레마케팅 전화는 언제 끊냐는 글을 보니,

저도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지 뭐예요.

찾아보니 이런 일기가 있군요.

 

 

2007년 7월 xx일.

 

요즘 나는 학교 총동창회에서 선배님들께

인명록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친절한 선배님들도 있습니다.

불친절한 선배님들도 있습니다.

제발 받기 싫으면 다음이라고 하지말고 그냥 싫다고 해주면 좋겠습니다.

욕하는것보다 다음에 다음에 회의중 회의중 운전중 운전중이 더 싫어요.

그럼 계속 전화해야하잖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습니다.

 

그저께는 육군 중령님께 육군 총령님이라고 했습니다.

"힘들게 버신 돈인데 이런 부탁 죄송하지만~"이라고 했더니

자기가 힘들게 번 돈인지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십니다.

"우리나라 지켜주시잖아요.."했더니 다행히도 한권 사주셨습니다.

나이스!!

 

.

.

.

 

오늘은 어떤 선배님께서 **한강 아파트에 사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자택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책은 한강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버렸습니다.

선배님이 비웃으셨습니다.

안사주셨습니다.

 

이런..............

 

1-1.

 

하루 종일 말을 한다는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입을 열 때마다 만화책에 나오는 말풍선처럼

내 영혼이 술술 빠져나가는 느낌?

 

그래도 대학생 입장에서 하기엔 좋은 아르바이트였어요.

일단 9to6 확실하고, 아르바이트 장소 가깝고, 방학때만 하는거고,

앉아서 일하는 내근직이고, 돈도 꽤 주었던 것으로...

 

그런데 다들 '선배님~'이라고 하지만 사실 후배 아닌 사람들이 더 많았죠.

직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었고..그래서 한번 난리가 났던 걸로 기억해요.

 

아무래도 후배라고 하면 선배들은 전화를 끊더라도 좀 다정하게 끊고, 막 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무슨 과냐, 누구 교수님 아냐, 몇 학번이냐 등등 물어보기 시작하면

실제 재학생 아닌 사람들은 거의 들통나거든요.

 

제가 아르바이트 하는 걸 보고 지인 몇이 따라 했었는데

일부는 '선배님들께 사기치는 느낌'이라며 그만두었죠.

사실 저도 그런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우선은 등록금 마련이 목표여서 그냥 일 했었고요.

 

실제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명목은 인명록을 팔아서 장학금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선배들이 가끔 그거 진짜 장학금 주는거냐, 뭐라고 하시면 

'솔직히 잘 모르겠고요, 사실 저도 등록금 때문에 이거 하는건데 좀 도와주시면 저같은 애들한테 장학금 준대요'라고.

 

다른 사람들은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저는 즐겁게 일했었어요.

두 팀을 나눠서 총 실적을 채우는데, 들어간지 이틀인가 사흘만에 열권 넘게 팔아서

농담삼아 팀의 에이스로... 열권 넘게 팔면 한두권은 슬쩍 보고안하고 남겨두었다가

제가 실적이 좀 모자란 날 추가하거나 실적이 모자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 주기도 했죠.

 

저 일기에 쓴 것 외에도,

수학학원을 운영하는 선배님이 책을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제자들은 모두 피타고라스가 될 것입니다!!'라고 해서

같이 전화하던 다른 사람들이 웃어버리기도 했고.

 

한 선배는 저에게 따로 연락처 받아쓰라고 하면서

앞으로 힘든 일 있거나 하면 꼭 전화하라고 하셔서

뜬금없이 감동받아서 전화 끊고 멍하니 있기도 했었네요.

 

아무튼 어떻게 하면 받기 싫은 전화라도, 책을 사지 않더라도 웃으면서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해서

하루에도 몇 개씩 아이디어를 내서 실제로 써먹는게 재미있었어요.

메뉴얼처럼 대본이 있었는데 그게 기본이긴 하지만 제 마음대로 했죠.

'선배님 선배님 (인명록만 사주시면) 제가 오늘 행운도 드리고 내일 행운도 드리고 모레 행운도 드릴게요'~

 

2.

 

아...혹시 그 즈음에 저 때문에 인명록을 사서 책장 한켠에 먼지와 함께 보관하고 계신 선배님들께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

듀게에도 계실까요?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선배님

제가 그 전화를 받는 입장이 되어보니

후배라는데 선뜻 '돈없다' 말하기도 어려운 난감한 입장 이해가 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39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5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59
87 아톰의 아버지 데츠카오사무의 오마주 [4] booooor 2012.06.22 1631
86 (도움바람) 오디오 조언 좀 부탁드려요. [6] jake 2012.06.21 1241
85 (디아블로3) 추종자가 기사단원인 필멸자분들은 봅니다. [7] chobo 2012.06.11 1745
84 [듀나인]가격 대비 괜찮은 스페인 음식점 추천 부탁드려요ㅜ,ㅜ [6] candid 2012.05.29 2744
83 지금은 쉬는 시간, 하자민 난 화가 나있어. chobo 2012.05.20 1242
82 [바낭] 아이유 신곡 뮤직비디오가 떴는데 덕후분들은 뭐 하시는... [6] 로이배티 2012.05.12 2572
81 (듀나 대나무 숲) 어제 있었던 지옥의 술자리. 당연히 회사 사람들과! [10] chobo 2012.04.20 3639
80 정준하 정도면 아담하지 않나요? [10] 자본주의의돼지 2012.04.09 3447
79 '신사의 품격' 촬영현장.(시크릿 가든의 김은숙 각본, 장동건 출연.) [10] 자본주의의돼지 2012.04.09 3396
78 [불판] K팝스타 Top 5!!! [119] kiwiphobic 2012.04.08 2727
77 이노래 4개 다 아시는 분 [10] 가끔영화 2012.03.16 1032
76 [게임속보]디아블로 3 5월 15일 발매!!! [6] 晃堂戰士욜라세다 2012.03.15 1398
75 듀나인] 책상용 스탠드 추천해주세요. + 책상욕심 바낭 [1] 홍시 2012.02.09 1433
74 올해읽은 소설들 짧은 잠담 [8] 룽게 2011.12.20 2268
73 [영상] 노다메 칸타빌레 방귀체조 [2] miho 2011.12.06 1245
72 KT 2G망 서비스 폐지, 방통위 승인. 다음달 8일 종료. [2] chobo 2011.11.23 1244
71 SBS 정성근 앵커, 1점 만회 [9] 닥터슬럼프 2011.11.18 3617
» 텔레마케팅 아르바이트를 하던, 2007년 여름의 일기 [9] 이울진달 2011.11.16 2171
69 (PC이야기) 지금은 하드디스크 대환란 중! [5] chobo 2011.10.27 1571
68 김훈 신작 『흑산』예약판매 중이군요/ 한국문학 최근작 추천해주세요. [4] Paul. 2011.10.19 1464
XE Login